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헌 살롱] [1462] 남재희 추도사
동양의 고전들을 공부하면서 도달한 지점은 ‘진리는 이중률(二重律)을 가지고 있다’는 결론이다. 주역의 핵심도 ‘음중양 양중음(陰中陽 陽中陰)’이다. 깨끗함 속에 더러움이 있고 더러움 속에 깨끗함이 있다. ‘겉바속촉’이 그것이다. 겉은 바삭바삭하면서도 속은 촉촉한 빵이다.
불교도 그렇다. 내 공부방인 축령산의 청운서당(靑雲書堂) 서실에 걸어놓은 편액의 내용도 진공묘유(眞空妙有)다. 완벽한 진공상태에서도 뭔가 묘한 작용이 발생한다는 이야기이다. 깡통 차도 뭔가 먹을 것이 생긴다는 이치로 해석한다.
동양학의 이런 이중률을 ‘강호’라고 하는 현실 세계에서 직접 몸으로 보여준 인물이 지난 15일 별세한 남재희다. 남재희의 일생은 이중률의 연속이었다. 진보인가 싶으면 보수였고, 보수인가 싶으면 진보였다. 이걸 안 좋게 보면 일관성이 결여된 왔다 갔다 갈지(之)자 인생이라고 폄하할 수도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동양학의 이치를 강호에서 실천한 ‘강호동양학’ 전문가의 삶이었다. ‘경계 아우른 시대의 조정자’ ‘진보 보수 넘나든 자유인’이라는 신문 부고 기사의 내용이 이것이다.
이중률을 ‘변절’로 평가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인 한국 현대사에서 그래도 남재희가 떨어져 죽지 않고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할 수 있었던 비장의 카드는 글쓰기 능력이었다고 본다. 타고난 문필가였다. 이 정도 되려면 아마도 선대 묫자리 중에 문필봉(文筆峰)이 보이는 명당 자리에 묘를 썼을 것이다. 그는 80대 후반까지도 일간지에 글을 썼다. 80대가 되면 활자를 읽기가 어렵다. 눈도 안 보이고 지적 호기심이 쇠퇴하기 때문이다. 타고나지 않으면 80대 후반에 글 못 쓴다. ‘서권기 문자향’이 배어 있으면서도 지나온 자기 삶에 대한 관조(觀照)가 묻어 있는 글이었다고 기억된다.
그런가 하면 그는 육감적인 글도 썼다. 생생한 취재 현장의 체취가 묻어 나는 글이다. 전옥숙(1929~2015) 여사에 대한 글이다. 홍상수 영화감독의 모친이기도 하다. “당대 최고의 일본통이자 지성인이었다. 어느 술자리에서 ‘김영삼씨를 부를까?’ 하더니 전화 한 통으로 야당의 YS를 불러냈던 거물이었고, 김지하를 비롯하여 재야의 대부 장일순, 쌍용의 김석원 등 문화계, 재계, 정계의 인사들이 전옥숙의 송년파티에 참석하곤 하였다.” 나는 남재희의 이 글을 읽고 한국 문화계에 여왕벌이 있었음을 알았다. 필야 녹재기중(筆也 祿在其中)이라! 붓 한 자루 쥐고 세상을 종횡으로 살다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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