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언론도 ‘페미사이드’라 부른, 스위스의 M 살인사건 [평범한 이웃, 유럽]

취리히·김진경 통신원 2024. 9. 22. 0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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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안 좋은 스위스 같은 나라에서도 페미사이드는 심각한 문제다. 지난해 스위스에서는 가정폭력으로 25명이 사망했다. 전체 살인사건의 약 절반인데, 피해자 대다수가 여성이었다.
2023년 11월25일 국제 여성 폭력 추방의 날,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페미사이드 반대 시위 참가자들이 희생자의 사진을 들고 있다. ⓒEPA

2021년 2월의 어느 평일 아침이었다. 스위스 취리히 인근 도시 빈터투어에 있는 아파트에서 32세 여성 M은 19개월 된 막내딸을 돌보고 있었다. 첫째와 둘째 아이는 방학을 맞아 아빠가 있는 세르비아에 가 있었다. M과 남편은 별거 중이었다. M은 얼마 전까지 남편과 시댁 식구가 있는 세르비아에서 5년간 살았지만 반복되는 남편의 폭행을 견디지 못해 아이들을 데리고 고향인 스위스로 돌아와 이혼소송을 냈다. 이혼에 동의하지 않고 자신을 협박하는 남편에 대한 별도의 고소장도 제출했다. 남편은 세르비아 이주민 가족으로 원래 스위스에 거주했으나 반복적인 범죄로 인해 추방당한 뒤 스위스 입국이 금지된 상태였다. 폭력적인 남편이 접근할 수 없는 지역으로 옮겨온 다음 경찰에 남편의 협박을 알리고 이혼소송도 진행 중이니 이제 좀 안전해졌다고 M은 생각했을 것이다. 새로 만난 남자친구와 다시 원하는 삶을 꾸려갈 수 있으리라고도 믿었을 것이다.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 방문자를 확인한 M은 당황했다. 세르비아에 있어야 할 남편의 할아버지, 즉 시할아버지 D였다. 더 이상 가족이 아니게 된, 예고 없이 찾아온 이 손님이 부담스러웠지만 노인을 겨울날 밖에 세워둘 순 없었다. 문을 열자 D는 인사도 없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 M은 그에게 커피를 대접했다. 집에 있던 베이비시터가 빨랫감을 들고 지하로 내려가자 D는 화장실에 들어가 문을 잠갔다. 잠시 후 화장실에서 나온 D의 손에는 리볼버 권총이 들려 있었다. 그는 거실 소파에 앉아 있던 M을 향해 연달아 여섯 발을 쏘았다. 소리를 듣고 이웃이 달려왔을 때 M은 소파에 쓰러져 있고 그 옆에서 딸이 울고 있었다. 소파 앞 탁자 위에는 총이 놓여 있었다. D는 차분한 태도로 이웃 사람에게 “내가 M을 죽였으니 경찰에 신고를 하라”고 말했다.

재판까지는 2년여가 걸렸다. 범죄율 낮은 스위스에서 드물게 잔인한 살인사건이라 여러 언론이 사건 초기부터 재판 과정까지 자세히 보도했다. 수사 과정에서 새로운 사실이 드러났다. M을 방문하기 전날 D는 취리히 남부 추크 지역에 살던 사위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세르비아 이주민으로 스위스에 오래 거주한 D에겐 여전히 스위스에 가족들이 있었다). 사위는 그동안 몰래 M의 생활을 정탐해왔고, 남자친구가 생긴 사실을 알아낸 뒤엔 증거 사진을 찍어 세르비아의 D에게 보냈다. D는 사위의 집에서 총을 챙기고 여분의 총알까지 키친타월에 싸서 준비한 다음 M의 집으로 갔던 것이다. D의 세르비아 동네 이웃들은 M을 가족의 명예를 실추시킨 ‘창녀’ ‘나쁜 엄마’ ‘도덕성 없는 아내’라 부르며 비난했다고 전했다.

빈터투어 지방법원에서 열린 재판 과정을 보도한 스위스 일간지 〈NZZ〉의 1월10일자 보도에 따르면, 휠체어를 타고 재판정에 나온 D는 한 단어를 반복해 사용했다. ‘Meine(나의)’였다. M을 일컬어 ‘나의 (손자) 며느리’ ‘내 딸’ ‘내 자식’이라고 했다. “나의 딸이 어떻게 내게 그럴 수 있나?” “나의 며느리가 하지 말았어야 할 짓을 했다”라고 말했다. ‘나’가 중심이었고 죽은 피해자에 대한 죄책감은 내보이지 않았다. 외국인 이주민으로서 프랑스와 스위스에서의 삶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등 자신의 불행한 인생을 강조했다. 법원은 당시 79세이던 그에게 징역 20년과 이후 15년간 스위스로부터 추방형을 선고했다.

졸지에 엄마가 증조할아버지에게 살해당하는 비극을 겪은 M의 아이 셋은 어떻게 되었을까. 세르비아에 있는 아빠와 같이 살게 되었다. 법적으로 가장 가까운 보호자였기 때문이다. 아내를 폭행·협박했던 그는 할아버지의 살인 계획을 전혀 몰랐다고 말했다. 타국에 있어서 정밀 조사도 어려웠다. 아이들은 가장 가까운 혈족이자 동시에 엄마를 죽인 살인자의 가족에게 맡겨졌다.

이 사건은 전형적인 ‘페미사이드’다. 여성의 성 역할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바탕으로 가족 또는 친밀한 파트너에 의해 반복적 폭력이 가해지다 ‘처벌’의 의미를 담은 살인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평소 페미사이드라는 용어 사용을 꺼리는 스위스의 보수 미디어들도 이 사건을 페미사이드로 보도했다. 페미사이드(femicide) 또는 페미니사이드(feminicide)는 한국어로 보통 ‘(남성에 의한) 여성 살해’로 번역되는데, 중대한 사회문제임에도 하나의 합의된 정의가 아직 없다.

일반 살인과 페미사이드의 차이

흔히 쓰이는 유엔의 정의에 따르면 페미사이드는 “성별과 관련된 동기를 가진 의도적 살인”이다. 개념이 상당히 광범위하다. 가정폭력(domestic violence)과 겹치는 부분도 있고, 명예살인(honor killing·파트너 선택이나 혼전 성관계, 교육 등으로 가족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며 여성을 살해)이나 지참금 살인(dowry death·신부 측 지참금을 빌미로 신랑 또는 그 가족이 신부를 살해하거나 자살 종용)도 특수 형태의 페미사이드다. 일부에서는 불법 임신중지 시술 과정에서 사망하는 여성을 페미사이드에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여성 폭력의 가장 극단적이고 잔인한 형태가 페미사이드지만, 정확히 어디까지를 일반적 살인이 아닌 페미사이드로 볼 것인지 기준은 제각각이다. 이 때문에 양질의 데이터 확보가 큰 과제다. 유엔마약범죄사무소(UNODC)는 2022년에야 페미사이드를 통계적으로 규정하기 위한 프레임워크를 내놓았다.

M 살인사건에서 볼 수 있듯 치안 좋은 스위스 같은 나라에서도 페미사이드는 심각한 문제다. 지난해 스위스에서는 가정폭력으로 25명이 사망했다. 스위스 전체 살인사건의 약 절반(47.2%)을 차지하는 수치인데, 피해자 대다수(20명)가 여성이었다. 보통 남성이 강력범죄에 더 많이 연루되기 때문에 일반 살인 피해자 중엔 남성이 더 많지만, 가정폭력으로 인한 살인사건의 경우 스위스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피해자 대부분이 여성이다. 스위스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2018년 이스탄불 협약을 비준했다. 2014년 발효된 이스탄불 협약의 공식 명칭은 ‘여성 폭력과 가정폭력 예방 및 퇴치를 위한 유럽 평의회 협약’으로, 성차별적 학대를 명시한 최초의 국제협약이다. 여성에 대한 할례, 강제 낙태 및 불임, 성범죄 등으로부터 여성을 보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협약 비준국은 강간 위기 대응센터 및 24시간 상담전화 개설, 피해자에 대한 상담 및 의료지원 제공 의무를 지닌다.

‘위협적 존재를 제거하기 위해서’

여성혐오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최근에는 젊은 남성의 우경화로 상황이 더 악화되고 있다. 젊은 남성의 우경화는 전 세계적 현상이다. 2022년 스웨덴 예테보리 대학에서 유럽 상황을 잘 보여주는 연구를 내놓았다. 28개 유럽 국가에서 총 3만2469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에 따르면, 성평등에 가장 반대하는 이들은 젊은 남성(18~29세)이었다. 이들은 여성이 자신의 삶에서 잠재적 위협이며, 여성을 우대하는 공공기관이 불공정하고, 여성 인권의 진보가 곧 자신들의 기회 상실로 이어진다고 생각한다. 여성을 열등하게 본 과거와 달리 여성을 위협으로 보는 이 같은 태도를 논문 저자들은 ‘현대적 성차별주의(modern sexism)’라고 불렀다. 여성 폭력 수치는 그대로이지만 그 이유가 ‘열등한 존재를 길들이기 위해서’에서 ‘위협적 존재를 제거하기 위해서’로 바뀐 것이다.

젊은 남성의 우경화라는 새로운 현상과 별도로, 오래 존재해온 제도적 차별이 여성 폭력에 미치는 영향 또한 사라지지 않았다. 스위스 여성 폭력 피해자 지원단체(Opferhilfe-Schweiz)에 따르면 스위스의 60세 이상 여성 중 30만명 이상이 폭력에 노출된다. 여기에는 물리적 폭력뿐 아니라 성폭력, 심리적 폭력(모욕·협박·고립 등), 그리고 생활비 지급 중단 등의 경제적 폭력도 포함된다.

3월8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2022년 한 해 동안 페미사이드로 희생된 여성 133명을 추모하기 위한 퍼포먼스가 진행되었다. ⓒAP Photo

 

이 중에서 경제적 폭력에 주목해보자. 올해 초 스위스 연방통계청이 발표한 자료를 보면 교육 기회 면에서는 여성이 이미 남성을 추월했다. 2022년 기준 25~34세 인구 중 대학 졸업자는 여성이 53%, 남성이 50%다. 2000년 통계(여성 17%, 남성 34%)와 비교하면 비약적 변화다. 그러나 고학력이 커리어 발전이나 소득 증가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12세 이하의 어린아이가 있는 맞벌이 커플 중 집안일을 공평하게 나누는 경우는 전체 4분의 1에 불과하다. 같은 일을 하는데도 여성은 남성보다 적은 임금을 받는다. 교육·경력·업무·종류·노동시간 등 임금에 영향을 미치는 지표를 모두 고려한 다음에도, “설명되지 않는 이유”로 12% 더 적게 받는다. 양육과 가사 부담으로 여성은 파트타임 직장을 택하는 경우가 많다. 2023년 기준, 일하는 여성 중 58%가 파트타임이다. 남성은 이 비중이 19.6%다.

낮은 임금, 육아와 가사 부담, 높은 파트타임 비중 등은 남녀가 퇴직 후 받는 연금 액수의 차이로 이어진다. 스위스에서 은퇴한 여성은 남성에 비해 연금을 평균 33% 덜 받는다. 남편이 일찍 사망하거나 이혼을 했을 경우 노년 여성의 재정적 위기는 더 커진다. 이는 스위스 65세 이상 인구 중 빈곤층에 속하는 비율이 여성 18%, 남성 13%라는 결과로 이어진다. 스위스만의 문제가 아니다. 스위스보다 일하는 여성 비율이 더 높은 프랑스에서도 여성은 남성보다 연금을 30% 덜 받는다. 노년 커플 사이에서 경제적 폭력이 발생하는 배경이고, 이것은 다른 종류의 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 경제적·심리적으로 타인에게 의존하는 상태에서는 폭력을 당해도 신고를 꺼린다. 그 때문에 스위스 정부는 올해 노인에 초점을 맞춘 여성 피해자 지원 캠페인을 시작했다.

페미사이드를 포함한 여성 폭력의 배경은 한두 가지로 설명하기가 불가능하다. 문화·교육수준·일자리·사회복지 정책·법 제도 등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하나 확실한 것은 친밀한 관계의 남성에게 폭행을 당해 사망하는 여성의 수가 줄어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M은 스스로를 폭력적 관계에서 떼어내고 경찰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평일 아침에 자신을 찾아와 총을 쏜 시할아버지를 막지는 못했다. 최근 영국 내무부가 극단적 여성혐오를 ‘테러’로 규정하고 규제하는 방안을 검토한다고 밝혔다. 적극적 대응은 환영할 일이지만 이 문제의 근본적 해결 방안이 될지는 의문이다. 다각도로 벌어지는 여성 폭력에 맞서려면 대응책 역시 좀 더 다각적이고 치밀할 필요가 있다.

취리히·김진경 통신원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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