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의 고전 속 이 문장] <406> 조선 후기에 판서를 지낸 박태상이 심양을 지나며 읊은 시

조해훈 시인·고전인문학자 2024. 9. 22.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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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나는 태어나면서 난리 치르는 값 했고(嗟我生來値亂離·차아생래치난리)/ 놀랄 만한 여러 일들을 일찍부터 들어서 알고 있네.

위 시는 조선 후기 숙종 대에 호조판서·이조판서 등을 역임한 만휴당(晩休堂) 박태상(朴泰尙·1636~1696)의 '심양을 지나며'(過瀋陽·과심양)로, 그의 문집인 '만휴당집(晩休堂)'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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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이곳에 내가 올 줄을 기약이나 했겠는가

- 那期此地身因到·나기차지신인도

아! 나는 태어나면서 난리 치르는 값 했고(嗟我生來値亂離·차아생래치난리)/ 놀랄 만한 여러 일들을 일찍부터 들어서 알고 있네.(驚心萬事早聞知·경심만사조문지)/ 어찌 이곳에 내가 올 줄을 기약이나 했겠는가(那期此地身因到·나기차지신인도)/ 당시의 일을 말하려니 눈물이 절로 흐르는구나.(欲說當年淚自垂·욕설당년루자수)/ …

위 시는 조선 후기 숙종 대에 호조판서·이조판서 등을 역임한 만휴당(晩休堂) 박태상(朴泰尙·1636~1696)의 ‘심양을 지나며’(過瀋陽·과심양)로, 그의 문집인 ‘만휴당집(晩休堂)’에 있다. 박태상은 병자호란이 일어난 1636년 태어났다. 병자호란이 마무리되며 소현세자·봉림대군 두 왕자 부부가 인질로 가 심양에서 생활했고, 수많은 사람이 붙잡혀갔다. 심양 노예시장에서 60만 명 이상의 조선인이 거래됐다고 한다.

박태상은 1689년 겨울 조위사(弔慰使)로 청나라 연경에 가 이듬해 봄 귀국했다. 위 시는 그가 연경에 가면서 심양을 방문해 읊은 작품이다. 어찌 마음이 무겁고 슬프지 않겠는가. 박태상은 1671년 정시(庭試)에 장원으로 급제한 인재로 연경을 다녀온 뒤 형조판서 등을 지냈으며, 1696년 이조판서로 있다가 지병으로 사직한 후 세상을 버렸다.

그는 정치적으로 서인에 속했으나 당파에 치우치지 않고 여러 벼슬을 하며 공평무사한 선정을 베푼 것으로 평가받았다. 박태상은 전남 나주시 반남면을 본관으로 하는 반남 박씨(潘南朴氏)다. 영의정에 추증된 증조부 박동선의 시호는 정헌(貞憲), 이조판서에 추증된 할아버지 박정의 시호는 충숙(忠肅), 박태상의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반남 박씨는 최고 명문가들인 국반(國班) 대열에 오른 성씨이다. 조선왕조를 통틀어 정승 7명, 대제학 2명, 왕비 2명(선조 비 의인왕후, 인종 비 인성왕후), 후궁 1명(순조의 어머니 수빈 박씨), 문과 급제자 215명을 배출했다.

반남 박씨 서호공파(西湖公派) 만효공문중이 지난 3월에 발간한 ‘만휴당집’을 최근에 받았다. 그제는 이 문집 출간위원장을 맡은 박태상의 11세 손(孫)인 대전의 박용우(93) 선생과 통화하고, 그분의 동생 박현숙 전 마산MBC 아나운서를 만나 만휴당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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