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리오의 ‘판소리’ 판은 어디서 보이고 들리는가
‘그녀가 뿜었어(She blows)!’
1980년 5월19일 미국 워싱턴주에 있는 활화산 세인트헬렌스가 대폭발하며 분화하자 현지 지역신문이 단 1면 제목이었다. 화산 이름이 여성명사인 것을 빗댄 문구였다. 바로 그날 한국 광주에선 활화산 같은 항쟁이 분출했다. 전두환 신군부가 내려보낸 공수부대의 잔혹한 진압에 맞서 시민들이 무기를 들고 저항을 본격화한 것이다. 이틀 뒤인 5월21일 워싱턴주의 다른 지역신문인 시애틀타임스는 1면과 종합면에 화산 뉴스를 속보로 다루면서 2면 안쪽에 ‘폭도들이 한국의 도시를 통제하고 있다, 11명 사망’이란 제목으로 공수부대원이 곤봉으로 청년을 두들겨 패는 사진과 짧은 기사를 실었다.
이 신문들은 지금 광주시립미술관 광주파빌리온 전시장에서 선보이고 있는 나현 작가의 설치·아카이브 작업 ‘빅풋을 찾아서’의 일부다. 작가는 1980년 5월 미국 신문들을 모은 아카이브 진열대를 놓고, 그 옆에 정체불명의 눈사람 ‘빅풋’이 뒤춤으로 손을 묶인 채 머리를 박고 쪼그린 거대 조형물을 놓았다. 세인트헬렌스 화산 폭발 전까지 산기슭에서 출몰한다는 전언들이 나왔으나, 폭발 뒤로 전언 자체가 사라져버린 정체불명의 괴물이다.
안미희 기획자가 꾸린 광주파빌리온은 지난 7일부터 시작한 국내 최대의 격년제 국제미술제인 광주비엔날레가 올해 국가관·도시관 전시를 대폭 확충하면서 처음 내놓은 전시기획 공간이다. ‘무등: 고요한 긴장’이란 제목을 달고 어머니 혹은 대동세상과 같은 무등산 벌에서 광주의 지역성과 5월 항쟁 등으로 대표되는 역사를 예술과 교직시킨 작품들을 선보였다. 나현 작가의 ‘빅풋…’을 중심으로 이강하 작가의 대작 풍경 ‘무등산의 봄’(2007)과 이세현 사진작가의 대작 ‘푸른 낯 붉은 밤-옛 국군통합병원’, 송필용 작가의 유화 ‘역사의 흐름’(2023)이 한 시선의 흐름으로 어우러진다. 5월 광주의 역사를 예술 공간의 동선으로 재해석해 연출한, 근래 보기 드문 큐레이팅의 성과가 나온 셈이다.
네덜란드 국가관 기획전 ‘두개의 노래’ 출품작도 광주파빌리온과 맥락이 통한다. 페르세인 브루어슨과 마르히트 루카츠란 작가가 협업한 영상물 ‘나도 너처럼 되고 싶어’는 식민지의 식물을 채집해 키우는 서구 제국주의 국가의 식물원을 배경으로 유령 같은 남자가 등장해 디즈니 영화 ‘정글북’을 떠올리게 하는 노래와 춤을 선보이며 돌아다닌다. 뒤이어 수리남의 음악가 아바타가 등장해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이어지는데, 옛 식민지 사람들이 제국주의 영향이 깃든 디즈니풍 노래와 춤을 실연하면서 자신들의 존재를 되찾는 역설적인 과정을 보여준다.
광주파빌리온의 5월 광주 동선과 네덜란드 국가관의 작품들은 ‘판소리’를 주제로 들고 나온 니콜라 부리오 총감독의 구상에 공명한다. 흥미로운 건 광주파빌리온과 네덜란드관 등 31개 국가관·도시관 전시는 부리오가 관여하지 않은, 광주시와 비엔날레재단 주도의 관제성 기획이란 점이다. 부리오는 지난 6일 언론설명회에서 판소리란 주제를 ‘많은 사람이 모인 공공적인 공간(판)에서 부르는, 목소리 내지 못하는 자들의 노래(소리)’라는 식으로 해설하면서 현재 기후변화나 바이러스 창궐, 난민 문제 등에 따른 공간과 삶의 변모를 인간과 비인간 존재들이 한데 얽힌 거대한 오페라 형식으로 풀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런데 정작 그의 입김이 닿지 않은 여러 국가관들에서 이런 식의 개념틀이 훨씬 더 구체적이고 친숙하게 다가오는 건 역설적이다.
광주 양림동 이이남 작가 스튜디오에 ‘정적인 쾌락’이란 주제를 걸고 자리를 튼 폴란드관이 이런 맥락에서 미술인들의 호평을 받았다. 1960~70년대 사회적 미술을 지향하는 유럽 플럭서스 운동의 주무대였던 폴란드의 미디어아티스트들은 스펙터클에 찌든 시대에 주체적 시선을 강조했다. 이런 맥락에서 과거와 현재의 시간적 간극에 주목한 영상들과, 진공 상태에서 소리 기계의 음판을 떨게 하지만 파장이 전달되지 않아 들리지 않는 사운드 퍼포먼스 등을 실연했다.
전시나 작품 수준이 천차만별이지만, 다른 상당수 국가관들도 부리오의 의도에 나름 화답했다. 코로나 사태 이후 심화한 외로움에 대한 예술가의 분석법을 데이터·영상으로 보여주는 이탈리아관(동곡미술관)과 비를 갈망하는 사막 사람들의 가뭄 기도를 들려주며 인간과 하늘, 땅의 관계를 짚어본 카타르관(광주은행 아트홀), 임금에게 북소리를 울려 민원을 호소하는 신문고 풍습에 한국·일본의 역사적 관계를 투영시킨 사운드 설치작품을 선보인 일본관(갤러리 혜윰)은 본전시 못지않은 ‘판의 소리들’을 펼쳐낸다.
부리오의 본전시에서는 ‘판소리’를 뒷받침하며 전체 출품작들을 꿰는 서사를 찾기 어렵다. 기획상의 약점이 뚜렷한데도, 부리오가 현 지구의 문제성, 현장성을 강조하면서 100% 현역 생존 작가의 신작과 근작들 중심으로 출품작들을 추려냈다는 점은 과거 광주비엔날레와 다른 차별성을 보여준다. ‘부딪힘 소리’(1·2전시실), ‘겹침 소리’(3전시실), ‘처음 소리’(4·5전시실) 등 작품들의 소리 유형에 따라 3개 영역으로 본전시를 구성했지만, 실제로는 ‘부딪힘 소리’에서 표상한 고밀도화한 인간 공간과 이산화탄소, 환경 호르몬, 바이러스 등 비인간 존재가 공존하거나 중심이 되는 ‘겹침과 처음 소리’의 공간으로 전시 영역을 이분화시켰다. 작품들의 생동감을 배가시킨 구도란 점에서 일견 참신하다.
본전시의 개별 작품들로 보면 2전시실 안쪽에 나온 아르메니아계 리투아니아 작가 안드리우스 아루티우니안의 신작 설치작품 ‘아래’(Below)가 돋보인다. 석유 추출물인 시커먼 역청으로 온통 뒤발한 기묘한 모양새의 금속코일에서 저주파 신호음을 발신하는 얼개의 설치작품이다. 작곡가이기도 한 그는 역청이 옛적엔 단순한 연료가 아니라 성화를 태우거나 주검을 보존하는 등 신성한 제의의 용도로 쓰였다는 기억을 땅 위에서 일어서는 듯한 코일들의 겹쳐진 모양새와 땅 속 존재들의 속삭임 같은 신호음으로 일깨운다. 핵심인 4전시실은 동굴 벽화의 분위기를 자아내며 전시장 안쪽 벽을 채운 도미니크 놀스의 대작과 소금사막을 형상화하며 비물질 존재의 의미를 곱씹게 한 비앙카 봉디의 설치작품 등이 주목을 받았다.
근래 세계 미술계는 신구작들을 끌어 모아놓고 작위적 의미를 갖다 붙이는 비엔날레의 고루한 형식과 난립상에 넌더리를 내고 있다. 공들여 새 작가를 고르고 문제작을 내도 기존 비엔날레 전시 틀로는 설득력과 기대감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이번 비엔날레는 여실히 각인시켜주는 듯하다. 부리오가 떨쳐내지 못한 전시 방식의 진부함에 대해 국내외 기획자들은 대부분 냉소적인 반응들을 쏟아냈기 때문이다. 끝물로 가는 비엔날레의 트렌드는 기획자가 어떤 주제나 형식을 내든 알아서 굴러가는 군집 개인전과 개별 기획전으로 파편화되는 양상이 뚜렷해졌다. 지난 4월 개막한 베네치아비엔날레가 이런 퇴락상을 보여줬고, 지난달 먼저 개막한 부산비엔날레와 이번 15회 광주비엔날레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부리오도 이런 퇴화의 흐름을 모르진 않았을 터다. 그래서인지 형식을 의식하지 않고 작가와 작품에 집중하면 눈에 건질 만한 것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그의 전시들은 은연중 일러주고 있는 것처럼 비친다.
실제로 올해 광주 전시의 매혹적 화두는 ‘판의 소리’가 아니라 핍진한 ‘동시대성’(컨템퍼러리)으로 집약된다. 우주 은하의 에틸향을 흩뿌리고(로리스 그레오), 남극 빙하가 기후변화로 깨져나가는 엄숙한 소리를 들려주며(사디아 미르자), 중국과 미얀마 사이 길을 돌을 차고 걷는 몸의 생생한 감각을 보여주는(신하오청) 신작들이 올해 비엔날레 특유의 동시대성을 웅변한다. 뒤틀리고 꽉 막힌 지구의 현실에 긴밀한 몸짓과 기발한 개념으로 반응하는 동시대 작가들의 조형 방법론과 시대의식을 광주의 전시 현장 도처에 널린 문제작들을 통해 교감할 수 있다. 12월1일까지.
광주/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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