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받고 싶었구나!’[법조프리즘]

최은영 2024. 9. 23. 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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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희 로펌 제이 대표변호사

[박주희 로펌 제이 대표변호사] 흔히들 생생한 삶의 현장을 느끼고 싶으면 새벽시장에 나가보라는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더 적나라하고 치열한 우리네 삶의 민낯을 보고 싶다면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 소액재판을 방청해보길 권한다.

소가(訴價) 3000만원 이하의 사건을 소액사건이라고 하는데 소액 재판부 법정 앞은 시장통 저기 가라 싶을 정도로 재판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언제나 북적인다. 빽빽한 사건들로 예정된 재판 시간은 밀리기 일쑤다. 법정에는 5만원 남짓한 돈을 받기 위해 소송을 하는 사람부터 변호사 도움 없이 손으로 꼭꼭 눌러 쓴 서류를 가득 들고 오는 사람, 판사 앞에서 삿대질하며 싸우다가 퇴정 명령을 받는 원·피고까지 다양한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그들의 얼굴에는 한결같이 한가득 분노와 분통이 서려 있는데 사람 사이 갈등의 최종 종착지라는 법원을 찾은 사람들이니 오죽할까 싶다.

그런데 이 중에는 소송이 불가피한 사건도 있지만 들이는 시간과 비용을 고려하면 다른 방법으로 해결하는 것이 더 나은 사건도 적잖아 변호사로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이런 사건의 당사자들이 빼먹지 않고 하는 말이 있는데 그건 바로 ‘내가 돈이 중요한 게 아니라…’다. 재빠르게 사과를 하거나 솔직하게 잘못을 인정했으면 될 일인데 상대방의 뻔뻔한 태도에 괘씸해서 끝까지 가보자는 마음으로 소송을 제기했다는 것이다.

옛 속담에 ‘말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데 ‘말로 천 냥 빚을 지는’ 사람도 있다. 매일 같이 타인과 갈등을 빚는 사람들을 보면서 때로는 변호사보다 더 합리적으로 갈등을 봉합하는 의뢰인에게 한 수 배우기도 하고 근시안적 태도로 벌어진 상황을 오히려 악화시키는 사람들을 보며 반면교사 삼을 때도 있다. 제아무리 사람은 자신에게 불리한 건 본능적으로 숨기게 마련이라지만 명명백백하게 과실이 드러났음에도 끝까지 제 잘못을 인정하지 않거나 짤막한 사과나 미안하다는 기색만 보여도 넘어갔을 일을 적반하장으로 날 선 말을 내뱉어 상대의 감정을 자극하거나 일말의 양보나 타협 없이 완강하게 자신의 요구만 내세우는 경우도 있다. 결국 이러한 태도들이 상대의 감정을 자극해 고소와 고발 등 각종 소송으로 이어지고 상황을 극단으로 치닫게 하는 것이다. 소송에서 이겼다 한들 승자 입장에서도 속이 후련할 리 없다.

그렇기에 궁극적으로 변호사는 법리에 능하기만 해서는 의뢰인이 처한 상황을 제대로 해결하기 어렵다. 사람의 감정을 잘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특히 합의나 조정을 진행할 때 변호사에게 이러한 능력은 더욱 절실히 요구된다. 일방적으로 의뢰인의 입장만 주장할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빠르게 파악해 한 수 접고 들어가야 할 때와 한 발짝 물러서야 할 때를 찾아야 한다. 상대방이 사과를 원한다면 그것을 빨리 이끌어 낼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 또한 변호사의 역할이다.

“사과받고 싶었구나.” 지난 20일 인기리에 종영한 드라마 ‘굿파트너’에서 상간녀를 변호하던 주인공이 상대방이 진정 원하는 건 위자료가 아니라 잘못을 인정하는 모습이라는 점을 깨달으며 한 대사다. 결국 주인공 변호사는 사과하도록 자신의 의뢰인을 설득하는데 지금까지 봤던 그 어떤 법정 드라마보다 현실감 있게 느껴진 장면이다.

변호사를 10년 넘게 하면서 느끼는 바는 사람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감정적인 동물’이라는 것이다. 결국 일이 벌어졌을 때 상대에게 건네는 말 한마디, 작은 표정, 태도 하나가 상황을 해결하는 열쇠가 되기도 하고 반대로 상황을 악화시키는 도화선이 되기도 한다. 인생을 살면서 타인과 아무런 갈등을 겪지 않고 살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갈등을 마주했을 때 현명하게 해결할 수는 있다. 진심 어린 공감과 사과, 그게 전부일 때도 있다.

최은영 (euno@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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