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서 주목한 韓 의료기기, 허가 받고도 이중 규제로 울상
복지부 인정한 신기술도 기존 기술로 푸대접
국내 의료기기 업체 큐렉소는 척추 수술을 돕는 로봇 ‘큐비스-스파인’을 개발하고 2019년 식품의약품안전처(식약처)의 제조 허가를 받았다. 하지만 나중에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이 이 기술을 신의료기술로 구분하고, 이어 한국보건의료연구원(보의연)이 진행하는 신의료기술 평가에서 국내 출시가 막혔다. 세 차례나 평가에서 탈락하면서 제값(수가)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큐렉소는 국내 출시가 자꾸 늦춰지자 미국 식품의약국(FDA) 허가를 받고 미국 시장에 먼저 진출했다. 한국은 신기술이면 이처럼 두 번이나 평가를 거쳐야 하는 상황이지만, 미국은 한 번 인허가를 받고 바로 제품을 출시할 수 있다.
신의료기술 제도가 국내 의료기기 산업의 혁신을 가로막고 있다. 국회 입법조사처는 지난달 발간한 ‘2024 국정감사 이슈 분석’ 보고서에서 신의료기술 평가의 이중규제에 대해 지적했다. 의료기기의 안전성과 유효성은 식약처 허가로 이미 보증됐는데, 의료수가 산정에 필수적인 신의료기술 평가가 또 다른 제품 허가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의료수가는 건강보험공단이나 환자가 의료행위에 대해 제공하는 비용을 말한다. 신의료기술 평가는 길게는 250일, 실제로는 평균 226일이 소요된다. 그만큼 시장 출시가 늦어진다.
보고서는 “신의료기술평가에 계류 중인 제품과 기술의 판매와 사용이 불허되는데, 개발사 측의 투자비용 회수 기회를 제한하는 것으로 기업 측에 엄청난 비용 부담으로 작용한다”며 “의료기기가 식약처 허가를 받았다면 신의료기술 평가에 앞서 일단 시장에 출시할 수 있도록 한 다음 리얼월드데이터 등을 축적해 평가받도록 하는 방법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의료기술 안전성·효능을 다시 따져 논란
신의료기술은 원래 환자들이 합리적인 비용으로 신의료기술 혜택을 받고 의료산업을 발전시킨다는 목적으로 만든 제도이지만, 식약처 허가 과정에서 인정받은 안전성·효능을 다시 평가해 되려 이중규제가 됐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심지어 신의료기술 평가를 통과해도 제대로 수가를 받지 못해 기술이 사장되기도 했다.
국내 바이오기업 시지바이오는 소화기관의 출혈 부위에 내시경으로 분말형 지혈제를 뿌리는 지혈술을 개발해 신의료기술 평가를 통과했다. 기존 지혈술로 지혈에 실패한 환자에게 도움을 주는 치료법이다. 하지만 2차 지혈술에만 제한적으로 사용하라는 조건이 달렸다. 치료 대상이 줄다 보니 수가가 낮아 연구개발(R&D) 비용을 뽑지 못했다. 함께 개발된 분사기도 치료 재료로 인정받지 못했다. 결국 시지바이오는 이 사업을 접고 그동안 기술 개발에 투입된 자금을 날렸다.
신의료기술 평가제도는 검증되지 않은 의료기술의 무분별한 사용을 막고 국민의 건강권을 보호하고자 2007년 도입됐다. 신의료기술 평가 중에는 해당 제품을 판매하거나 사용할 수 없다. 비급여 조건으로 시장 진입을 허용하는 평가 유예제도를 도입했지만, 인공지능(AI)과 3차원(3D) 프린팅, 로봇 정도로 기술 범위가 제한됐다. 식약처가 안전성과 효능을 검증하고 판매 허가를 줬지만, 심평원과 보의연이 신의료기술 평가 제도로 시장 출시를 막는 셈이다.
신의료기술 평가제도가 또 다른 ‘허가제’ 역할을 하면서 병원이 대규모 소송에 휘말리기도 했다. 유방암 검사에서 의심 부위를 절제하지 않고 작은 바늘로 조직을 얻는 유방양성병변절제술 ‘맘모톰(Mammotome)’이 대표적이다. 이 기술은 의대생들의 외과 교과서에 나올 정도로 이미 유명한 의료기기였지만, 진단 행위로 간주돼 신의료기술 평가를 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보건복지부가 2016년 모든 의료행위를 재분류하면서 맘모톰도 신의료기술로 다시 분류됐다. 맘모톰은 바로 신의료기술 평가를 신청했지만, 4년 만인 2019년에야 평가를 통과했다. 그러자 보험사들이 병원이 그동안 불법 시술을 했다며 1000억원대 소송을 걸었다. 이 소송의 변호를 맡은 임철희 변호사는 “신의료기술은 평가 결과를 공표해 국민이나 행정기관이 의사결정을 할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하는 제도이지, 인허가 제도가 아니다”라며 “신의료기술 평가를 받지 않은 의료행위를 요양급여나 비급여가 아닌 ‘제3의 행위’로 보고 식약처가 허가한 시술을 금지하는 것이 문제”라고 말했다.
◇복지부 인정한 신기술이 홀대 받기도
같은 기술을 두고 정부 한쪽에선 해외진출을 지원해야 할 신기술이라고 추켜세우고, 다른 쪽은 시장에 출시할 수준이 못 된다고 깎아내리는 일도 벌어졌다. 정부로부터 육성이 필요한 새로운 보건기술로 인정받아도 신의료기술 평가에 도전하지 못해 좌절하는 사례가 나온 것이다.
국내 의료기기 업체 임팩코리아는 4년 전 동맥혈관 전용 펌프를 개발해 양산을 시작했다. 이 프레셔 펌프는 동맥에 삽입한 카테터 같은 도관에서 발생하는 혈전(피떡)을 막기 위해 동맥 혈압을 측정하고 약물을 일정한 압력과 용량으로 주입하는 의료기기다. 기존 동맥에 약물을 주입하는 펌프는 사람이 직접 손으로 눌러 압력을 가하는 수동 방식이었는데, 이를 자동화해 감염과 혈전을 예방하는 의료기기를 만든 것이다.
이 회사는 2014년 서울아산병원 의료진의 의뢰를 받아 개발에 착수했다. 식약처로부터 2018년 허가를 받고, 2020년 8월 복지부로부터 보건신기술로 인증을 받았다. 유럽영상의학회(ECR)에 임상시험 결과를 논문으로 발표하고 미국 2건, 일본 3건, 한국 6건 특허를 등록한 덕이다. 의료기기 분야 글로벌 1위 업체와 판권 논의도 이어갔다.
하지만 심평원은 임팩코리아가 개발한 프레셔 펌프가 기존 방식과 차이 없다고 신의료기술로 평가하지 않았다. 복지부가 국내 최초 기술이라고 상업성을 인정한 기술이 심평원 단계에 와선 기존 의료행위로 뒤바뀐 것이다. 이런 경우는 기존 의료행위의 낮은 수가로 책정돼 팔면 팔수록 손해인 상황이 벌어진다.
이명숙 임팩코리아 대표는 “의료기기를 개발해도 심평원과 급여 줄다리기로 4년을 보냈다”며 “이 기술이 기존 기술로 분류되는 이유를 심평원에 계속 물었지만, 정확한 답변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의료기기 출시가 늦어지다 보니 회사 사정이 어려워져 직원을 감축하고, 도산 직전인 상태”라고 했다.
복지부 관계자는 “의료업계의 불만을 알고 있다”면서도 “식약처에서 장비의 기술적인 측면에서 허가를 냈다면, 신의료기술은 의료기기를 사용한 의료행위 관점에서 다시 평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은 전 국민 건강보험을 채택하고 있는 만큼 안전성과 효능, 경제성을 최대한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다만 조만간 공청회를 개최하고, 제도 개선 방안을 발표할 예정”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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