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롱의 ‘쿠데타’… 성난 프랑스 민심 거리로
2024년 6월9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대국민 연설을 통해 의회를 해산하고 조기 총선을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마크롱 대통령의 소속 정당인 르네상스당(RE)이 참여한 중도우파 연합이 유럽의회 선거에서 극우파 국민연합(RN)에 참패한 탓이다. 극우파의 부상을 막는 것이 조기 총선의 목적이었다.
NFP 추대 총리 지명 않고 르펜에게 자문
6월30일 치른 총선 1차 투표에서 RN은 33.1%를 득표하며 1위를 차지했다. 1차 투표에서 과반을 득표해 당선을 확정 지은 76명 가운데 절반 이상이 RN 후보였다. 마크롱 대통령은 극우파의 집권을 막기 위해 이번엔 좌파의 손을 잡았다. ‘공화국 전선’으로 뭉친 양쪽은 후보 단일화에 나섰고, 7월7일 결선투표에서 RN은 제3당으로 밀렸다. 마크롱 대통령은 성공한 건가?
프랑스 하원은 모두 577석이다. 결선투표 결과, 좌파연합 신인민전선(NFP)은 188석을 얻었다. 마크롱 대통령이 이끈 중도우파 앙상블(ENS)은 161석을 얻었다. 원내 제1당이 된 NFP 소속 정치인이 총리로 지명돼 새 정부 내각 구성을 주도하는 게 상례다. NFP 쪽은 7월 말 경제학자 출신으로 파리시 재정국장으로 재직 중인 사회당 소속 젊은 정치인 뤼시 카스테(37)를 총리 후보로 추대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카스테 후보를 총리로 지명하지 않았다. 대신 그가 손을 내민 건, 어이없게도 극우파였다.
“최근 며칠 동안 RN 지도자 마린 르펜의 전화에 불이 날 지경이었다. 마크롱 대통령이 끊임없이 그의 의견을 물어왔다. ‘차기 총리로 공화당(LR) 소속 그자비에 베르트랑은 어떤가?’ 르펜은 ‘그다지 좋지 않다’고 답했다. 르펜은 자신이 베르트랑에게 악감정이 있음을 마크롱 대통령에게 숨김없이 밝혔다. 베르트랑은 총리 후보감에서 제외됐다. (…) RN은 ‘킹메이커’로 떠올랐다.”
프랑스 일간 르몽드는 9월5일치에서 이렇게 썼다. 두 달 남짓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마크롱 대통령은 이날 성명을 내어 “헌법이 규정한 대통령의 의무에 따라 차기 총리와 내각이 가능한 한 안정적이고 최대한 폭넓은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조건을 갖췄는지를 세밀하게 확인했다”며, 차기 총리로 미셸 바르니에(73)를 지명했다. 4차례 장관과 2차례 유럽연합(EU) 집행위원을 지낸 바르니에 총리는 ‘역대 최고령 총리’ 기록을 갈아치웠다. 그는 7월 조기 총선에서 47석을 얻은 공화당 소속이다. 제1당이 아닌 제4당이 새 정부 구성을 주도하게 됐으니, ‘선거 불복’ 논란이 불거진 건 당연했다. 바르니에 총리 지명 직후 실시된 여론조사 결과, 응답자 4명 중 3명은 “마크롱 대통령이 선거 결과를 염두에 두지 않고 총리를 지명했다”고 답했다.
“민주주의를 위해 마크롱의 쿠데타를 막아야 한다.” 9월7일 파리에서만 16만 명을 비롯해 프랑스 전역에서 성난 NFP 지지자 30여만 명이 대규모 항의 시위에 나섰다. 이들은 9월21일에도 시위를 예고했다. 이와는 별도로 NFP가 제출한 마크롱 대통령 탄핵 발의안을 하원 사무처가 통과시켰다. 사무처에 속한 의원 22명 가운데 12명이 NFP 소속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다만 사무처 통과는 시작에 불과할 뿐, 마크롱 대통령의 탄핵이 결정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법제사법위원회 논의를 거쳐 하원 전체회의에서 재적 의원 3분의 2(385명)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 ENS와 RN에 더해 LR의 의석까지 더하면 350석이다.
중량급 정치인 ‘차기 대선 몸풀기’
설령 하원을 통과하더라도, 상원 표결이 기다리고 있다. 하원의원과 각급 자치단체 선출직 공무원 약 15만 명이 선출하는 상원(348명)은 압도적 다수가 중도우파로 채워져 있다. 하원과 상원을 모두 통과하면 상하 양원 전체회의에서 최종 결론을 내리게 된다. NFP의 탄핵안 발의를 두고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그럼에도 마크롱 대통령이 일정한 정치적 타격을 입는 건 불가피해 보인다. 하원 사무처가 대통령 탄핵안을 통과시킨 건 이번이 처음인 탓이다. 2016년 11월에도 프랑수아 올랑드 당시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이 발의됐지만, 하원 사무처의 문턱을 넘지 못한 바 있다.
차기 대선에 대비하기 위한 중량급 정치인들의 ‘몸풀기’도 이미 시작된 모양새다. 정치전문 매체 폴리티코 유럽판은 9월3일 “마크롱 정부 초대 총리(2017~2020년)를 지낸 에두아르 필리프(53)가 대선 출마 준비를 시작했다”고 전했다. 공화당을 탈당해 중도우파 정당 오리종(수평선)을 창당한 필리프는 현재 노르망디 지역의 항구도시 르아브르 시장을 맡고 있다. 한때 마크롱의 가장 든든한 우군이었던 필리프가 그의 강력한 대체재를 자처하고 나선 모양새다. 폴리티코는 “마크롱 대통령이 임기(2027년 5월)를 다 채우지 못하고 물러날 것이란 지적이 있다. 일부에선 2025년 봄에 물러날 가능성도 있다는 전망까지 내놨다”고 전했다.
바르니에 총리는 임명 보름이 지나도록 내각 구성의 첫 단추도 꿰지 못한 모양새다. “선거를 도둑맞았다”고 날을 세우는 좌파 진영을 차기 정부 인선에서 아예 배제할 순 없다. 중도우파로만 내각을 채우면 ‘선거 불복' 논란이 더욱 거세질 터다. 극우파의 내각 입성 역시 여론의 반발을 피할 수 없겠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대놓고 무시할 수도 없는 형편이다. ENS와 LR의 의석만으론 과반(289석)에 턱없이 부족한 터라, RN의 지원 없인 예산안조차 통과시킬 수 없어서다. RN이 ‘킹메이커’이자 강력한 ‘캐스팅보터’가 됐다는 뜻이다.
‘킹메이커+캐스팅보터’ 돼버린 극우
바르니에 총리가 언제쯤 내각 구성을 마칠 수 있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렇게 출범한 정부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정정 불안이 이어지더라도 차기 총선은 앞선 의회가 해산된 뒤 12개월이 지나야 치를 수 있다. 2025년 6월이다. 마크롱 대통령은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내년에 차기 대선과 총선이 치러진다면, 1년여 간 주류 정치권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경험한 RN의 기세는 더욱 등등해질 수밖에 없어 보인다. 마크롱 대통령이 남기게 될 ‘치명적 유산’이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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