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재야' 장기표 별세···"팬덤정치 횡행에 나라 망할까 우려"

김정욱 기자 2024. 9. 22.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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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 원장. 뉴스1
[서울경제]

‘영원한 재야’로 불리는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 원장이 22일 별세했다. 향년 78세.

장 원장은 이날 오전 1시 35분께 입원 중이던 일산 국립암센터에서 세상을 떠났다. 고인은 7월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담낭암 말기로 투병 중”이라고 밝혔다.

1945년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난 고인은 마산공고를 졸업하고 1966년 서울대 법학과에 입학했으나 전태일 열사의 분신 사건을 계기로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에 투신하면서 1995년에야 졸업했다.

서울대생 내란 음모 사건을 시작으로 민청학련 사건, 청계피복노조 사건, 민중당 사건 등으로 9년간 수감 생활을 하고 12년간 수배 생활을 하는 등 1970~1980년대 수차례 투옥과 석방을 거듭했다. 숱한 수감과 도망 생활에도 민주화운동에 따른 보상금을 일절 수령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2019년 한 언론 인터뷰에서 “나는 국민 된 도리, 지식인의 도리로 안 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1970년 전태일 사후에는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인 이소선 여사와 만나 시신을 인수하고 서울대 학생장으로 장례를 치르는 데 앞장섰다. 이후 전태일에 대한 자료를 수집해 조영래 변호사에게 전달해 ‘전태일 평전’을 만드는 데 기여했고 2009년에는 전태일기념사업회 이사장을 지냈다. 고인은 이 여사와는 한동안 도봉구 쌍문동 같은 동네에 살며 노동운동을 도운 것으로 알려졌다.

1988년 12월 21일 충남 공주교도소에서 민통련 정책실장으로 투옥됐던 고인(왼쪽 세 번째)이 가석방된 뒤 부인 조무하(〃 두 번째) 씨와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네 번째) 여사와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1990년에는 이재오 전 의원, 김문수 현 고용노동부 장관 등과 함께 민중당 창당에 앞장서면서 진보정당 운동을 시작했다. 이후 개혁신당·한국사회민주당·녹색사민당·새정치연대 등을 창당했다.

하지만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를 시작으로 15·16대 총선, 2002년 재보궐, 17·19·21대 총선까지 7차례 선거에서 모두 떨어졌다. 21대 총선에서는 보수정당인 미래통합당 후보로 옮겨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세 차례 대선에도 출마를 선언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처럼 한평생 노동·시민운동에 헌신했음에도 결국 제도권 정계로는 진출하지 못해 ‘영원한 재야’라는 별명을 얻었다.

최근에는 신문명정책연구원을 만들어 저술과 국회의원 특권 폐지 운동 등에 집중해왔다. 지난해부터는 특권폐지국민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로 활동하며 국회의원의 면책·불체포특권 폐지, 정당 국고보조금 폐지, 국민소환제 도입 등을 주장했다.

고인은 7월 페이스북에 담낭암 말기 진단 사실을 밝히며 “당혹스럽지만 살 만큼 살았고, 할 만큼 했으며, 또 이룰 만큼 이루었으니 아무 미련 없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한다”고 했다. 이어 “자연의 순환 질서, 곧 자연의 이법에 따른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해온 사람이기에 자연의 이법에 따른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덧붙였다.

고인은 또 “과도한 양극화와 여기에서 오는 위화감과 패배 의식, 높은 물가와 과다한 부채, 온갖 사건 사고로 고통을 겪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도 문제”라며 “하지만 앞으로 더 살기 어려운 나라가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 엄습해 있는 터에 이를 극복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할 정치는 그야말로 무지의 광란이라 불러 마땅할 팬덤 정치가 횡행해, 이러다가 나라가 망하는 게 아닐까 하는 우려마저 든다”고 했다. 그러면서 “물극즉반(物極則反·극에 도달하면 원위치로 돌아온다)의 세상 이치처럼 이를 극복할 대반전이 일어나기를 기대할 뿐”이라고 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날 “장기표 선생은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으로 우리 시대를 지키신 진정한 귀감이셨다”며 “그 뜻을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고 애도했다.

정부는 고인에게 국민훈장 모란장을 추서했다.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은 이날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인의 빈소를 찾아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고인에게 추서된 국민훈장을 전달했다.

정치권에서도 추모 물결이 이어졌다.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전태일 열사의 ‘대학생 친구’였고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선봉에 섰던 투사였다”며 “대학생 시절 김근태 선생과 함께 마음속 깊이 존경했던 대선배셨다”고 했다.

나경원 국민의힘 의원은 페이스북에 “민주화와 개혁의 큰 별, 장기표 선생님의 명복을 빈다”며 “고인의 헌신과 열정은 우리 모두의 가슴에 깊이 새겨질 것”이라고 적었다. 박상수 국민의힘 대변인도 “양 진영이 그저 극한적 대립에 빠져 있는 현실에서 모두에 소구할 수 있는 어른의 존재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필요한데 우린 그런 어른 한 분을 또 잃었다”고 추모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조무하 씨와 딸 하원·보원 씨가 있다. 장례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장으로 치러지며 발인은 26일이다.

22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 원장 빈소에서 조문객들이 조문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정욱 기자 mykj@sedaily.com이승배 기자 bae@sedaily.com강도림 기자 dorimi@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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