[FINANCIAL TIMES 제휴사 칼럼] '중진국의 벽' 넘어선 한국

2024. 9. 23.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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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준공된 부산항 컨테이너 부두. 수출에 주력하며 신기술을 빠르게 받아들인 한국은 중진국을 벗어나 1990년대 이후 고소득 국가 대열에 진입했다. 매경DB

인더밋 길 세계은행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중진국 함정'을 다룬 '세계개발보고서 2024'에서 중진국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중진국의 전체 인구는 전 세계 인구 4명 중 3명이고, 극빈층 비중은 3분의 2에 달한다. 이들은 전 세계 경제 규모의 40%, 탄소 배출량의 3분의 2를 차지한다. 따라서 절대적 빈곤의 근절과 공동 번영의 성패는 중진국에 달렸다."

선진국 되지 못하는 '중진국의 함정'

중진국 함정은 개발도상국이 중진국에 진입한 뒤 미국, 유럽, 일본, 캐나다, 한국, 호주 등으로 대표되는 고소득 국가로 도약하지 못하고 성장이 정체되는 상태를 가리킨다.

중진국 함정은 정말로 존재하는가. 국제통화기금(IMF)의 연구원인 패트릭 이맘과 조너선 템플이 작성한 2024년 실무 보고서 '임계치: 늘어나는 중진국 함정과의 관련성'은 중진국 함정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해당 보고서는 "개별 국가의 발전 과정을 살펴보면 사회 계층 이동의 한계라는 보편적 현상과 달리 중진국 함정을 뜻하는 명백한 증거는 없다"고 주장한다. 영국 싱크탱크 글로벌개발센터(CGD)의 2021년 보고서 '비조건적 수렴 시대의 도래'에선 더 단호하게 "이른바 '중진국 함정' 담론은 시대착오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럼에도 선진국과 개도국 간 평균 소득 격차를 줄이는 건 매우 더디고 어렵다. 소득 격차가 계속되면 인류의 안녕과 정치적 안정성과 더불어 기후변화 등 글로벌 위기에 대응하는 인류의 역량을 저해한다. 특히 기후위기의 새 대응책으로서 '탈성장', 즉 양적 성장에서 벗어나 최소한의 생산량만 유지하자는 주장이 힘을 잃게 된다. 과연 어떤 중진국이 이 같은 정체를 수용하겠는가.

IMF 세계개발보고서는 "1인당 소득이 1136달러 이상~1만3845달러 이하인 전 세계 108개 중진국은 향후 20~30년 내 고소득 국가가 되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1990년 이후 고소득국이 된 34개 중진국의 인구를 합산하면 파키스탄 인구인 2억5000만명에도 못 미친다.

자본 엉터리로 쓴 中, 중진국 머물러

1990년 이후 고소득 국가 대열에 진입한 중진국 가운데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는 한국이다. 반면 일부 주요국은 선진국 진입에 실패했고 브라질이 대표적 사례다. 한때 고속 성장을 지속하던 중국도 중진국 함정에 빠졌다. 무엇보다도 1970년 이후 중진국의 1인당 평균 소득은 미국의 10% 수준을 넘어선 적이 없었다.

중진국 함정이 통계적으로 유의한지 여부와 무관하게 이 같은 상황은 걱정스럽다. IMF는 개도국에 효과적인 성장 공식이 중진국에는 통하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미국과 중진국 간 1인당 국내총생산(GDP) 격차는 물리적·인적 자본의 가용성 격차보다 크다. 이를 고려하면 중진국의 실패는 자본 축적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자본을 비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에서 기인하였음을 알 수 있다.

기술 습득·인적 교류가 韓 성장 견인

중진국은 투자에만 매몰되지 말고 해외 신기술 도입과 국내 경제 혁신에 집중해야 한다. 신기술 도입과 혁신에 필요한 선진화된 경제 구조로 발전하는지 여부는 각종 노하우의 확보와 개발에 달렸다. 기술 도입에 앞서 숙련 노동자를 도입하고 해외 직접투자나 무역을 통해 시장을 개방해 어디에서든 기술을 받아들여야 한다.

한국이 바로 이런 방식으로 극적인 성공을 거둔 사례다. 한국은 수출에 주력하며 신기술을 빠르게 도입했다. 유럽연합도 폴란드 등 최근에 가입한 회원국들의 신기술 도입을 장려했다. 혁신을 위해선 해외 유학과 연수를 통한 인적 자본 교류가 특히 중요하다. 인적 교류에 따른 인구 이동은 막대한 자산 창출 효과를 낸다. 혁신은 글로벌 시장을 향한 접근성에 달려 있다.

세계개발보고서는 중진국이 조지프 슘페터의 '창조적 파괴' 이론을 실현해야 한다고 분석했다. 프랑스 경제학자 필리프 아기옹과 피터 호이트 브라운대 경제학과 명예교수가 '내생적 성장 이론'으로 보완한 슘페터적 성장 이론에 따르면 중진국은 기존 시장 주체를 경쟁 시장으로 유도하고, 신규 진입자를 끌어들이고, 외부에 경제를 개방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창조와 파괴가 모두 발생한다. 창조적 파괴의 대표적 성공 사례도 한국이다. 창조적 파괴는 에너지 전환 가속화에도 필수적이다.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여러 중진국에선 에너지가 낭비되고 재생에너지 전환 속도도 느리다. 그 원인 중 일부는 높은 불확실성에 따른 높은 자본 비용인 점을 고려하면 사회 시스템의 예측 가능성과 안전성 강화가 절실하다.

보호무역주의가 개도국 발전 걸림돌

이 같은 과제는 개도국으로선 쉽지 않다. 보호무역주의와 연이어 파편화되고 있는 세계 경제로 인해 실현 여부는 불투명하다. 물론 일부 선진국이 대중국 무역의존도를 줄이는 등 새로운 전략을 시도하면서 기회가 열릴 것이다. 최근 경제 발전 성공 사례의 주된 원동력은 '통합'이었다. 세계개발보고서는 "보호무역주의가 더 강화되면 중진국과 개도국의 신기술 도입을 저해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고금리도 세계 경제와 통합을 위한 투자를 위축시킨다. 더 나은 세계를 위한 중진국의 성장 전망이 어두워지면서 그 희망이 빛을 잃고 있다.

※이 글은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실린 마틴 울프 칼럼 'Overcoming the 'middle income' trap'을 매일경제신문이 번역한 것입니다.

[마틴 울프 FT 수석 경제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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