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필은 문학으로, 윤두명은 종교로 ‘나폴레옹’을 꿈꾸다

조광수 나림연구회 회장·전 한국아나키즘학회 회장 2024. 9. 22.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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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주 문학과 인문 클래식 <14> 이병주의 행복론: ‘행복어 사전’3

- 비슷한듯 다른 작품속 두 주인공
- 정상으로 가는 ‘제 3의 길’ 모색
- 섭리와 합정 중시했던 나림의 삶
- 서재필과 윤두명 이야기에 녹여
- 외롭고 힘든 소설쓰기 작업 투영
- 나림의 작품 보는 안목도 천재적

사막에 불시착한 나폴레옹은 어느 시대 어느 공간이든 있다. 세상은 골목마다 와호장룡이다. “나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 세상에 태어났다”며 좌충우돌하는 ‘예외자’는 의외로 많기도 하고 실상 아주 귀하기도 하다. ‘예외자’의 삶은 참 버겁다.

나림 이병주의 ‘행복어 사전’에는 사막을 내부에 갖고 있는 사한(砂漢) 둘이 등장한다. 두 사람은 얼핏 비슷한 느낌이 있지만 많이 다르다. 서재필이 아이디얼리스트라면, 윤두명은 리얼리스트다. 서재필이 로맨스 형으로 로맨틱 드라마라면. 윤두명은 스릴러 형으로 다큐멘터리다. 다만 윤두명은 서재필보다 가슴에 더 큰 모래사막이 있는 사람이다. 통분과 원한이 깊기 때문이다. 사실 비범하고 신통력이 있는 사람은 어떤 뜻으로든 정상을 노린다. 정상을 노리지만 현실적으로 힘이 없다.

기존체제에선 길이 잘 보이지 않지만 그렇다고 혁명을 시도할 만큼 무모하지는 않다. 결국 제3의 길을 모색해 나름의 방법으로 나폴레옹이 되려 한다. 그 길이 서재필은 문학이고, 윤두명은 종교다.

▮섭리와 합정(合情)

서울 북한산 자락에 자리한 한 카페에 나림 이병주 작가를 기리고 그리워하는 작은 공간이 마련돼 있다. 안경환 ‘이병주 평전’ 저자 제공


나림은 섭리를 중시했다. ‘노자’의 문구 “천망회회 소이불실(天網恢恢 疎而不失)”과 ‘성경’ 호세아의 “바람을 심어 폭풍을 거둔다”는 구절을 자주 인용한다. 섭리의 맷돌은 서서히 갈지만 오지게 간다. 성긴 듯, 있는 듯 없는 듯하지만 끝내 놓치지 않는다. 명운의 인과는 허술함이 없다. 갑의 이유로 죄를 지었지만 벌은 을 탓으로 받기도 한다. 선인선과(善因善果)고, 악인악과(惡因惡果)다. 섭리는 인과관계다. 나림의 초기 3부작 중 두 번째 작품이 ‘매화나무의 인과’, 일명 ‘천망’이다.

나림은 섭리를 인연이라고도 했다. 세상은 강호다. 강호는 사람 사이의 은원(恩怨)으로 굴러간다. 은혜는 보답해야 하고 원수는 갚아야 한다. 갚음을 모르면 사람이 아니다. 세상사 사람 놀음이다. 누구를 만나느냐로 운명도 바뀐다.

인간(人間)이란 슬픔과 기쁨 사이를 동요하며 사는 존재라는 뜻도 되지만, 기본적으로 사이를 가진 사람이란 뜻이다. 사람 사이가 바로 관계다. 그 관계의 무게를 인식하고 그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만이 인간이다. 그렇지 못하면 인간 실격이다. 인간관계를 규정하는 규범은 합법(合法) 합리(合理) 합정(合情) 세 가지다. 나림은 도덕 무도덕 비도덕 부도덕을 넘어 모든 차원을 망라한 만물상 같은 생을 살았다. 유정(有情)한 나림에겐 역시 합정이 최고였다.

▮소설 그리고 대서양의 욕조

이병주 문학관에 전시된 이병주 어록.


‘행복어 사전’의 또 다른 주인공 윤두명은 섭리를 굳게 믿는 도사다. 상제교(上帝敎)를 세워 섭리를 대행하려는 윤두명은 원념이 깊은 사람이다. 사람은 원한을 풀지 않곤 살 수 없다. 원은 원수 갚음으로 풀 수 있지만 한은 그렇게 안 풀린다. 섭리라도 믿어야 하는 이유다. 인식과 믿음의 차이를 언급하며 상제 신앙을 묻는 서재필에게 윤두명은 “섭리가 행해지려면 섭리를 행하게 하는 무슨 본체가 있지 않겠는가”며, 그 본체는 천주일 수도 여호와일 수도 알라일 수도 있으며 자신에겐 상제라고 답한다.

사람에겐 단 하나라도 믿는 게 있어야 한다. 윤 교주는 비범함과 신비함으로 상처와 원한이 깊은 인재들을 위무하고 품는다. 교세는 확장되어 전국 규모 협동조합이 만들어지고 고아들을 귀족 자제처럼 교육하는 복지 시스템도 갖춰진다. 다만 분함의 에너지는 폭발력은 좋으나 유해가스가 나온다. 교주의 카리스마만으로는 해소되지 않는 내부 마찰과 공권력의 일 없는 간섭 통제로 다소 불편을 겪지만 섭리의 신을 믿는 윤두명은 씩씩하다.

한편 서재필은 역사가 생명을 얻자면 섭리의 힘을 빌릴 게 아니라 문학의 힘을 빌려야 한다고 여겨 소설을 쓰기로 한다. 소설 찾기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바깥에서 찾는 것으로 그 방향엔 서울역 절두산 흑산도 지리산이 있다. 다른 하나는 내 마음의 미로를 찾아가는 안으로의 방향으로 거기엔 마르셀 프루스트. 제임스 조이스, 카프카 같은 네온사인이 있다. 서재필이 소설로 승부를 보려 한 이유는 남의 인생까지도 살아보고 싶어 하는 불령한 욕망 불가능한 욕망을 대행하는 건 소설 이외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설 쓰기란 “욕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는 일”만큼 막막하고 외로운 작업이다. 그저 가설항담(街說巷談)이 아닌 개연성과 설득력을 갖춘 이야기를 꾸미려니 허구한 날 서울역만 서성일 뿐, 카뮈가 되기도 전에 교통사고로 죽을 지경이다. 문인 자질은 불운과 퇴폐에 있다며 갈팡질팡해 보지만 결정적으로 속악성이 받쳐주지 않는다. 소설은 이야기이니 무거운 사건을 가벼운 어조로 풀어야 한다는 이론은 알지만 그 무거움이 도저히 내려가지 않는다.

인류가 혼자 하는 수공업 중 마지막 남은 한 가지가 문학으로, 펜 한 자루와 상상력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에, 서재필은 소설을 적성에 꼭 맞는 필생의 업으로 삼았으나 여의치 않다.

▮전전긍긍 서재필

소설론과 소설은 다르다. 역사는 결과와 치적에 중점을 두고 문학은 동기와 과정에 중점을 두며, 역사는 승리자에게 중점을, 문학은 좌절한 패자에 중점을 둔다는 사실을 이론으로는 안다. 그래서 역사가는 나폴레옹을 기록하지만 문학가는 장발장을 등장시킴을 익히 알면서도 서재필의 원고지는 메워지지 않는다. 소설가로서 호기심과 비장함만 충전할 뿐 도스토옙스키의 체험과 천재는 없는 것이다. 전전긍긍 서재필은 번역으로 워밍업한다.

나림은 루드비히 마르쿠제의 ‘행복의 철학’을 소개한다. 당시엔 마르쿠제 하면 ‘일차원적 인간’을 쓴 허버트 마르쿠제만 알던 시절이다. 루드비히 마르쿠제는 경쾌한 필치로 욥과 솔로몬부터 에피쿠로스와 톨스토이까지 다채롭게 행복 담론을 풀어간다. 마르쿠제는 어느 당파에도 속한 적 없는 전투적인 자유사상가로, 독립독행의 니체 전문가였다. 나림은 마르쿠제의 또 다른 명저 ‘나의 20세기’를 상찬한다. ‘나의 20세기’는 “위대한 인간은 자전을 쓰지 않고, 세계사와 일체가 되는 세계사를 쓴다”고 한 나림의 신념을 충족시키는 자서전의 한 전범(典範)이다.

인간이란 자신에 관해선 반드시 거짓말을 하게 마련이므로 정말 솔직한 자서전은 없다. 다소의 허세와 자기연민에 지식의 꾸밈도 있고 기억의 덧칠도 있어 모든 자서전은 면피성 고백일 따름이다. 그나마 개인사와 시대사를 결합해 시대 이야기를 담으려 애쓴 자서전 정도가 의미 있다. 이를테면 처칠이 쓴 ‘제2차 세계대전사’ 같은 작품이다. 이 회고록으로 처칠은 1953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그해 ‘노인과 바다’로 퓰리처상을 받으며 노벨문학상을 예약해 두었던 헤밍웨이는 그다음 해에 수상했다.

서재필은 우선 생계를 위해, 그리고 행복을 추구하려는 노력의 허망함을 증명하려 ‘행복의 철학’을 매일 정한 분량대로 번역한다. 예정한 기간보다 일찍 작업을 마치고 1년 치 생활비에 해당하는 넉넉한 번역료를 받는다. 다만 출판사가 파산하는 바람에 출간은 물 건너간다. ‘행복의 철학’은 ‘행복어 사전’을 통해 아주 일부만 소개됐고, 한참 후에야 번역서가 나왔다.

▮남재희의 회고

나림의 작가와 책을 알아보는 탁발한 능력은 문사 남재희의 ‘문주(文酒) 40년’에 선명하다. 남재희가 하버드대학에서 1년 연수를 마치고 책 200권을 들고 귀국했다. 나림에게 보이며 1권을 선물하겠다고 했더니, 가장 얇고 값싼 책을 골랐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였고, 반년 뒤 노벨 문학상을 받는 것을 보고 역시 대단하다고 느꼈다. 일본 출장 때 일이다. 나림이 서점에서 자신은 들어보지도 못한 미셸 푸코의 책을 여러 권 사서 누군가 했더니 10년 지나 다들 그 작가 이야기를 하더란다.

나는 미셸 푸코의 ‘성의 역사’를 1990년에야 읽었다. 지식이란 도서관에 소장된 수천만 권 책과 문자가 아니다. 사람의 뇌에 저장되어 생체 에너지를 통해 처리할 수 있는 만큼의 정보다. 그 제한된 정보를 적재적소에 멋지게 활용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천재다. ‘행복어 사전’에 서 나림의 천재성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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