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 이것은 홍상수·김민희가 아니다…‘수유천’이 가리키는 방향은?

이정우 기자 2024. 9. 22.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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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80%)
영화 ‘수유천’에서 강사 전임(김민희)은 외삼촌(권해효)과 정교수(조윤희)를 소개시켜준다. 전원사 제공

"우리가 하는 말들이 다 없어지면 좋아할 수도 있죠."

이 대사가 나오기 직전 상황은 이렇습니다. 한 남자가 대학교 같은 과 친구 세 명을 차례로 만났습니다. 그 중 한 친구에게 결혼하자고 했고, 다른 친구들은 말이 되냐고 역정입니다. 제자들과 함께 이 남자에 대해 적대적 태도를 견지하던 대학 강사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립니다. "그래, 사랑하는 게 잘못은 아니니까."

3류 치정극이나 시트콤 같다고요? 그런데 "사랑하는 게 잘못은 아니니까"란 대사의 주인공이 배우 김민희이고, 연출자가 홍상수 감독이란 사실 덕분에 흥미로워집니다. 현실을 반영한 듯한 대사이자 상황이기 때문이죠. 그렇다고 영화가 딱 떨어지게 이들의 이야기라고 단정할 순 없습니다. 분명 그렇지 않으니까요. 서울시 도봉구 덕성여대 근방에서 단 5일간 촬영한 홍 감독의 신작 ‘수유천’(18일 개봉) 얘기입니다.

전원사 제공

◇왕년의 홍상수가 돌아왔다

‘수유천’은 최근 홍 감독의 영화 중 가장 웃기고 활기찹니다. 남녀간 술자리 대화에서 은근한 수작을 걸며, 미묘한 긴장감과 웃음을 주던 홍상수 만의 감각이 살아있습니다. 홍상수가 돌아왔다고 할까요.

줄거리는 간략합니다. 여대 대학 강사 전임(김민희)은 학교 촌극제를 위해 배우 겸 연출가인 외삼촌(권해효)에게 자신의 학과 촌극 연출을 부탁합니다. 외삼촌은 전임의 상사인 정교수(조윤희)와 가까워지고, 전임은 그 와중에도 아침마다 수유천에서 그림을 그리며 작품을 만들어갑니다.

홍 감독의 영화답게 강의실과 술자리에서 유머가 빛납니다. 외삼촌을 만난 정교수의 추파는 은근하지만 강력합니다. 외삼촌의 팬이었다던 교수는 첫 만남부터 장어를 권하는 한편, 슬쩍슬쩍 외삼촌을 터치합니다.

외삼촌이 대사보다 중요하다고 했던 눈짓과 제스처를 통한 유혹의 향연이 이어집니다. 삼촌이 윗옷을 벗으니까 틈을 놓치지 않고 "상체 좋으신대요? 걱정 안 해도 되겠어요"라고 농을 치고, 교수가 문득 "저 돈 많아요. 그런데 쓸 데가 없어요"라고 말하는 식이죠. 전임이 앞서 언급했던 제자 3명과 만난 남자(하성국)과 대화도 웃깁니다. 이 대목은 관객을 위해 아끼겠습니다.

전원사 제공

◇도처에 홍상수·김민희…‘범홍론’의 이유는

영화는 도처에 홍 감독이 가득합니다. 자전적이란 말로는 모자라요.만물에 신이 내재해 있다는 ‘범신론’을 빌어 ‘범홍론’이란 말이 자연스러울 정도입니다. 연인 김민희와 만남 이후 영화에선 국내에서의 비판적 여론과 시선을 의식한 변명성 대사가 자주 나왔죠. 자기연민이란 프레임이 씌워진 것도 그때부터일 겁니다.

이번 영화 역시 감독 자신과 주변이 연상되는 설정과 대사들이 넘쳐납니다. 외삼촌의 "예전이랑 많이 달라졌어. 이젠 편한 사람이 좋아"란 대사는 예사고, 아예 정교수의 입을 빌려 자신을 비판하는 여론을 힐난합니다. "참 나쁜 사람들이야. 이렇게 훌륭하고 멋진 예술가를 매장시키는 게 이해가 안 가요."

그런데 이번 영화는 자기연민이란 느낌이 그리 들지 않습니다. 진작 극복한 것처럼 보여요. 영화의 경쾌한 분위기 덕분일 수 있지만, 홍 감독이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현지 관객들과 한 대화에 실마리가 있습니다. "영화 속 인물들이 하는 대사의 의도는 감독이나 작가의 의도가 아니다. 그런 요소들은 아주 구체적(concrete)으로 배치된 것들이다. 어떤 고정관념과 고정관념이 아닌 것들을 적절히 혼합하면 구체적인 것들은 계속 구체적인 것이 될 뿐 추상적인 것이 되진 않는다."

쉽게 말해 추상적인 개념이나 관념을 지양하고 구체적인 것만 영화 속에 풀어 넣고 싶다는 얘기입니다. 이러한 의도이다 보니 자연히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자신과 배우들의 정보를 분해·해체해서 여기저기에 심어놓는 것 아닐까요. 극도로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설정들은 극 중 대화 속에 들어가 리얼함을 높입니다. 전체 줄거리와 상관없는 사소하지만 실은 중요한 말들이 많아질수록 실체에 가까워지는 효과를 거두게 되죠. 관객이 극 중 상황을 실제와 혼동할 수도 있을 정도로요.

영화 내에 홍 감독과 김민희를 연상시키는 설정과 대사들이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전임이 "어떻게 인생이 이렇게 달라졌는지, 가다가 방향을 확 튼 거 같아요. 운이 정말 좋았어요"라고 말하는 대목은 자연히 홍 감독과 작업하는 현재를 옹호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외삼촌이 조카 전임에게 뒤늦게 이혼 사실을 밝히는 대목은 또 어떤가요. "나 이혼했어. 10년 넘게 별거하고 사니까 법원에서 하게 해주더라." 홍 감독의 개인사가 겹쳐지며, 탄식 혹은 감탄이 나옵니다. 실제 생각일 수도, 아닐 수도 있어요. 분명한 건 관객이 보다 실체에 접근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효과가 생긴단 겁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가 아니죠. 초현실주의 미술가 르네 마그리트는 사실적으로 파이프를 그려놓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써놨습니다. 파이프를 그리다가 이것은 그림일 뿐이란 생각이 들어서였죠. 홍 감독 역시 영화에서 구체적인 것을 배치해 최대한 실체에 접근한다는 것 자체에 의문이 생기고, 그렇기에 서슴없이 자신의 상황을 영화에 활용하는 것 아닐까요.

전원사 제공

◇실물에서 패턴을 얻는 작업방식

미술 강사 전임은 한강의 흐름을 패턴화해서 베틀로 직물을 만듭니다. 작업의 시작점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전임은 "실물에서 패턴을 얻는다"고 대답합니다. 자신이 아는 한도 안에서의 실제를 반복·변주하며 구조화하는 방식은 홍 감독의 작업 방식 아닌가요. 네, 전임의 작업방식은 홍 감독의 작업방식과 유사합니다.

전임은 압구정에서 시작해 중랑천, 그리고 수유천으로 강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영화 자체가 섬세하게 직조된 현재 홍상수란 패턴이자 다시 거슬러 올라가려는 의지가 반영된 이정표란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거슬러 올라가려는 그 방향이란 예술과 삶, 타인에 대한 태도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최근의 정서를 잃지 않으면서 예전의 날 선 활기를 되찾겠다는 것 아닐까요. 이번 영화처럼요.

이번 영화로 로카르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김민희는 활보하며 영화에 생동감을 입힙니다. 영화 속에서 전임은 늘 혼자인데요. 타인과 함께 있어도 고독하게 보이도록 감독이 세심하게 찍었습니다. 그런데 씩씩해요. 자신보다 어린 세대인 제자들에게 "편안해져라"라며 손을 잡아주죠.

개인적으로 두 사람이 두 번째로 호흡을 맞췄던 ‘밤의 해변에서 혼자’가 이 영화와 대구를 이루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 김민희가 연기한 여배우 영희가 혼자 앓는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인물이라면, ‘수유천’에서 전임은 8년이란 세월을 거치며 단단해진 인물입니다. 혼자라도 남을 독려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전원사 제공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입니다. 전임은 외삼촌에게 교수랑 처음 만난 날 교수의 집 2층에서 잔 거냐며 캐묻습니다. 외삼촌에게 답을 얻은 후, 장어집 아래 계곡을 좀 더 구경하겠다며 홀연히 화면에서 사라집니다. 외삼촌이 애타게 "전임아"라고 부르는 소리가 이어지고서야 전임은 해맑게 웃으며 등장합니다. "거기 볼 거 있냐?"는 물음에 "정말 아무것도 없어요"라는 전임의 얼굴에서 화면이 정지됩니다.

‘아무것도 없다’는 대답은 이제껏 영화와 실체의 본질을 고민해온 홍 감독의 답일지 모릅니다. 일상의 무수한 변주 속에서 답을 얻어내려 했지만 그런 곳에 답은 없었던 거죠. 오히려 답은 김민희의 해맑은 얼굴에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정지화면은 그 깨달음의 순간을 영원히 봉인시키려는 마음인 것 같습니다. 홍 감독은 다음 영화에서 자신을 둘러싼 혼잡함을 뒤로 하고, 보다 홀연히 아름다움의 길을 찾아 나설 것 같습니다.

이정우 기자

전원사 제공

<결론은요>

훌륭하고자 하는 현재의 홍상수와 경쾌한 이전의 홍상수가 완벽하게 어우러지며 다음을 예고한다.

순수재미 ★★★★

영상미학 ★★★★

솔직지수 ★★★★☆

종합점수 ★★★★

이정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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