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 가족은 할머니 장례식날 싸웠을까”…3대 독자 감독이 말하는 ‘장손’
“가족은 가장 미스터리한 존재”
영화 ‘장손’은 관객들이 잊고 살았던 저마다의 가족을 불러낸다. 아직도 아들을 더 귀하게 여기고, 가장의 말 한마디가 집안의 훈시가 되는 가부장적 집안이라면 더더욱. 대구 출신인 오정민(35) 감독은 개인적 경험에서 출발해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품고 있는 보편적 가족의 정서를 끌고 온다. 여기에 더 나아가 세대별 대비를 통해 대한민국 현대사로까지 세계를 확장한다.
첫 장편영화에서 사계절마냥 시끌벅적한 유머와 감춰진 것이 드러날 때의 뜨끔함, 그리고 서늘한 정서를 모두 담아낸 오 감독을 개봉 당일인 11일 만났다. 베테랑2’가 장악한 극장가에서 ‘장손’은 입소문을 타며 개봉 2주째에도 여전히 고군분투 중이다. "잊혀진 역사는 복원하고, 사라질 것들은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는 오 감독의 포부처럼, 뒤늦었지만 그래서 더 솔직하게 기록할 수 있었다.
영화는 여름, 가을, 겨울이란 계절의 변화에 따라 장르와 분위기, 가족의 풍경이 바뀐다. 무더운 여름, 제사를 위해 경북 구미 소재 두부 공장을 운영 중인 김 씨 집안에 가족들이 모여든다. 할머니와 며느리, 손녀까지 전을 부치며 제사 준비에 한창이고, 남자들은 방에서 소회를 나눈다. 임신한 손녀가 에어컨을 틀어달라고 성화지만, 할머니 말녀(손숙)는 아랑곳 않는다. 그러던 중 집안의 3대 독자 성진(강승호)이 도착하자 할머니가 말한다. "성진이 왔다. 퍼뜩 에어컨 틀어라."
현실과 싱크로율 높은 떠들썩한 집안 풍경은 웃음을 자아낸다. 개인적으로든, TV 드라마로든 한국 사람이라면 어딘가에선 접했을 익숙한 풍경. 실제 3대 독자인 오 감독은 "유머를 위해 극화된 부분이 많다"면서도 "은연 중에 할머니, 할아버지는 누나보다 나를 더 챙기려고 했던 게 사실인 것 같다"고 말했다.
가족 구성원은 전형적이다. 집안의 전통에만 신경쓰는 할아버지 승필(우상전)은 ‘빨갱이’ 트라우마가 있고, 법대에 진학했지만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다리를 다친 아버지 태근(오만석)은 낙향한 뒤 돈만 밝히는 술주정뱅이가 됐다. 그리고 장손 성진은 무명 배우로 생활이 여의치 않지만, 두부 공장을 물려받고 싶지는 않다.
오 감독은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친 할아버지 세대는 생존을 위해 살았고, 독재를 겪은 아버지 세대는 민주화 과정을 겪으며 돈의 가치에 집중했다. 결국 ‘윗세대’는 모두 시대에 휩쓸려온 인물들"이라며 "이 영화는 그들을 이해하고 싶었던 내 나름의 노력"이라고 설명했다.
오 감독은 소위 ‘586세대’에 대한 의문을 갖고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초고에선 윗세대에 대한 혐오와 비판이 많았다고 전했다. 그는 "아버지뻘 세대인 ‘586세대’는 가장 진보적인 가치를 내걸고 민주화운동에 나섰다가, 지금은 오히려 보수화된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많아 의아했다"고 말했다.
선선한 가을이 되고, 할머니의 죽음으로 영화의 분위기는 조금씩 어두워진다. 상여를 메고 곡을 하며 비통하게 슬퍼하는 장면 다음에 부의금을 정산하며 ‘누가 많이 받았다, 아니다’하며 옥신각신 하는 장면이 나온다. 역시 오 감독의 개인적 경험이 바탕이 됐다. "스무살 때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가족들이 다투던 모습, 그리고 우리 가족은 왜 멀어진걸까란 생각을 했다"며 "대한민국 가족이라면 누구나 겪는 이야기인 걸 알게 됐고, 보편적 이야기로 확장할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영화 속에서 할머니의 죽음은 다소 갑작스럽게 다가온다. "죽음을 맞은 대상이 할아버지가 아니라 할머니인지가 중요했어요. 할아버지가 죽는다면 이 집안이 그렇게 와해될까. 이 대가족을 유지했던 건 할아버지의 가부장적 전통이 아니라 할머니의 사랑은 아니었을까."
할머니의 죽음 이후 곪았던 상처가 곳곳에서 균열을 일으키며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그러곤 겨울이 되고, 할아버지는 장손 성진이에게 무언가를 남기곤 훌쩍 떠난다.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건너뜀 당하는 아버지 세대는 ‘잃어버린 세대’처럼 보인다. 오 감독은 "저 역시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며 "부모 자식 관계는 인정욕망과 투쟁의 관계인데, 아버지에 대한 기대를 충족하지 못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할 생각이 없는 손자가 오히려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고 말했다.
영화를 보는 사람에 따라 오 감독의 윗세대에 대한 태도가 너무 비판적으로 느껴질 수도, 너무 느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전 그냥 윗세대를 이해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한다고 제가 메시지를 던지는 건 정치적 구호고 위선이자 거짓말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계절의 변화에 따라 카메라의 움직임과 질감 자체가 달라진다는 점이 영화의 매력이다. 가족들이 모두 모여 떠들썩했던 여름에 비해 모두가 떠난 겨울은 차분하고 정적이다. 오 감독은 "계절이 변화하면서 가족의 풍경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보여주고 싶었다"며 "카메라가 온도를 느끼듯 여름엔 많이 움직였다면, 겨울에선 아예 얼어붙은 듯 고정해서 찍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할아버지가 홀로 어딘가로 걷는 마지막 롱테이크는 극단적인 롱-쇼트의 뚝심이 돋보인다. 주변은 개인적 공간인 집에서 보편적 세계로 확장되고, 피사체는 흡사 점처럼 보인다. 오 감독은 "한 시대의 퇴장을 어떻게 보여줄지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다"고 말했다. 이 장면에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올리브 나무 사이로’의 엔딩 시퀀스를 떠오른 관객이라면, 기뻐해도 좋다. 오 감독이 영향을 받았기 때문. 그 외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의 ‘레오파드’를 들며 "우아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단편 영화를 통해 수차례 가족에 대해 이야기했던 오 감독은 투자자를 찾는 과정만 5년이 걸린 첫 장편 영화에서조차 가족 이야기를 했다. 분위기와 장르가 다른 그의 다음 영화 역시 가족은 핵심 요소일 것이다. 그는 "가족이라서 갈등이 증폭되지만, 가족이라서 갈등이 해소된다는 점에서 가장 가까이 있지만, 가장 미스터리한 존재"라고 말했다.
"가족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계속 영화를 만들고 있어요. 가족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면 창작욕이 사라질 것 같습니다."
이정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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