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130년 전 어부 작업복… 팝스타도 입는 바버 ‘왁스 재킷’

잉글랜드 북동부 사우스실즈에 있는 바버 공장
노동자부터 왕실 가족까지…모두 즐겨 입는 英 브랜드
고유한 디자인에 부드러운 변화 가미...실용성은 기본
LF가 국내 유통 매년 매출 50% 증가

왁스를 바른 천으로 만든 ‘왁스 재킷’은 방수(防水) 기능은 뛰어나지만 무게가 무겁고 정기적으로 왁스칠을 해야 하는 탓에 관리가 쉽지 않은 옷이다. 여름 몇 달을 제외하곤 연중 비가 많이 내리는 영국에서는 가장 실용적인 옷으로 꼽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렇지 않다. 겨울에 비가 많이 오지 않아 건조하기 때문에 무거운 왁스 재킷보다 가볍고 방한 기능이 월등한 패딩의 활용도가 높다.

그런데 최근 한국에서 왁스 재킷의 판매가 눈에 띄게 늘었다. 왁스 재킷의 대표 브랜드 바버(Barbour)는 국내 패션업체 LF가 지난 2021년 하반기부터 공식 유통을 맡은 이후, 매년 매출이 50%씩 증가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영국과 미국, 독일, 이탈리아에 이어 바버 상위 매출 5위 국가다.

한국 소비자들은 이 실용적이지 않은 재킷을 도대체 왜 구매하는 것일까.

왁스 재킷은 숙련도 높은 작업자가 수작업으로 완성하는 제품이다./연선옥 기자

◇ 한 땀 한 땀 손수 만드는 왁스 재킷

바버의 빠른 성장 비결을 확인하기 위해 지난 11일 찾은 잉글랜드 최북단 산업 도시 뉴캐슬어폰타인의 작은 바닷가 마을 사우스실즈. 이곳에 있는 바버 공장에서는 130년 동안 영국의 상징과도 같은 왁스 재킷이 만들어져 왔다.

건물 외벽에 영국 왕실이 주는 품질 보증서 ‘로열 워런트’가 붙은 공장 내부로 들어가 보니 30여명의 직원이 손수 원단을 자르고 재봉틀로 원단을 이어 붙여 재킷을 완성하고 있었다. 기계와 로봇이 설치돼 인력이라곤 관리자 몇 명뿐인 현대적인 공장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왁스 원단이 한 벌의 재킷으로 완성되기까지는 20개가 넘는 공정을 거친다. 먼저 두꺼운 왁스 원단을 스케치 선에 맞춰 자르는 것에서부터 작업이 시작된다.

왁스 재킷을 만드는 작업은 왁스칠이 된 두꺼운 원단을 자르는 것에서 시작된다./연선옥 기자

바버는 스코틀랜드 핼리 스티븐슨(Halley Stevensons)과 잉글랜드 맨체스터 인근 브리티시 밀러레인(British Millerain)에서 왁스 원단을 공급받는다. 두 회사 모두 1800년대 설립돼 품질 좋은 왁스면을 생산하는 곳이다. 레인코트처럼 표면이 매끈한 인공 직물은 화학물질을 이용해 천에 물이 스미는 것을 막지만, 왁스 원단은 천연 방식으로 옷에 방수 기능을 더하는 것이 특징이다.

공장 매니저는 “왁스가 칠해진 원단은 일반 원단보다 훨씬 두껍고 단단하기 때문에 기계에 넣으면 기계가 금방 망가진다”며 “왁스 재킷은 작업자가 수작업으로 하나하나 만들어야 하는 옷”이라고 말했다.

재봉틀 앞에 앉은 숙련도 높은 작업자들은 겉감과 안감을 연결하고 소매, 지퍼, 카라, 주머니를 완성해 나갔다. 재킷 한 벌을 만드는 데 드는 시간은 한 시간 정도. 이 공장에서는 하루 약 650개의 왁스 재킷이 생산된다. 연간 생산량은 11만5000벌 규모다.

◇ 고기잡이배 노동자의 가장 실용적인 옷

왁스 재킷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1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바버 창업자 존 바버는 면에 기름막을 입히면 물이 스미는 것을 방지한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이곳 사우스실즈에 왁스칠 한 옷을 판매하는 회사 ‘제이 바버 앤 선즈’(J.Barbour&sons)를 설립했다. 이 지역 사람들 대부분의 삶의 터전이 바다였기 때문에 바버가 만든 옷은 곧바로 입소문이 났다. 종일 배 위에서 일해도 젖지 않고, 거친 바닷바람도 막아주는 왁스 재킷은 어부들에게 가장 실용적인 작업복이었다.

게리 제인 수석 디자인·개발 매니저가 수십년 전 판매된 왁스 재킷을 설명하고 있다./연선옥 기자

하지만 바버는 ‘노동자의 실용적인 옷’이라는 명성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오늘날 바버는 도시에서 일하는 직장인들이 즐겨 입는 옷인 동시에 팝스타나 할리우드 영화배우가 선택하는 브랜드이기도 하다. 영국 왕실도 바버의 단골 소비자다. 바버는 영국 왕실에 5년 이상 물건을 납품한 업체에 주는 로열 워런트도 받았다. 바버는 찰스 3세 국왕(1987년)과 엘리자베스 2세 여왕(1982년), 에든버러공(1974년)에게 각각 로열 워런트를 받았다. 바닷가 노동자들이 입던 옷으로 시작한 바버의 소비층이 중산층 이상으로 크게 넓어진 셈이다.

보통의 프리미엄 브랜드는 고소득층을 타깃 소비자로 삼아, 기능성보다 고급스러운 원단과 디자인을 강조한 고급 제품을 내놓는다. 이런 제품이 고급스러운 취향을 대변하게 되면 대중이 기꺼이 큰돈을 지불하면서 해당 브랜드는 대중화 단계에 이른다. 하지만 노동자를 위해 고안된 기능성 재킷을 만들던 바버는 프리미엄 브랜드가 채택하는 일반적인 ‘톱다운’이 아닌 ‘바텀업’ 방식으로 성장한 이례적인 역사를 보여줬다.

130년 전 잉글랜드 북동부 해안가 어업 노동자가 입던 옷이 이제는 왕실과 유명 배우나 가수로 소비층이 넓어진 비결은 무엇일까.

◇ 고유한 디자인에 부드러운 변화 가미

바버는 가장 큰 무기인 실용성을 유지하면서 디자인에 작은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 충성도 높은 노동자를 주요 소비층으로 잡아두는 동시에 고급스러운 패션을 추구하는 중산층과 고소득층도 새로운 소비자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 진화의 단계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 스코틀랜드 민속품인 타탄을 재킷 안감으로 사용한 것이다. 바버는 고유한 타탄 디자인을 재킷 안감으로 사용해 재킷에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더했다.

이안 버긴 이사가 실용성에 초점을 둔 바버 재킷의 디자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연선옥 기자

게리 제인스(Gary Janes) 수석 디자인·개발 매니저는 “노동자들의 간식이나 장갑, 작업 도구를 넣는 바버 재킷의 커다란 주머니는 팝스타의 스마트폰이나 왕실 가족의 사냥용 총알도 넉넉히 수납한다”라며 “바버 재킷의 디자인은 시대에 맞춰 끊임없이 진화했다”라고 설명했다.

다만 변화는 오랜 시간에 걸쳐 천천히 이뤄졌다. 많은 의류 브랜드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소비자 입맛에 맞추기 위해 디자인에 급진적인 변화를 주기도 한다. 하지만 바버는 오랫동안 브랜드가 유지한 고유한 디자인을 조금씩 바꾸는 방식을 채택했다.

바버 남성복 분야를 총괄하는 이안 버긴(Ian Bergin) 이사는 “바버의 상징성을 유지하면서 디자인의 진보를 이루는 방법은 진정성을 갖고 부드럽게(gently) 발전시키는 것”이라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구도 놀라지 않게 변화를 ‘부드럽게’ 이뤄내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100년 전 판매된 왁스 재킷은 지금 매장에 진열된 재킷과 차이가 크지 않다. 덕분에 로고가 진하게 표시되지 않아도 누가 바버 제품을 입고 있는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도로를 달리는 랜드로버 ‘디펜더’는 차 뒷면을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과 같다.

사우스실즈에 있는 바버 공장에서 작업자들이 왁스 재킷을 만드는 모습./연선옥 기자

버긴 이사는 “점진적이고 완만한 변화를 주면서도 시장을 유지할 수 있는 근간은 좁은 기반에서도 제품을 발전시키고 개선할 수 있도록 오랫동안 가문이 사업을 운영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바버는 5대째 이어지고 있는 가족 기업으로, 댐 마가렛 바버 회장과 그의 딸 헬렌 바버 부회장이 회사를 이끌고 있다.

◇ ”바버 재킷은 수선해 평생 입는 옷”

바버의 가격 정책도 소비층을 넓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프리미엄 브랜드로 평가되는 바버의 재킷 가격은 럭셔리 브랜드보다 낮지만, 그렇다고 쉽게 구매를 결정할 정도로 저렴하진 않다. 비교적 높은 가격에도 노동자들이 기꺼이 바버 제품을 구매하는 이유는 가성비가 좋기 때문이다. 디자인이 크게 바뀌지 않는 바버 제품은 유행을 타지 않는 데다, 내구성이 튼튼해 구매를 일종의 투자로 여긴다는 것이다.

바버 공장에서 중요한 공간 중 하나가 소비자들이 보내온 재킷을 수선하는 곳이다. 사우스실즈 공장에는 매년 2만8000여벌의 낡은 재킷을 손질하는 수선실이 있다. 십여명의 작업자가 일하고 있는 수선실에는 방수 기능을 높이기 위해 왁스칠을 요구하거나 해진 소매를 수선해 달라는 요구가 담긴 주문서가 부착된 낡은 재킷이 수백벌 걸려 있었다.

바버의 왁스 재킷은 정기적으로 왁스를 발라 관리하면 반영구적으로 입을 수 있는 옷이다. 작업자가 뜨거운 온도에서 녹인 왁스를 재킷에 바르는 모습./연선옥 기자

새 재킷을 만드는 공정 한 곳의 평균 작업 시간이 3분이라면, 수선실 공정은 15분 정도다. 새로 판매할 재킷을 만드는 것보다 더 오랜 시간을 들여 기존 고객이 구매한 제품을 수선해 준다는 의미다.

수선 프로그램이 신규 판매에는 오히려 독이 되지 않을까. 산업혁명 이후 탄생한 영국의 많은 기계 업체는 혁명적인 기술에도 불구하고 파산을 피하지 못했는데, 기계가 망가지지 않아 수선이나 교체 수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버 측은 수선 프로그램이 오히려 브랜드에 대한 충성도를 높인다고 판단하고 있다. 버긴 이사는 “덜 자주 구매하되 오래 사용할 수 있는 제품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면 왁스 재킷을 두 벌 사는 대신 재킷과 함께 입을 수 있는 니트나 부츠를 구매한다”며 “오래 사랑받는 브랜드가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룬 사례”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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