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제주문화] (93)"매미 날개보다 얇다!"…수공예 정점 관모공예
주재료 말총 제주서 생산…제주 여성 삶의 애환 묻어나
[※ 편집자 주 = 제주에는 섬이라는 지리적 여건으로 생성된 독특한 문화가 많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 세대가 바뀌고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제주만의 독특한 문화가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 수 있지만, 문화와 함께 제주의 정체성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닌지 안타깝고 불안합니다. 근대화 과정에서 후진적이고 변방의 문화에 불과하다며 천대받았던 제주문화.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 속에서 피폐해진 정신을 치유하고 환경과 더불어 공존하는 삶의 지혜를 배울 수 있습니다. 제주문화가 재조명받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다시'라는 우리말은 '하던 것을 되풀이해서'란 뜻 외에 '방법이나 방향을 고쳐서 새로이' 또는 '하다가 그친 것을 계속해서'란 뜻을 담고 있습니다. 다시! 제주문화를 돌아보고 새롭게 계승해 나가야 할 때입니다. 연합뉴스는 이번 기획 연재를 통해 제주문화가 우리 삶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고 계승해 나갈 방법을 고민합니다.]
(제주=연합뉴스) 변지철 기자 = 넷플릭스 한국 오리지널 시리즈 '킹덤'이 방송됐을 때 외국인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좀비'가 아니었다.
바로 한국의 전통 모자 '갓'이었다.
해외 시청자들은 당시 드라마 킹덤에 대해 "좀비와 멋진 모자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정도로 '갓'에 큰 관심을 보였다.
과거에도 개항 후 조선 땅을 밟은 외국인들은 다채로운 갓에 매료돼 조선을 '모자의 나라'라고 부를 정도였다.
그러나 조선시대 '갓'을 비롯한 '망건', '탕건' 등 다양한 관모(冠帽, 옛날 벼슬아치들이 쓰던 모자)를 만들었던 주산지가 '제주'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게다가 오늘날 관모 공예의 명맥이 유일하게 제주에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더더욱 모른다.
잊혀가는 관모 전통 잇는 사람들
순우리말인 '갓'은 조선시대 선비들이 쓰던 모자다.
선비들은 상투를 틀고 이마에 망건(網巾)을 두른 뒤 그 위에 탕건(宕巾)을 쓰고, 다시 그 위에 갓을 썼다.
머리카락 한 올 흘러내리지 않도록 망건을 완벽하게 두를 때까지 수차례 풀었다 둘렀다를 반복할 정도로 의관을 정제하는 일에 정성을 다했다.
조선의 선비들은 '신체발부(身體髮膚)는 수지부모(受之父母)이니 불감훼상(不敢毁傷)이 효지시야(孝之始也)'라는 유교 예법에 따라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신체는 물론 머리카락 하나까지 소중히 여겼다.
혼자 있을 때나 손님을 맞을 때나 언제나 갓을 단정히 썼고, 왕에게 절을 하더라도 갓을 벗어 인사하는 법이 없었다.
망건에서부터 탕건, 갓에 이르기까지 '관모'는 옷차림에 있어 이 같은 유교적 예법을 행하는 시작과 끝이었다.
조상들은 언제부터 갓을 쓰기 시작했던 것일까.
그 시작은 놀랍게도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구려 고분 감신총의 벽화인 '착립기마인물도'(着笠騎馬人物圖)에 갓을 쓴 인물이 등장하고, 삼국유사에도 '갓을 썼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처음에는 단순히 햇빛을 가리는 용도로 갓을 착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고려 말 공민왕 때 들어 신분에 따라 갓 장식에 차등을 두기 시작하면서 관리들이 착용하는 모자인 '관모'로서의 기능을 하기 시작했고, 이어 조선시대에 이르러 신분과 관직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굳어졌다.
우리말에 갓을 쓰기 전 착용했던 '탕건'을 일컫는 '감투'란 말이 있다.
'벼슬이나 직위'를 속되게 가리키는 말인데 오늘날에도 '감투를 쓰다' 또는 '감투를 벗다'와 같이 어떤 직위 또는 벼슬에 오르거나 그만둔다는 의미 등으로 쓰인다.
이 표현 외에도 망건과 탕건, 갓과 관련한 여러 속담이 있는 걸 보면 조선 500년간 관모가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하지만 조선 말기인 1895년(고종 32년) 내려진 단발령으로 상투가 사라지고 근대화, 현대화 과정에서 전통 관모는 점차 쓰임새를 잃었다.
오늘날 망건과 탕건, 갓과 같은 전통 관모는 영화나 드라마, 박물관에 가야만 볼 수 있는 귀한 물건이 됐다.
그럼에도 관모 공예 전통을 잇는 사람들이 있다.
국가무형유산 갓일·양태장 장순자 보유자, 국가무형유산 갓일·총모자장 강순자 보유자, 국가무형유산 망건장 강전향·전영인 보유자, 국가무형유산 탕건장 김혜정 보유자 등이다.
갓, 망건, 탕건 각 분야의 명맥을 이어오며 최고 장인의 반열에 오른 기능 보유자들이 전국에서 유일하게 제주에 남아있다.
제주 여성 중심으로 최고의 관모 생산
"제주(耽羅) 갓은 매미 날개보다 얇다!"
조선 후기 실학자인 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 자신의 저서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서 제주의 갓에 대해 이같이 말하며 품질의 우수성을 극찬했다.
제주는 갓을 비롯한 망건과 탕건의 주산지였다.
그 이유는 주재료가 되는 말의 갈기나 꼬리털인 말총이 제주에서 생산됐기 때문이다.
연암 박지원의 소설 '허생전'에서도 주인공 허생이 큰돈을 벌기 위해 제주로 건너가 매점매석한 물건도 '말총'이었다.
말총은 가늘고 부드러워 섬세한 작업에 적합할 뿐만 아니라 질겨서 잘 끊어지지도 않았다.
또 색상이 머리카락과 비슷해 세련된 느낌을 줄 뿐만 아니라 머리에 쓰면 가볍고 감촉도 좋아 관모를 제작하는 데 있어 최고의 재료였다.
당연히 뭇사람들은 제주에서 만든 갓과 망건, 탕건을 최고로 생각했다.
더불어 제주에선 갓을 만들기 위한 또 다른 재료인 양죽(凉竹, 얇게 깎은 대나무)도 생산했다.
갓은 둥근 원통 부분에 해당하는 '총모자'와 햇빛을 가리는 '양태'로 구성되는데 총모자는 말총으로 만들지만, 양태는 대나무를 쪼개 실처럼 가늘게 뽑아낸 죽사(竹絲)로 만들었다.
제주에서 총모자와 양태를 육지로 보내면 통영과 예산 등지에서 이를 조립해 완성품인 '갓'으로 만들어 전국 각지로 유통했다.
망건, 탕건 역시 모두 항포구를 통해 다른 지역으로 팔려나갔다.
자연스레 관모 공예는 육지와 제주를 잇는 항포구가 있던 조천, 함덕, 삼양, 화북 등 제주시 지역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제주의 여성 하면 많은 사람이 해녀를 떠올리곤 하지만 관모를 만드는 일에도 그 중심에는 제주 여성이 있었다.
제주의 여자아이들은 6∼7살 어릴 적부터 갓과 망건, 탕건일을 배웠고 특유의 부지런함과 강인함으로 머리카락만큼이나 가는 말총과 대오리를 섬세한 손길로 엮어 질 좋은 관모를 생산해냈다.
과거 주문량이 많을 때는 한 집 건너 한 집, 손녀부터 할머니까지 온 가족이 모두 관모 제작에 손을 보탰다고 한다.
'내 동침아 돌아가라 / 서울 사람 술잔 돌 듯 / 어서 재개 돌아가라 / 이 양태로 큰 집 사고 / 늙은 부모 공양하고 / 어린 동생 부양하고 / 일가친척 고적하고 / 이웃사촌 부조하자'
제주에서 갓일을 하며 부르던 노동요에는 이처럼 관모를 만들어 가족을 부양하려는 어린 소녀들의 삶의 애환이 묻어난다.
관모를 만드는 일은 어린 소녀들이 자라 어머니가 되고 이를 다시 딸에게, 그리고 다시 딸에게로 전승됐다.
갓 양태를 만드는 전통은 고(故) 강군일(1883∼1952) 선생, 고(故) 고정생(1907∼1992) 선생, 장순자(1940∼) 선생, 그리고 양금미(1976∼) 이수자까지 4대(代)째 이어지고 있다.
총모자장인 강순자(1946∼) 장인은 어머니 고(故) 김인(1920∼2015) 명예보유자로부터 갓일을 배워 이제는 며느리 강병희(1969∼) 이수자와 막내딸 양윤희(1976∼) 이수자에게로 가르침을 잇고 있다.
망건일은 고(故) 이수여(1923∼2020) 선생, 강전향(1943∼) 선생, 전영인(1969∼) 선생까지, 탕건일은 고(故) 김공춘(1919∼2020) 선생, 김혜정(1946∼) 선생, 김경희(1977∼) 이수자에게로 3대(代)째 전통 기술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 이 기사는 '제주 관모 공예의 전승'(제주명품공예인협동조합, 2017), 국가무형문화재 전승자 구술자서전(국립무형유산원, 2017) 책자를 인용·참고하고, 장순자·강전향 선생 인터뷰 등을 통해 제주의 관모공예 전통을 소개한 것입니다.]
bjc@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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