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랑 파리' 익스프레스, 그리고 한국의 GTX를 생각하다
'지하 50m 깊이에서 파리 도심과 외곽을 최고 속도 110키로로 달리며 하루 300만명을 운송하는 급행열차. 건설비 380억 유로(약 55조). 4개의 노선과 69개의 새로운 역 신설.'
'그랑 파리 익스프레스(GPX)'는 파리 외곽과 도심을 철도망으로 통해 연결하기 위한 프랑스의 야심찬 프로젝트다. 국내의 GTX와 이름도 유사하고 지하 4~50미터 대심도 깊이에서 100키로 이상의 속도를 내는 급행열차라는 점에서 겉모습만 놓고 보면 매우 흡사하다. GTX가 서울 외곽과 중심부를 빠르게 연결한다는 점에서 두 사업 목적도 상당히 유사하다.
그랑 파리? 범 파리, 또는 대 파리 정도의 의미가 될테다. 이런 말이 나오는 이유는 파리가 좁기 때문이다. 파리 시의 면적은 105㎢, 서울의 1/6에 불과하다. 19세기에나 충분한 면적이었지, 전세계의 다른 메가시티 중심부(city proper)에 비해서도 너무 좁다. 다른 도시와 비교를 할 때도 인접한 3개 데파르망(샌생드니, 오드센, 발드마른)을 합쳐서 계산하는 게 맞을 정도다(그렇게 해야 서울시와 유사한 면적[762㎢]이 된다). 덕분에 파리의 기능을 분담하는 많은 중심지들은 파리 밖에 들어선 경우가 많다. 유명한 라데팡스, 1998 월드컵 및 2024 올림픽 주경기장, 여러 대학 캠퍼스는 물론, 공항이나 베르사유 성까지 모두 그렇다.
이들 지역을 잇는 주 교통수단은 자동차다. 파리 시내는 지하철이 촘촘하게 깔려 있지만, 시계를 벗어나면 철도는 점점 더 듬성듬성해진다. 그 사이를 잇는 것은 도로 교통일 수 밖에 없다. 이들 도로 옆 토지를 개발하는 데 별다른 제도적 제약도 없다 보니, 파리 주변 지역은 결국 이렇게 자동차 지배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지난 수십년에 걸쳐, 일드프랑스 레지옹 전체에 걸쳐, 주로 인구가 늘어난 곳은 바로 이들 도로 우세 지역이었다.
이 프로젝트의 핵심은 파이(Φ) 모양을 이루는 15호선과 14호선이다. 15호선은 파리 시로 들어가지 않고 주변 3개 데파르망의 거점을 잇는 75km의 순환선이다. 14호선은 이를 관통한다. 또한 이들 노선을 16, 17, 18호선이 보조한다. 이미 파리 시내를 관통하며 주변 데파르망을 향해 방사형으로 뻗어 있는 RER 노선과 함께, 이들 노선은 파리 외곽 3개 데파르망에 철도망을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이미 지하 수십미터까지 파고 들어가 있는 파리 내부보다는, 외곽에 투자하는 것이 이 '그랑 파리 특급' 프로젝트의 정체인 셈이다.
이들 노선이 통과하는 지역은 이미 언급했다시피 도로가 지배적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그랑 파리 프로젝트같이 커다란 철도 투자 사업이 탄력을 받은 것일까? 무엇보다도 이들 파리 교외 지역이 받았던 비난 때문이었다. 이 지역은 승용차 의존도가 높은 지역인 만큼, 파리 도심부보다 교통 온실가스 배출량이 높을 수 있다는 주장이 2000년대 프랑스 사회에 팽배했다. <근교의 복권>(원저 2013, 한국어판 2018) 처럼 국내에 소개된 책에서도 프랑스 사회가 빠진 고민과 근교에 대한 비난을 쉽게 살펴볼 수 있다. 바로 이 교외에서는 잘 알려진 노란 조끼 시위대까지 등장했고, 또 승용차 관련 규제는 정치적 쟁점으로 부상하게 된다. 자동차 지배가 한계에 봉착했다는 진단이, 바로 이 지역의 생활 방식에 대한 평가에 영향을 미치고, 나아가 정치적 쟁점까지 만들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이 지역에도 차 없는 사람과 가정은 지금도 많다. <근교의 복권>에서는 2010년 시점 여전히 30% 이상의 교외 가정에 차가 없었다고 말한다. 일드프랑스로 치면, 1000만 명 가운데 300만 명 이상이 차가 없다는 말이다. 이 상황을 앞에 두고 철도를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럽다.
학계는 이 철도망의 방향을 놓고 두 방향의 기획이 충돌했다고 진단한다. 하나는 최소주의적 기획이다. 일드프랑스 레지옹(경기, 인천, 서울을 모두 포괄하는 수준의 지방정부라고 보면 된다) 차원에서 제시된 이 기획(Arc express)은 주로 소외 지역을 잇는 노선안으로, 특히 순환선 철도가 없었던 파리 교외의 여러 지역을 잇는다. 다른 한 편은 최대주의적 기획이다. 국가(사르코지 행정부) 차원에서 제기된 이 기획이 지금 진행중인 그랑 파리 익스프레스의 직계 조상이다. 특히 공항을 비롯한 외곽의 대규모 거점을 연계하는 추가 노선을 짓고, 이들을 파리를 관통하는 추가 노선까지 붙이는 것을 초점으로 한다. 주요 역의 역세권 개발까지 함께 이뤄질 것이다. '그랑 파리'라는 야심찬 이름은 19세기 중후반, 제2제정 시절 파리를 오늘의 모습으로 뜯어 고친 오스망(Haussmann)의 파리 개조 사업만큼 중대한 역할을 이들 철도 노선이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욕심을 담은 것이다.
사회적 공론화 기구에까지 상정된 이 논쟁에서 승리한 것은 후자, 즉 지금의 그랑 파리 대안이었다. 이것은 2010년대 파리가 처한 상황 때문이었다. 파리는 런던과 같은 인근 메가시티와 경쟁하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대규모 철도 사업을 하려면, 이 경쟁에서 파리의 입지를 더 강화하는 방향이 더 낫다는 것이었다. 가령 공항 연계는 세계 메가시티 경쟁 속에서 파리 도심부를 항공망과 접속시키는 핵심 수단으로 주목받았다. 다만 핵심 노선인 15호선은 아크 익스프레스의 일부를 따라 변형되었다. 샌생드니 데파르망의 철도 음영 지역을 더 샅샅이 훑게 된 것이다. 16호선이 이를 보조하며 추가 개발을 노리고 있었다.
현재 그랑 파리 익스프레스 사업은 2030년대 중반 완료를 목표로 진행중이다. 이 과정에서 두드러지는 목표는 두 가지다. 하나는 파리 일대의 교통 온실가스를 감축하는 것이다. 2050년 기준 1420만 톤까지 감축을 목표로 한다니, 프랑스 교통망 전체 배출량의 10%를 이들 사업으로 감축하겠다는 말이다. 물론 361억 유로(약 53조 원)이라는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지만, 이 비용 가운데 상당액이 녹색 채권을 통해 조달된 출자금(equity)이어서 금융 부담은 조금 덜 수 있었던 것 같다. 더불어 이들은 사무실세(Taxe sur les bureaux) 처럼 기업에게 교통망 이용의 대가로 붙는 세금의 일부도 활용할 수 있다.
또 다른 목적은 물론 이들 노선 역 주변지역의 개발이다. 역세권 개발이야 새 철도에 당연히 따라오던 것이지만, 어쨌든 기후위기 시대에 도시의 활력을 유지하는 길은 이 길 뿐이니 새로운 면도 있다. 모든 노선이 완공되면 이들 노선에서만 300만 명, 즉 서울 2호선 2배, 일드프랑스 주민의 1/4에 달하는 막대한 승객을 기대하고 있다니, 주거지 뿐만 아니라 산업 집적지를 이들 역 부근에 만들 수 있다는 기대 역시 큰 건 사실인 것 같다.
이들 사업을 주도하는 것은 소시에테 데 그랑 파리라는 공기업((établissement public à caractère industriel et commercial, EPIC)이다. 다양한 여타 공공기관(일드프랑스 모빌리티, 파리교통본부RATP, 국철 등등)과 조율을 통해 사업을 진행해야 할 뿐만 아니라, 자금 조달, 수익 재투자, 그리고 무엇보다 이들 과정의 민주적 통제와 같은 부분에서도 공공 부분이 가진 이점은 분명히 존재한다. 특히 이 프로젝트가 지방정부보다는 중앙정부의 주도권 하에 굴러가는 사업인 만큼, 그리고 역 반경 400m 내에 들어오는 알짜 토지에 대해 개발권을 가진 사업자인 만큼, 민주적 통제 없이는 누구도 사업 추진을 납득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까지 확인하면서, 결국에는 같은 시기의 서울을 뒤흔들고 있는 GTX가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울에서는 온실가스 감축과 모달 시프트를 위해 외곽 광역 철도망을 강화한다는 개념이 이제야 연구자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수준이다. 세간은 다만 최고속도, 부동산 가격, 누가 민간투자로 돈을 버는지 정도나 주목할 뿐이다. 그랑 파리 익스프레스 프로젝트 역시 이런 쟁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망을 둘러싼 프랑스 사회의 논의는 조금 다른 풍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 철도의 최대 목적은 교외 지역의 교통망을 기후 친화적으로 바꾸고, 교통 소외지역을 철도로 연결하는 일이다. 더불어 그 방향을 이끌 주체가 누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사회적 논의 역시 숙의 기구를 통해 이뤄졌다. 그 결과, 민주적 통제가 쉬운 공기업이 사업을 주도하게 되었고 말이다. 민자가 주도하고, 온실가스 감축 목표 또한 공식화되고 있지 않은 GTX 사업과는 분명 다른 모습이다. 파리에서 철도의 미래를 찾는다면, 리브고슈가 아니라 이 그랑 파리 익스프레스 사업과 같은 야심찬 사업을 살펴보는 것이 먼저인 것은 틀림이 없어 보인다.
[전현우 서울시립대 자연과학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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