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평화도시와 장갑차 [서울 말고]

한겨레 2024. 9. 22. 16:5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지난 11일 동인천역에서 장갑차를 앞세운 시가행진 현장 모습. 사진 신현수

신현수 | ㈔인천사람과문화 이사장

책 ‘세계사를 바꾼 인천의 전쟁’을 보면 여몽전쟁,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병인양요, 신미양요, 청일전쟁, 러일전쟁, 한국전쟁, 연평해전, 대청해전 등 지난 800여년간 일어난 전쟁에서 인천은 늘 ‘최전선’이었다. 여몽전쟁, 정묘호란, 병자호란 당시는 전시수도였고, 임진왜란 때는 의병사령부였다. 프랑스 함대가 침략했고, 미군이 초지진, 광성보를 점령했다. 청일전쟁, 러일전쟁 또한 제물포 앞바다에서 시작됐다. 한국전쟁 당시 전세를 뒤집은 결정적 계기도 ‘인천’상륙작전이었다. 아무튼, 세계 여러 도시 중에서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인천은 ‘전쟁의 도시’였다. 인천이 한반도의 중심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역사학자 이덕일은 “인천처럼 한 지역이 나라 전체의 모순을 두 어깨에 짊어지고 그 고통을 고스란히 감내해야 했던 곳도 찾기 힘들다”고 말했다.

인천시는 지난 11일 인천항 1·8부두에서 열린 제74주년 인천상륙작전 기념행사에서 ‘국제평화도시’ 가입을 선포했다. 국제평화도시로 승인되면 평택, 광명, 부산, 포천에 이어 국내 다섯번째 국제평화도시가 된다고 한다. 잘한 일이다. 그런데 같은 날 도무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졌다. 오전에 선포식을 한 후 같은 날 오후에 장갑차를 앞세우고 동인천역에서 인천축구전용경기장까지 1.4㎞ 시가행진을 했다. 국제평화도시를 선포하자마자 장갑차를 앞세운 시가행진이라니, 이 무슨 해괴한 일인가? 거리 풍경은 갑자기 전두환 시대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번영이 인천상륙작전에 힘입은 바 크다는 걸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그것을 기억하는 방식은 과거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 장갑차를 앞세운 시가행진은 도대체 누구에게 보여주려는 것인가? 목적이 뭔가? ‘전쟁도시’를 선포하려는 건가? 진정한 평화는 평화로 지키는 것이지 장갑차로 지켜지는 게 아니다.

인천시가 진정한 국제평화도시로 가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따로 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한국전쟁의 승기를 잡았지만, 이 과정에서 무려 백여 명의 국민이 희생됐다. 미군의 무차별적인 월미도 폭격으로 원래 살고 있던 원주민이 희생되거나 졸지에 터전을 잃은 것이다. 인민군 주둔지와 민간인 거주지역을 전혀 구별하지 않은 폭격의 결과였다. 이들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고향인 월미도로 돌아가지 못했다. 주민들은 원주민의 희생을 기리고 생존자들의 귀향을 위해 1997년 월미도 귀향대책위를 조직했고, 2007년부터 매년 월미도 희생자 위령제를 열었다. 이곳에서 희생된 사람들은 인천시민이었고, 대한민국 국민이었다. 월미도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비극이 있다. “상륙작전 당시 땅굴을 파고 저항하던 인민군 400여 명 중 108명이 전사하고 136명이 포로로 잡혔는데, 이 중 100여명은 생매장됐다. 투항을 권유해도 나오지 않자 미군이 불도저로 입구를 메워버렸다.” (“월미도에 생매장된 인민군 100명 발굴해 돌려줍시다” 한겨레 2024년 9월11일치) 원주민들의 귀향과 원상회복, 생매장당한 인민군들의 넋에 대한 민족적, 대승적 차원의 위령 행사, 이런 것들이 진정한 국제평화도시로 가기 위해 인천시가 먼저 나서야 할 일이다.

인천은 예부터 한반도의 인후 또는 배꼽으로 비유되었다. 그래서 인천은 늘 전쟁터였고, 서해5도는 여전히 위태롭다. 반대로 말하면, 그만큼 인천은 한반도 평화의 핵심 도시라는 뜻이다. 장갑차를 앞세우고 평화 도시를 말하는 것은 양두구육의 고사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자가당착 아니면 자기분열이다. 인천이 평화로우면 한반도가 평화롭다. 한반도에 평화가 오면 동북아에 평화가 온다. 동북아의 평화가 보장되면 전 세계의 평화가 보장된다. 한낮의 백일몽, 잠꼬대가 아니다.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