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想과 세상]히말라야 해국(海菊)

기자 2024. 9. 22.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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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꽃이 질 즈음 해국이 핀다
비탈진 해안가에 가장 늦게까지 피어 있는 꽃
어느 산간에는 벌써 눈이 왔다는데
위태로운 꽃 위로 그칠 줄 모르고 비가 내린다

자기 몸의 몇 배나 되는 짐을 짊어진 채
샌들을 신고 히말라야 기슭을 오르는
어린 소년의 반짝이는 눈망울이 깜박일 때

동상 걸린 발가락 넷을 잘라낸 아버지는
눈 덮인 마당을 절룩절룩 걸어 다니며
아내가 숨긴 술병을 찾고 있지

몹쓸 산기슭이나 대물림한 병든
아비가 술잔에 눈물을 부딪칠 때
가파른 계곡을 겨우 올라가는 어린 눈망울과
몇 번이나 기워 신은 해진 샌들 사이

갈라진 뒤꿈치가 딛고 가는 발자국처럼
그늘진 비탈에서 비탈로 해국이 번지는 동안
벗어날 수도 없는 생을 껴안은 세상 속으로
속수무책 비가 내리네 눈이 내리네

김명기 (1969~)

가을인데 여름이 쉽게 가지 않았다. 한차례 비가 내리자 기다리던 가을이 되었다. “어느 산간에는 벌써 눈이 왔다는데”, 아직 필 꽃이 남아 있다. 히말라야 해국은 “모든 꽃이 질 즈음” 핀다. “비탈진 해안가에 가장 늦게까지” 핀다. 절망의 비탈을 부여잡고 피는 꽃. 어린 소년이 자기 몸보다 몇 배나 되는 짐을 지고 히말라야 기슭을 오른다. 산비탈은 소년의 목숨을 간신히 이어주는 생활 현장이다.

어린 소년에게 짐은 집이다. “동상 걸린 발가락 넷을 잘라낸 아버지” 대신 가계의 무게를 짊어지고 짐꾼이 된 소년은 비탈을 오른다. 지금쯤 친구들은 교실에서 칠판에 적힌 단어들을 받아쓰고 있겠지. 소년은 한숨으로 그림일기를 그리고 있다. 짐과 집이 번갈아 소년의 등에 매달린다. 한쪽으로 기운 무거운 하늘을 들며 “비탈에서 비탈로” 번지는 해국처럼 벗어날 수 없는 길을 위태롭게 소년이 가고 있다.

이설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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