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자 부활인 ‘숯’… 그들을 매달아 그린 ‘삼차원 수묵화’[세계로 가는 K-조각의 미래]

2024. 9. 23.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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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로 가는 K-조각의 미래
(7) 나는 존재한다, 고로 본다… 박선기 조각가
점·선·면의 기본 조형요소로
형태의 재현·붕괴 착시 효과
존재·집합체·무한의 놀이…
공간 복잡성 두드러지게 발전
보는 것·보이는 것 균열 통해
실재·가상 사이 ‘새롭게 보기’
박선기 작가의 2001년 작 ‘존재(Existence)’.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열린 전시 ‘사람이 아닌’에서 선보인 작품은 숯을 사용해 7m에 달하는 높이로 유럽의 고풍스러운 기둥을 재현했다.

1994년 중앙대 조소과를 졸업하고 이탈리아 밀라노의 브레라미술학교로 유학하여 계속 조각을 공부하던 박선기는 세계적인 보편성을 가지면서도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는 생각으로 다양한 시도에 전념했다. 그러나 아무리 새로운 발상과 방법을 생각하고 추구한들 서구에서 이미 시도되었음을 발견한 그는 대안으로 조각적이면서도 조각을 넘어서는 것을 모색했다. 그즈음 그는 자연과 문화는 과연 서로 대립하는 것일까를 고민하고 있었다.

자연을 대표하는 물질의 하나이자 문화와도 관련이 높은 나무로 작업을 하던 그는 불쏘시개로 태워진 나무가 남겨놓은 숯을 주목했다. 숯은 나무의 최후이기도 하지만 생명의 부활을 상징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숯으로 이런저런 작업을 하다가 그것을 매달아 보았다.

이런 과정을 거쳐 태어난 것이 ‘존재(Existence)’였다. 2001년 베네치아의 아르세날레 테티스(Arsenale Thetis)에서 열린 ‘사람이 아닌(No Human)’이란 전시에 설치한 이 작품은 높은 천고의 실내에 나일론 실로 숯을 매달아 7m에 이르는 높이로 유럽의 고풍스러운 기둥을 재현한 것이었다. 숯 하나하나로 보면 점이지만 그것을 연결하면 선이 되고 면이 된다.

이 작품은 점·선·면이란 기장 기본적인 조형요소를 이용해 기둥이란 구체적인 대상을 재현했으나 중력의 법칙을 위반하듯 공중에 매달린 점들의 연속체란 특징을 지닌다. 이 작업은 특정한 공간을 점유하고 있으나 체적을 지닌 덩어리처럼 풍경을 차단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작품의 형태를 구성하는 숯과 숯 사이의 열린 공간과 수직으로 겹쳐진 낚싯줄이 이 가상의 건축구조물을 환영(幻影)처럼 보이도록 만든다. 더욱이 숯을 촘촘하게 매단 부위와 성기게 매단 부위에 의해 기둥의 형태가 분명하게 부각하면서 동시에 붕괴하며 사라지는 것과 같은 시각적 착시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검은 점들로 만들어진 이 낯선 풍경은 삼차원으로 표현된 수묵화를 떠올리게도 한다.

2023년 작 ‘집합-공간(An aggregation-Space)’.

수많은 점 또는 크고 작은 면들로 이루어진 이 형태는 공간에 부유하면서 동시에 공간과 공간 사이를 연결한다. 이후 주요 전시마다 기둥을 포함하여 계단, 아치 등의 건축적인 구조물을 구성하는 설치작품으로 발표되었다. 이러한 작업에 대해 그는 ‘자연과 인공의 만남’이라고 말했다. 점과 면으로 육중한 건축구조를 재현했으나 숯이기 때문에 질량을 최소화하고 빛과 그림자의 효과를 극대화한 그의 작업은 공간에 그린 건축도면이자 수묵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숯의 상징성도 중요하다. 아기가 태어났을 때 새끼줄에 숯을 매달거나 간장독에 숯을 넣는 것처럼 숯은 위생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물질이다. 실제로 숯은 부패의 방지, 공기정화와 제습, 해독, 오염의 제거 등과 함께 사악하고 부정한 것을 물리치는 용도로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물질이기도 하다. 박선기의 건축 구조물을 재현한 작업에 대해 위생적이라고 말한 이유도 과학적인 근거에서가 아니라 이러한 심령적, 상징적 의미와 연관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박선기의 작업의 주제는 크게 ‘존재(Existence)’ ‘집합체(An Aggregate)’ ‘시점놀이(Point of View)’ ‘무한의 놀이(Play of Infinity)’ ‘감각의 조각(Slice of Sensitivity)’ 등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 주제는 대체로 작품의 제목과 상통한다. 그중에서 숯을 매단 작업은 1990년대 후반에 시작하여 2000년대 초기의 ‘존재’로부터 그 후에 제작한 ‘집합’으로 연결된다. ‘집합’에서 재료가 숯으로부터 플라스틱 구슬로 바뀌며 공간의 복잡성이 두드러진 방향으로 발전했다. ‘존재’ 연작에서 기둥은 바닥에 닿지 않은 채 공중에 매달려 있으므로 불완전하며, 원형이나 사각형 역시 완전한 형태를 지니지 않고 어느 부분이 부서지고 있다. ‘집합’에서도 이러한 해체와 구축은 반복된다.

특히 2015년 우양미술관의 ‘뷰티풀(View-tiful)’ 전시에서 발표한 석가탑을 모티브로 한 설치작업은 시점에 따라 형태를 달리하지만, 어느 방향에서는 탑의 정체를 드러내도록 의도한 것이 특징이다. 어떤 위치에서 볼 때 이 덩어리들은 서로 교차, 중첩되며 지각을 교란시키거나 마치 수면 위에 비친 그림자처럼 부정확한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시각의 교란은 한 바퀴 돌아 어느 위치에 멈추는 순간 마치 여러 부속이 합체하여 하나의 형태를 만들어내듯 탑의 형상을 만드는 것을 발견하면서 안정을 회복한다. 이 설치작업 앞에서 감각기관의 하나인 눈은 전면적인 결정권자로서 대상을 지배하지 않는다. 대상 속으로 들어갈 때 비로소 대상이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지각할 수 있다. 여기서 박선기의 트릭, 즉 시각유희가 거듭됨을 확인할 수 있다.

2003년 작 ‘존재-관계(Existence-Relationship)’.

이런 점은 2019년 부산시립미술관이 기획한 ‘반복과 차이’에서 발표한 ‘조합체-시간 멈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목조 한옥의 기본 구조인 기둥, 보와 도리로 이루어진 이 구조물은 마치 공중에 부양하듯 매달려 있어서 시각적으로는 화재로 벽체가 소실된 을씨년스러운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무너지기 직전의 위태로움은 소멸의 비참함으로 발전할 수 있으나 우리는 실제 크기에 맞춰 재현된 이 구조물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다. 작품 속을 거닐다 보면 이 작품이 삶과 죽음을 은유한 것이 아니라 사라지는 것과 되살아나는 과정을 일시멈춤의 상태로 제시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여기서 그의 관심이 물질과 구조뿐만 아니라 본다는 것과 보이는 것, 실재와 환영, 존재와 시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플라스틱 비즈를 매단 설치작업에 이르면 우리의 시각이 무한공간 속으로 끝없이 빨려 들어가는 듯한 착시를 경험하도록 만든다. 구슬로 공간을 가득 채워 방향과 각도에 따라 다른 시각 체험을 할 수 있도록 연출한 박선기의 작품은 체적은 있으나 질량이 빠져나간 공간을 제시한다. 이 작품에서 우리의 신체는 가득 차 있으나 텅 빈 공간 속으로 미끄러진다. 마치 육면체 내부를 전부 거울로 만든 방 속에 있을 때 내 몸이 수없이 반복, 증식하면서 소실점을 향해 빨려 들어가는 듯한 착각에 빠지듯 그의 작품은 우리의 시선을 하얀 점들이 수렴되는 공간 너머의 무한세계로 빨려들도록 만든다. 그러면서도 매달린 물체들이 공간에 양감을 부여하기 때문에 우리의 시선은 공간 속으로 미끄러짐과 동시에 구슬들로 쳐놓은 막에 부딪히며 가상의 덩어리를 지각하는 독특한 이중 경험을 한다.

조각적이면서도 조각의 규범을 넘어서는 그의 작품은 보는 것과 믿는 것 사이로 파고들어 보는 것과 보이는 것에 균열을 내며 새롭게 보기를 제안한다.

그의 작품은 물질과 질량, 중력과 무중력, 존재와 부재, 유한과 무한, 실재와 가상 사이를 가로지르며 우리에게 보는 눈을 확장하도록 유혹한다. 이 유혹은 그의 작품이 지닌 매력이기도 하다.

최태만 미술평론가

■ 박선기 작가는

1966년 경북 선산에서 태어나 중앙대 조소과를 졸업한 후 이탈리아로 유학, 밀라노 국립미술원에서도 조각 전공으로 졸업했다. 이탈리아를 비롯해 주로 유럽에서 활동하다 2003년 서울에서 가진 개인전으로 국내에서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2005년 김종영미술관의 ‘오늘의 작가 2005’로 선정된 후 가진 개인전에서는 새로운 설치작업으로 주목받았다. 원근법에 기초하고 있으나 왜곡된 시점의 부조를 통해 보는 방법을 새롭게 제시한 작품, 숯을 매달아 공간에 건축적 구조물을 나타내는 작업 등을 발표했다.

포르투갈 리스본, 스페인 코르도바, 미국 로스앤젤레스를 비롯한 아시아의 여러 도시에서 개인전을 열었으며, 국내에서는 ‘뷰티풀(View-tiful)’(2015, 경주 우양미술관), ‘빛 속으로 걷다’(2017, 곤지암, 모아미술관), 김세중미술관(2018) 등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그의 작품은 국내외 미술관은 물론 충남도청 등 지방정부 청사, 웨스틴조선호텔, 인천국제공항, 인천 세종병원 등 전국의 주요 시설에 설치돼 있으며, 아시아와 중동, 미주, 남미 등 전 세계 주요 도시에서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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