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 당할까’ 하면서도 당하는 ‘로맨스 스캠’ 사기 [정락인의 사건 속으로]

정락인 객원기자 2024. 9. 23.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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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상에서 이성의 마음 빼앗으며 거액 갈취하는 사기 수법
일단 사기범에게 송금하면 피해 회복 불능, 절대 주의해야

(시사저널=정락인 객원기자)

상대를 한 번도 만나지 않고 결혼까지 약속한 후 돈을 보냈다가 사기를 당하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 이른바 '로맨스 스캠'이다. 사기범들은 주로 소셜미디어(SNS)나 데이팅 앱을 통해 피해자에게 접근해 호감을 얻은 뒤 이성적인 만남이나 결혼을 조건으로 온라인상에서 돈을 요구하는 수법을 사용한다. 

사기 수법의 끝없는 진화

50대 여성 A씨는 이런 수법에 걸려들어 거액을 날렸다. 이혼 후 혼자 지내고 있던 A씨는 어느 날 한 외국인 남성으로부터 페이스북 친구신청을 받았다. 그는 자신을 중국계 미국인이며 이라크에 파병된 특수부대 소속 장성이라고 소개했다. 해당 남성의 친구신청을 받은 A씨는 자연스럽게 서로의 사진을 주고받으며 페이스북 메시지를 통해 대화를 나눴다. 영어가 서툴렀던 A씨는 번역기를 이용해 대화를 주고받았다. 달콤하고 자상함을 갖춘 남성에게 A씨는 어느새 마음을 빼앗겼고 두 사람은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

A씨는 남성이 군에서 은퇴하면 결혼할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두 사람은 약 2개월간 메시지로 대화를 나눴고 서로 전화통화를 하거나 직접 만나지는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남성이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라크에서 나가려면 외교관을 통해 수수료를 지급해야 한다"면서 돈을 빌려 달라고 요구했다. 또 "군 은퇴 자금으로 받을 예정인 39억원을 당신에게 주겠다"며 환심을 샀다. 그러면서 "자금을 받으려면 수수료가 필요하다"며 재차 돈을 요구했다. 

해당 남성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던 A씨는 그가 원하는 대로 돈을 보내기 시작했다. 한 달 동안 3차례에 걸쳐 달러로 환전해 5600만원을 송금했다. 그다음 달에도 돈을 보내려고 금융기관을 찾았다. 해외송금 제한이 걸려 있는 것을 알고는 언니 명의로 3900만원을 송금하려던 찰나, 이를 이상하게 여긴 지점장이 송금을 미루고 경찰에 신고했다. 신원 미상의 사기범은 미군을 사칭해 A씨를 속인 것으로 드러났다. 사기범이 사칭한 군인은 미군에서 36년간 근무하다 이미 퇴직한 상태였다. A씨는 뒤늦게 사기당한 것을 알고 땅을 쳤지만 피해 금액을 찾지 못했다. 

40대 여성인 B씨도 같은 수법에 당했다. 그는 인스타그램을 통해 미국에 사는 사업가 C씨를 알게 됐다. B씨는 자상하고 다정한 C씨에게 점점 호감을 갖게 됐고, 8개월간 SNS를 통해 대화를 주고받다 결국 결혼까지 약속한다. C씨는 "결혼자금 200만 달러를 한국으로 보냈는데 미국 은행의 송금 과정에 문제가 생겼다"며 돈을 요구했다. B씨는 이 말에 속아 수천만원을 송금했으나 C씨와 연락이 끊어진 후에야 사기를 당한 것을 알게 됐다.

로맨스 스캠의 사기 대상과 수법도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최근에는 중년 남성이나 20~30대 젊은 층도 예외가 아니다. 수법도 단순히 금전을 요구하는 것에서 투자 권유, 가상자산, 물류통관비, 채팅환전 사기 등 다양하다.

50대 남성 D씨는 우크라이나 여군을 사칭한 사기범에게 당해 현금 1억원을 날릴 뻔했으나 은행원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피해를 막았다. D씨는 지난달 초 페이스북을 통해 우크라이나 현직 여군이라고 소개한 여성과 메시지를 주고받게 됐다. 상대 여성은 "오랜 전쟁과 위험에 노출돼 한국으로 이주해 새로운 삶을 살고 싶다"면서 "석유사업 투자를 통해 얻은 수익이 있는데 전시 중이라 보관할 곳이 필요하다. 대신 받아주면 보관료를 지불하겠다"며 현금 1억원의 송금을 요구했다.

이 말을 그대로 믿었던 D씨는 은행을 방문해 송금하려고 했고, 담당 직원이 송금 이유를 듣고 보이스피싱임을 직감해 송금을 중단하고 경찰에 신고하면서 피해를 모면했다. 경찰 조사 결과 해당 메시지는 모두 사기로 드러났다. D씨는 이혼 후 홀로 지내다 살갑게 접근하는 사기범에게 속아넘어갔다고 한다. 

30대 남성 F씨는 얼마 전 채팅 앱을 통해 여성 사업가 행세를 하는 20대를 만났다. 그는 자신을 외국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하는 사람인 것처럼 속이고 거짓 구애를 하며 환심을 샀다. F씨가 이성적인 호감을 보이자 자연스럽게 교제하는 사이가 됐고, 투자금 명목으로 7차례에 걸쳐 4800만원의 현금을 요구해 가로챘다. 나중에 사기를 당했다고 판단한 F씨가 경찰에 신고했고, 현금을 인출하는 조직원을 현장에서 검거했다. F씨가 여성으로 믿었던 사기범은 남성인 것으로 파악됐다. 

사기범은 계정과 이름을 바꿔 사기를 치기도 한다. 40대 후반의 남성 E씨도 어느 날 외국 군인 여성으로부터 SNS 친구신청과 메시지를 받았다. 그는 자신을 '시리아 알레포에 파견된 러시아 장교'라고 소개했다. E씨가 차단하자 얼마 후 또다시 군복을 입은 여성에게서 친구신청이 들어왔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이전에 친구신청을 했던 러시아 장교 여성이었다. 이상한 것은 프로필 사진은 동일 인물인데 이름이 달랐던 것이다. E씨가 이전 러시아 여성의 페이스북 계정을 찾아봤더니 삭제돼 있었다. 그래서 사기범이 이름을 바꿔가며 자신에게 접근했다는 것을 알았다.

금융감독원 가상자산연계 투자사기 신고센터에 접수된 로맨스 스캠 사례 ⓒ금융감독원

SNS에서 불특정 다수에게 미끼 던져

로맨스 스캠 사기조직은 점조직 형태로 운영된다. 사기범들의 활동무대는 주로 페이스북·인스타그램 등 SNS와 데이팅 앱 등이다. 이들은 먼저 SNS 계정 프로필에 호감형 얼굴 사진을 올려놓고 군인, 의사, 외교관, 사업가, 거액의 유산 상속자 등을 사칭하며 사기 대상을 물색한다. 

불특정 다수에게 미끼(친구신청)를 던지고 그것을 물었다고 판단하면 그때부터 매뉴얼대로 작업에 들어간다. 이들은 아주 친절하고 다정다감한 언어를 구사하며 상대방의 환심을 산다. 처음에는 SNS와 이메일 등을 이용해 이름과 직업을 묻고 자신의 사진을 보낸다. 주로 호화롭고 부유하게 사는 모습의 사진들이다. 그러면서 상대방의 사진도 보내 달라고 요구한다.

그런 다음 몇 개월 동안 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애정 공세를 펼친다. 사기범들은 거의 매일 자신의 사진을 보내고 다정다감하게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교제하자고 요구하고 받아주면 "결혼하자"며 상대의 마음을 빼앗는다. 이쯤 되면 본색을 드러내 돈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한다. 물론 무조건 "돈을 달라"고 하지 않고 빌리는 수법을 쓴다. 그리고 상대방이 돈을 보낼 수밖에 없는 급한 상황을 만든다. 

돈을 보내주면 "문제가 해결되면 곧바로 갚겠다"거나 이자를 더해서 갚겠다고 말한다. "거액의 공사대금을 받았는데 수수료가 급히 필요하다"며 돈을 빌려 달라고 하는 식이다. 일단 돈을 받고 나면 다른 핑계를 대며 추가 송금을 요구한다. 더 이상 돈이 없다고 판단되면 SNS 계정을 삭제하고 잠적한다. 피해자가 경찰에 신고하면 이미 돈을 인출하고 사라진 뒤다. 이들은 실존 인물의 사진이나 신분을 도용한 가짜들이다. 남성들에게 접근한 여성들은 알고 보면 사기조직의 남자 조직원이다.

로맨스 스캠 피해자들에게 화이트 해커를 가장해 피해를 회복시켜주겠다면서 돈을 가로채는 신종 사기도 있으니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지난해 검찰에 적발된 일당들은 사기 피해자들이 인터넷에 올린 피해 사례를 보고 접근했다. 이들은 역할을 분담해 자신도 사기 피해를 당했는데 화이트 해커를 통해 피해가 회복됐다고 속이고 조직원을 소개했다. 해당 조직원은 화이트 해커를 가장하고 피해자들에게 피해 회복 명목으로 직접 송금받거나 카드 결제를 유도해 돈을 가로챘다. 피해자는 23명, 피해액은 약 10억원에 달했다. 

경찰이 로맨스 스캠 일당의 인출책(왼쪽 아래)을 검거하는 모습 ⓒ대전경찰청 제공

피해 구제를 위한 관련법 없어

경찰은 로맨스 스캠 피해가 늘어나자 지난 2월부터 경찰청 금융범죄수사계가 이를 관리하도록 했다. 2∼7월 사이 경찰에 접수된 로맨스 스캠 범죄는 총 791건, 피해액은 총 502억원에 달한다. 하지만 범죄조직 상당수가 해외에 기반을 둔 탓에 공조 수사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또 전화를 이용한 금융사기인 보이스피싱 범죄는 경찰과 금융기관에 신고하면 계좌에 지급정지 요청이 가능하지만 로맨스 스캠은 불가능하다. 피해 구제를 위한 관련법도 없기 때문에 피해를 당하면 회복할 방법이 없어 근본적인 예방책이 시급하다. 

로맨스 스캠 예방법, 돈 요구하면 사기로 판단하고 차단해야

SNS에서 모르는 외국인 이성이 접근하면 우선 조심해야 한다. 이들은 주로 댓글과 메시지 등을 통해 친구를 맺자고 요청한다. 검증되지 않은 해외교포나 외국인이 친구신청을 하면 가급적 받아주지 않는 게 좋다. 물론 모든 외국인을 색안경을 끼고 볼 필요는 없다. 외국인과의 소통을 원한다면 해당 계정이 언제 만들어졌는지와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고 있는지 등을 파악한다.

보통 사기 계정은 1년 이내에 만들어지고 친구가 얼마 되지 않으며, 소통하지 않아 댓글 등이 거의 없는 게 특징이다. 프로필에 있는 사진·학력·직업 등도 대부분 가짜거나 도용한 것이다. 상대방이 올린 게시물에 계정에 적힌 학력이나 직업과 관련된 내용이 없으면 사기 계정일 확률이 높다. 상대방의 메일 주소를 구글에서 검색하는 방법도 있다. 의심 가는 메일 주소를 검색하면 사기 정보 웹사이트에서 관련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개인정보나 금융 정보를 요구할 수도 있는데 절대 보내서는 안 된다. 링크를 보내 클릭을 유도할 경우에도 악성코드일 수 있으니 클릭하지 않는 게 좋다. 개인사진을 보내면 범죄에 악용될 수 있다.

사기범들은 신뢰관계를 구축한 후 고급 정보를 주는 척하며 투자를 유도하거나 사고를 이유로 다급하게 돈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때 위조된 문서나 현금, 영수증 등을 활용해 속이기도 한다. 이런 때는 합리적이고 차분하게 대처해야 한다. 만약 돈을 요구하면 사기범이라고 보고 차단하는 것이 좋다. 상대가 내국인일 경우도 마찬가지다. 사기범에게 속아 은행까지 갔다면 송금하기 전에 은행 직원에게 일단 상담을 받는 것도 피해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이다. 만약 로맨스 스캠 피해를 당했다고 의심되거나 판단되면 곧바로 경찰서 등 관계기관에 신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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