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도둑맞은 거 돌려주려고요"...EBS '시집 같은 영상'은 이렇게 나왔다
'시 잃어버린 시대'에 시 외치는 세 여성
정명 작가, 이지현 PD, 나민애 교수
'시 낭송' 청각 자극 위해 그림, 음악 걷어내
"아이들에게 재미, 힘, 느린 하루 주고 싶어"
지난 17일 오전 8시. 교육방송 EBS의 유아 프로그램 ‘딩동댕 유치원’에서는 시 한 편이 흘러나왔다.
'바닷가 사람/ 물고기 잡아먹고 살고// 산골엣 사람/ 감자 구워 먹고 살고// 별나라 사람/ 무얼 먹고 사나' (윤동주 '무얼 먹고 사나')
국내 방송에서 처음 선보이는 동시 교육 코너 '와우! 떠오른다, 시!'의 첫 방송이었다. 아이들은 윤동주 시인의 시를 낭독하고 노래로도 불러 보고 떠오르는 대로 써 보기도 하며 18분 동안 한바탕 시 놀이를 벌인다. 어른도 아이도 시를 읽지 않는 시대, 윤동주 시인이 88년 전 쓴 동시가 다시 아이들에게 닿게 된 건 왜일까.
30년 차 작가, "개구리탈 쓰겠다"는 교수
처음 동시 아이디어를 낸 건 30년 차 방송작가인 정명 작가였다. 2022년 어린이날 100주년을 맞아 아동인권 실태를 다룬 EBS 다큐 '어린人권' 제작에 참여했던 그는 "어린이가 문화를 누리게 해 달라"던 방정환 선생의 말씀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정 작가의 아이디어를 들은 이지현 PD는 "이거다!"라며 반겼다. 제작진은 나민애 서울대 기초교육원 교수에게 메일을 보내 시 선정과 자문을 제안했다. 18년째 서울대 신입생에게 글쓰기를 가르치는 나 교수는 '풀꽃'으로 잘 알려진 나태주 시인의 딸이다.
사실 제작진은 책 집필 등으로 바쁜 나 교수가 응할까 싶어 큰 기대 없이 메일을 보냈다. 하지만 바로 "하겠다"는 답장이 왔다. 나 교수는 "아이들이 시를 좋아할 수 있다면 개구리탈도 쓸 수 있고 백설공주 옷도 입을 수 있다"며 두 팔 걷고 나섰다. 또 카메라 담당자 한 명과 전국 유치원을 돌면서 시 읽기를 하고 싶다는 아이디어까지 냈다. 시는 먼 곳이 아닌, 우리 일상에 있다는 걸 어린이들에게 알려주고 싶어서였다.
시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기로 한 세 여성에겐 공통점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문학을 사랑했고, 각각 미취학·초등·고등·대학생 자녀들을 키우며 다시금 문학의 힘을 발견하고 있는 엄마들이다.
'청각' 집중 위해 여백 넓히고 음악은 빼
시로 유아들이 좋아할 만한 영상 콘텐츠를 만드는 일은 쉽지 않았다. 시는 시각화가 어려운 데다 지루해질 우려도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PD는 "상업성에서 자유로운 방송사만이 겁 없이 도전해 볼 수 있는 영역"이라고 생각하며 영양가 있는 콘텐츠에 재미를 더하는 걸 목표로 삼았다. 특히 시 낭송으로 어린이의 청각을 자극하는 데 공을 들였다. "시 낭송 애니메이션에 여백이 많아요. 여백은 시각 자극을 줄여주고, 청각에 더 집중할 수 있게 해 주면서 상상을 자극해요. 음악도 넣지 않고 현장음 같은 효과음만 넣었어요." 한국 시 느낌을 살리기 위해 애니메이션 그림체는 장욱진 화백의 화풍을 모티브로 삼았다.
첫 시로 윤동주 시인의 시를 고른 건 나 교수의 선택이었다. 누구나 아는 시인이라 부모들도 부담 없이 접할 수 있고, 동시 시인이기도 했다는 점은 많이 알려지지 않아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을 듯했다. "앞으로 매주 한 편씩 소개할 고전 동시와 현대시 23편을 선정했어요. 자연이나 가족을 주제로 한 쉬운 시들이고 '세상은 아름답고 살아 볼 만한 곳'이라는 메시지가 꽉꽉 눌러져 있는 시들이에요."
나 교수는 방송 맨 마지막에 '시 샘(선생님)'으로 출연해 1분간 부모들에게 간결한 도움말을 전한다. '무얼 먹고 사나' 편에서는 "(아이가) 많은 공간을 상상하도록 도와주세요.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짐작하게 해 주세요"라고 조언했다.
"재미와 힘, 느린 하루 선물하고 싶어"
이들은 동시로 아이들에게 무얼 전하고 싶을까. 나 교수는 이 방송을 보는 다섯 살 아이들의 열다섯 살을 생각한다. "중학교 때 시가 시험 범위가 되는 순간부터 아이들이 시를 싫어하게 돼요. 시를 토막 내서 의미를 외우죠. 편견 없이 시를 즐긴 유아들이 10년 뒤 교과서에서 시를 만났을 때 지긋지긋한 마음보다 좋아하는 마음이 먼저 들면 좋겠어요."
정 작가는 시가 지금은 '재미' 나중에는 '힘'이 되길 바란다. "방송을 즐겁게 보면서 '동시는 재밌는 거구나' 생각하면 좋겠어요. 오며가며 방송에서 들은 시 한 편 한 편이 켜켜이 쌓여 성장 과정에서, 어른이 된 후에도 힘과 위로가 되면 더 바랄 게 없고요."
이 PD는 시로 일주일에 한 번 '느린 하루'를 선물하고 싶다. "이 코너를 기획할 즈음 '도둑맞은 집중력'이란 책을 읽으며 동시 코너가 이 시대 아이들이 도둑맞은 것을 돌려주는 데 도움이 되리라 확신했어요. 천천히 시를 듣고 길고 깊게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 '아이들의 사유 능력을 회복시켜주는 시집 같은 영상'이 되면 좋겠어요."
남보라 기자 rarar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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