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태기의 사이언스토리] 공기 분자 사이 거리를 상상할 수 있나… 반도체 3나노는 그런 거리다
최근 반도체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10억분의 1미터를 말하는 ‘나노미터(nanometer)’ 같은 미세 단위가 자주 언급된다. 반도체가 인공지능(AI) 수준으로 발달한 것은 전자 회로가 나노미터 크기로 작아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회로를 얼마나 가늘게 구현하는지가 기술을 가늠하는 척도가 됐고, 이를 가능하게 한 반도체 공정의 에칭(etching)이나 포토리소그래피(photolithography)도 이제는 일상으로 접하는 용어가 되었다. 그런데 나노라는 숫자가 얼마나 작은지 사실 잘 와닿지 않는다. 이 숫자가 얼마나 비현실적인지는 인류의 지식 욕구가 오래전부터 시도한 도전이었다는 사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1450년경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에 성공한 이후 1500년까지 초기 인쇄물을 ‘인큐나블(incunable)’이라고 부른다. 라틴어로 요람이라는 뜻인 ‘인쿠나불라(incunabula)’에서 유래했는데, 신생아를 보호하는 인큐베이터와 같은 어원을 가진 이 단어는 기술 초기 단계라는 뜻이다. 이 짧은 기간에 인쇄된 저작은 현존하는 것만 3만종에 이른다. 하나의 판본에 여러 권이 출판되므로, 책의 숫자는 훨씬 많아서 독일에만 12만5000권이 있고, 전 세계적으로는 55만권이 있다고 추정된다. 기원전 유클리드 기하학이 1482년에야 첫 인쇄본으로 출판되었을 정도로 인류의 지적 자산들은 중세를 거치며 양피지 필사본에 갇혔다. 이렇게 소수만 누리던 지식은 인쇄 혁명으로 순식간에 퍼진다. 같은 1482년을 배경으로 하는 빅토르 위고의 ‘파리의 노트르담’이 “책이 건물을 죽이리라”라며 중세의 종말을 선언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이 시기 독일 천재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1471~1528)는 유독 판화 그림을 많이 남겼다. 뒤러는 독일에서 시작된 인쇄 혁명의 의미를 누구보다 빨리 알아챘다. 시장의 반응은 뜨거웠다. 초기 금속활자는 목판인쇄와 경쟁했지만, 인쇄물이 봇물 터지듯 터지며 금속활자가 승기를 잡는다. 뒤러 역시 목판화와 동판화를 동시에 시도하다 훨씬 정교한 동판화에 집중했다. 이 기술이 출판물에 삽화로 사용되며 엄청난 수요를 만든 것이다. 이는 에칭이라는 기법으로 가능했는데, 날카로운 펜으로 동판을 긁어 부식시킨 다음, 그 부식 부위에 잉크가 스며들어 인쇄하는 기법이다. 중세를 무너뜨린 르네상스는 인쇄 과학이 만든 지식 혁명이었다.
인쇄술이 발달하자 더 정교한 판화 기술이 요구되었다. ‘리소그래피(lithography)’는 이렇게 등장했다. 기존의 판화는 양각이나 음각을 이용하지만, 리소그래피는 이런 요철 없이 물과 기름이 섞이지 않는 원리를 이용한 평판화 기술이다. 일종의 선택적 인쇄 방식인데, 훨씬 섬세한 표현을 할 수 있었다. 20세기 중반 트랜지스터의 탄생으로 반도체 혁명이 시작되자 과학자들은 세밀한 회로를 작은 칩에 집적할 수 있는 기술을 리소그래피에서 찾았다. 1955년 미국 벨 연구소는 빛에 노출된 부위와 그림자 부위를 선택적으로 반응시켜 마치 사진과 같이 정교한 회로를 그릴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반도체 집적 회로의 핵심 기술인 포토리소그래피 공정은 이처럼 선택적 인쇄 기술을 이용한 것이다.
요컨대 반도체 핵심 공정인 에칭과 포토리소그래피는 새로운 지식에 목말라하던 인류의 욕망이 만들어 낸 것이다. 끊임없는 정보 욕구는 다시 IT 분야로 이어졌고, 여기서 미세한 그림의 기술적 한계를 극복하는 도전이 계속된다. 초기 반도체 공정은 회로의 선폭이 머리카락 굵기에 해당하는 100마이크로미터에서 1마이크로미터 단위로 줄어드는 것이 목표였다. 포토리소그래피가 빛을 이용하므로 미세한 패턴을 만들려면 빛의 파장도 짧을수록 유리하다. 우리가 일상에서 보는 빛을 가시광선이라고 한다. 가시광선의 파장은 수백 나노미터이므로, 통상적인 빛으로 마이크로미터 크기의 선폭을 구현하는 것은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더 고성능 반도체를 원했고, 더 미세한 회로가 요구되었다. 나노미터 단위로 작아지자 훨씬 더 짧은 파장이 필요했다. 최신 포토리소그래피는 극자외선(EUV)을 사용하는데, 이 빛의 파장은 13.5나노미터에 불과하다. 현재 이 기술로 업계는 3나노급 회로 경쟁에 돌입했다. 3나노미터는 공기 분자 간 거리에 해당하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작은 크기다. 더 놀라운 것은 우리 주위의 하드디스크에도 이 크기가 적용된다는 사실이다. 하드디스크는 원반 모양의 디스크가 회전하면 그 위로 자기장을 형성하는 헤드가 공기 위로 떠서 작동한다. 이 미세한 틈을 ‘비행 고도(flying height)’라고 부른다. 최신 하드디스크는 이 높이가 겨우 3.8나노미터다. 공기 분자 사이로 헤드가 날고 있는 셈이다.
올해 가장 뜨거운 경제 뉴스는 인공지능과 IT 혁명을 이끄는 기업들의 주가였다. 세계 최상위권 회사 하나의 시가총액은 우리나라 모든 기업의 주가를 합친 것보다 크다. 이처럼 우리는 기업의 가치를 화폐로 평가하며 놀라곤 하지만 기업의 기술 수준을 나타내는 숫자가 어떤 의미인지는 깨닫지 못할 때가 많다. 분자 사이의 거리란 인간이 체감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숫자들이 너무나 비현실적이라는 사실에서 우리 기업들이 맞이한 도전이 얼마나 쉽지 않은지 알 수 있다. 한 치도 물러설 수 없는 이 경쟁은 최근의 일이 아니라 꽤 오래전에 시작된 인쇄술과 지식 혁명에서 시작됐다. 그 결과로 문명이 바뀌었고, 이제 이 어려운 경쟁에 우리 경제의 상당 부분이 달려 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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