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궁-Ⅱ 이라크 수출 이면의 '진실게임' [취재파일]

김태훈 국방전문기자 2024. 9. 23.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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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G넥스원은 지난 20일 이라크 국방부와 천궁-Ⅱ 중거리 요격체계의 수출 계약을 체결했다고 공시했습니다. 3조 7천억 원 규모입니다. 초고가 최첨단의 국산무기 수출이고, UAE와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어 이라크에까지 천궁-Ⅱ를 공급함으로써 K-방공망을 아시아, 북아프리카로 확산시킬 중동 기점을 완성했습니다.

여러 가지로 의미가 큰 수출이어서 방산업계의 경사로 보이지만 천궁-Ⅱ의 주요 구성품을 생산하는 LIG넥스원과 한화 사이에서 사달이 벌어졌습니다. 이라크와 수출 계약은 맺었는데 정작 국내 방산업체들끼리는 가격과 납기 등 주요 조건을 합의하지 않았고, 책임은 상대 회사에 있다며 갈등을 빚는 것입니다. 업체들 주장이 판이해 진실게임 양상으로 비화하자 방사청이 내일(24일)부터 중재에 나섭니다.

국내 방산업체들 사이의 다툼은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우리 군에 공급하는 무기를 개발 또는 양산할 때 툭하면 싸움을 벌이더니, 급기야 수출을 놓고 드잡이입니다. 방산업계에 만연한 '악의의 경쟁' 풍토가 방산 생태계를 좀먹는다는 지적이 많은데 이번 천궁-Ⅱ 이라크 수출 계약 조건 갈등을 해결하면서 경쟁의 질서도 바로잡기를 기대합니다.
 

'국내 업체 간 가격·납기 미확정'은 팩트


교전통제소, 레이더, 발사대 등으로 구성된 천궁-Ⅱ


천궁-Ⅱ 중거리 요격체계는 LIG넥스원과 한화의 합작품입니다. LIG넥스원은 교전통제소와 유도탄을, 한화시스템은 레이더를,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발사대를 각각 생산합니다. LIG넥스원이 맡는 유도탄의 탄두, 추진기관 등도 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공급합니다. 군 당국이 개발 단계에서 유도탄 생산 업체를 주체계 업체로 결정함에 따라 LIG넥스원이 주체계 업체, 한화 측은 부체계 업체가 됐습니다. 대표는 주체계 업체인 LIG넥스원입니다. 천궁-Ⅱ를 우리 군에 공급하거나 해외 수출할 때 LIG넥스원과 한화에어로스페이스, 한화시스템은 가격과 납기 등을 통상 사전에 상호 합의한 다음, 발주처와 본계약을 체결합니다.

이라크와 천궁-Ⅱ 수출 계약을 했으니 납기와 가격도 확정됐습니다. 방사청 관계자는 "이라크가 상당히 이른 시점에 공급해줄 것을 강력히 요청해서 애를 먹었다", "먼저 계약한 사우디보다 이라크에 일찍 천궁-Ⅱ를 공급하는 것으로 계약됐다"고 말했습니다. 사우디 납기도 빡빡할 텐데 그보다 앞서 이라크에 공급을 시작한다는 것은 다소 위험해 보이기는 합니다.

한화 측은 "업체들끼리 납기와 가격 등을 합의하지 않은 상태에서 LIG넥스원이 이라크와 단독 협상을 벌여 근거 없는 납기와 가격으로 수출 계약을 체결했다", "이라크 납기 이행은 불가능하다"며 반발하고 있습니다. 계약서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청천벽력 같은 주장이 나온 것입니다. LIG넥스원은 "한화 측이 납기 단축과 가격에 큰 틀의 합의를 해놓고, 이후 국내 업체 간 협상을 기피했다"고 맞서고 있습니다.
 

진실게임, 잘잘못은?


천궁-Ⅱ 이라크 수출의 우여곡절은 남다릅니다. 방공망 구축이 간절한 이라크는 LIG넥스원이 당초 제안한 납기를 수용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군에 배치된 천궁-Ⅱ를 일정 기간 이라크에 빌려주는 대안이 제시됐습니다. 국방부가 검토했지만 대여 불가로 결정됐습니다. 이때가 7월 중순, 수출은 물 건너간 것 같았습니다.

돌파구를 찾는 과정에서 LIG넥스원과 한화 측의 마찰이 불꽃을 튀기기 시작했습니다. 7월 중순 LIG넥스원, 한화에어로스페이스, 한화시스템 등 3사의 고위직들이 긴급 회동해 설비 투자 확대를 통한 조기 납품 방안을 강구했습니다. LIG넥스원은 급히 이라크와 접촉해 약 1주일 뒤로 재협상 일정을 잡았습니다. 방산업계의 한 소식통은 "LIG넥스원이 재협상 일정을 공유하며 3사 고위직 긴급 회동 결과로 이라크를 설득하겠다고 통보했지만 한화 측은 답변을 안 했다"고 말했습니다. 이라크 재협상은 무산됐습니다.

LIG넥스원의 거듭된 재촉에 한화 측은 몇 가지 조건을 달고 7월 중순 3사 고위직 긴급 회동 결과를 재확인했습니다. LIG넥스원은 "납기 단축의 길이 열렸다"며 이라크 국방부에 협상 재개를 간청해 8월 중순 재협상 일정을 겨우 받아냈습니다. 한화 측에 가격 등 협상용 견적을 요청했으나 회신은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LIG넥스원은 몇 달 전에 받아둔 가견적을 들고 이라크로 날아갔습니다. LIG넥스원과 이라크의 최종 담판에서 납기, 가격 등 계약 조건의 합의점을 찾았습니다. 사실상의 타결입니다. LIG넥스원은 협상 결과 공유와 향후 과제 협의를 위한 3사 회의의 8월 말 개최를 제안했는데 한화 측은 회의 하루 전날 불참을 선언했습니다. 업계 소식통은 "죽었다 살아난 협상이라 마지막 기회의 창이 열렸고, 이때 LIG넥스원은 조급하게 행동한 반면 한화 측은 느긋했다"고 평했습니다.
 

LIG넥스원의 독단인가, 한화의 몽니인가


천궁-Ⅱ의 요격탄이 발사되고 있다

이라크 천궁-Ⅱ 수출 절차는 이전과 좀 달랐습니다. UAE 수출 때는 LIG넥스원, 한화에어로스페이스, 한화시스템이 모두 협상에 참여해 각각 UAE와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사우디 수출 때는 3사가 함께 협상에 들어갔고, LIG넥스원이 대표해서 사우디와 계약을 맺었습니다. UAE와 사우디 수출 협상의 경우 기술이전, 현지생산 등 정부 관여 조건이 있어서 방사청도 참여했습니다. 기술이전과 현지생산 조건이 없는 이라크 수출 계약은 LIG넥스원이 단독으로 협상해서 결과를 냈습니다.

"이라크 협상이 어떻게 진행돼서 계약 체결까지 갔는지 잘 몰랐다"는 한화 측 항변에, LIG넥스원은 "이라크의 특수성이 반영돼 단독으로 협상했고, 협상의 모든 과정을 국내 업체들과 공유했다"는 입장입니다. 한화 측은 "가격도 확정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LIG넥스원은 "견적을 보내도 한화 측이 답을 안 했다"고 해명합니다. 한화 측에서는 "이라크 납기를 맞추기 어렵다"는 말이 나오고 있고, LIG넥스원은 "7월 중순 3사 합의를 지키면 이라크 납기 뿐 아니라 사우디 조기 납품도 가능하다"고 맞서고 있습니다. 한발 더 나아가 한화 측은 “이라크의 급변하는 정세와 재정적 여력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신중하게 수출을 추진해야 함에도 LIG넥스원은 덜컥 이라크와 계약해 놓고 국내 업체들을 상대로 가격 후려치기를 하고 있다”며 날을 세우고 있습니다.

양측의 말이 참 다릅니다. 방사청의 한 관계자는 "본 적 없는 황당한 사례"라며 혀를 찼습니다. 방사청은 내일 3사를 불러 사실관계를 규명하는 작업에 착수합니다. 잘잘못도 엄정히 따진다는 방침입니다. 꼭 그래야 합니다. 방산비리의 늪에서 겨우 빠져나온 방산업계는 몇 년 째 업체들 간의 극단적 다툼으로 골병을 앓고 있습니다. 업체들 간 갈등은 이라크 천궁-Ⅱ 수출 진실게임에서 절정에 달하는 분위기입니다. 방사청은 시비를 밝혀 문제가 있다고 판명된 업체에 엄하게 책임을 물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방산업계가 건강해집니다.

김태훈 국방전문기자 oneway@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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