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도둑맞은 거 돌려주려고요"...EBS '시집 같은 영상'은 이렇게 나왔다

남보라 2024. 9. 23. 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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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딩동댕 유치원' 국내 처음 동시 교육
'시 잃어버린 시대'에 시 외치는 세 여성 
정명 작가, 이지현 PD, 나민애 교수 
'시 낭송' 청각 자극 위해 그림, 음악 걷어내 
"아이들에게 재미, 힘, 느린 하루 주고 싶어"
17일 방송된 EBS '딩동댕 유치원'의 ‘와우! 떠오른다, 시!’ 코너에서 한 어린이가 자신이 지은 시를 낭독하고 있다. EBS 캡처

지난 17일 오전 8시. 교육방송 EBS의 유아 프로그램 ‘딩동댕 유치원’에서는 시 한 편이 흘러나왔다.

'바닷가 사람/ 물고기 잡아먹고 살고// 산골엣 사람/ 감자 구워 먹고 살고// 별나라 사람/ 무얼 먹고 사나' (윤동주 '무얼 먹고 사나')

국내 방송에서 처음 선보이는 동시 교육 코너 '와우! 떠오른다, 시!'의 첫 방송이었다. 아이들은 윤동주 시인의 시를 낭독하고 노래로도 불러 보고 떠오르는 대로 써 보기도 하며 18분 동안 한바탕 시 놀이를 벌인다. 어른도 아이도 시를 읽지 않는 시대, 윤동주 시인이 88년 전 쓴 동시가 다시 아이들에게 닿게 된 건 왜일까.

EBS '딩동댕 유치원'에서 윤동주 시인의 '무얼 먹고 사나'를 배운 어린이가 같은 주제로 직접 써 본 시. EBS 캡처
나민애 서울대 기초교육원 교수가 17일 방송된 EBS '딩동댕 유치원'의 ‘와우! 떠오른다, 시!’ 코너에 시 선생님으로 출연했다. EBS 제공

30년 차 작가, "개구리탈 쓰겠다"는 교수

처음 동시 아이디어를 낸 건 30년 차 방송작가인 정명 작가였다. 2022년 어린이날 100주년을 맞아 아동인권 실태를 다룬 EBS 다큐 '어린人권' 제작에 참여했던 그는 "어린이가 문화를 누리게 해 달라"던 방정환 선생의 말씀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정 작가의 아이디어를 들은 이지현 PD는 "이거다!"라며 반겼다. 제작진은 나민애 서울대 기초교육원 교수에게 메일을 보내 시 선정과 자문을 제안했다. 18년째 서울대 신입생에게 글쓰기를 가르치는 나 교수는 '풀꽃'으로 잘 알려진 나태주 시인의 딸이다.

사실 제작진은 책 집필 등으로 바쁜 나 교수가 응할까 싶어 큰 기대 없이 메일을 보냈다. 하지만 바로 "하겠다"는 답장이 왔다. 나 교수는 "아이들이 시를 좋아할 수 있다면 개구리탈도 쓸 수 있고 백설공주 옷도 입을 수 있다"며 두 팔 걷고 나섰다. 또 카메라 담당자 한 명과 전국 유치원을 돌면서 시 읽기를 하고 싶다는 아이디어까지 냈다. 시는 먼 곳이 아닌, 우리 일상에 있다는 걸 어린이들에게 알려주고 싶어서였다.

시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기로 한 세 여성에겐 공통점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문학을 사랑했고, 각각 미취학·초등·고등·대학생 자녀들을 키우며 다시금 문학의 힘을 발견하고 있는 엄마들이다.

이지현(왼쪽 사진) EBS PD와 정명 작가. 본인 제공

'청각' 집중 위해 여백 넓히고 음악은 빼

시로 유아들이 좋아할 만한 영상 콘텐츠를 만드는 일은 쉽지 않았다. 시는 시각화가 어려운 데다 지루해질 우려도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PD는 "상업성에서 자유로운 방송사만이 겁 없이 도전해 볼 수 있는 영역"이라고 생각하며 영양가 있는 콘텐츠에 재미를 더하는 걸 목표로 삼았다. 특히 시 낭송으로 어린이의 청각을 자극하는 데 공을 들였다. "시 낭송 애니메이션에 여백이 많아요. 여백은 시각 자극을 줄여주고, 청각에 더 집중할 수 있게 해 주면서 상상을 자극해요. 음악도 넣지 않고 현장음 같은 효과음만 넣었어요." 한국 시 느낌을 살리기 위해 애니메이션 그림체는 장욱진 화백의 화풍을 모티브로 삼았다.

17일 방송된 EBS ‘와우! 떠오른다, 시!’의 시 낭독 화면. EBS 캡처

첫 시로 윤동주 시인의 시를 고른 건 나 교수의 선택이었다. 누구나 아는 시인이라 부모들도 부담 없이 접할 수 있고, 동시 시인이기도 했다는 점은 많이 알려지지 않아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을 듯했다. "앞으로 매주 한 편씩 소개할 고전 동시와 현대시 23편을 선정했어요. 자연이나 가족을 주제로 한 쉬운 시들이고 '세상은 아름답고 살아 볼 만한 곳'이라는 메시지가 꽉꽉 눌러져 있는 시들이에요."

나 교수는 방송 맨 마지막에 '시 샘(선생님)'으로 출연해 1분간 부모들에게 간결한 도움말을 전한다. '무얼 먹고 사나' 편에서는 "(아이가) 많은 공간을 상상하도록 도와주세요.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짐작하게 해 주세요"라고 조언했다.

EBS ‘와우! 떠오른다, 시!’에 매주 시 선생님으로 출연하는 나민애 교수. EBS 제공

"재미와 힘, 느린 하루 선물하고 싶어"

이들은 동시로 아이들에게 무얼 전하고 싶을까. 나 교수는 이 방송을 보는 다섯 살 아이들의 열다섯 살을 생각한다. "중학교 때 시가 시험 범위가 되는 순간부터 아이들이 시를 싫어하게 돼요. 시를 토막 내서 의미를 외우죠. 편견 없이 시를 즐긴 유아들이 10년 뒤 교과서에서 시를 만났을 때 지긋지긋한 마음보다 좋아하는 마음이 먼저 들면 좋겠어요."

정 작가는 시가 지금은 '재미' 나중에는 '힘'이 되길 바란다. "방송을 즐겁게 보면서 '동시는 재밌는 거구나' 생각하면 좋겠어요. 오며가며 방송에서 들은 시 한 편 한 편이 켜켜이 쌓여 성장 과정에서, 어른이 된 후에도 힘과 위로가 되면 더 바랄 게 없고요."

이 PD는 시로 일주일에 한 번 '느린 하루'를 선물하고 싶다. "이 코너를 기획할 즈음 '도둑맞은 집중력'이란 책을 읽으며 동시 코너가 이 시대 아이들이 도둑맞은 것을 돌려주는 데 도움이 되리라 확신했어요. 천천히 시를 듣고 길고 깊게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 '아이들의 사유 능력을 회복시켜주는 시집 같은 영상'이 되면 좋겠어요."

EBS ‘와우! 떠오른다, 시!’에서 한 어린이가 시의 정원에 서 있다. EBS 제공

남보라 기자 rarar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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