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넘어선 예술은 어떻게 분단의 기억을 현재로 이었을까”.. 경계에서, ‘이데올로기’란 환상을 마주하는 법

제주방송 김지훈 2024. 9. 21.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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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10월 4일 ‘포지션 민 제주’
선무 작가 ‘이데올로기’ 전
선무 作 '수학려행'


# 푸른 하늘을 바라볼 때 떠오르는 그리움은, 그저 그런 단순한 감정이 아닙니다. 그것마저 인간의 역사와 이념이 만든 경계의 흔적이라는 데서 출발한 작업입니다.
미학적인 표현의 차원을 넘어선 붓질은 그런 경계를 넘어, ‘이데올로기’의 무게를 화폭에 담아냅니다.  이데올로기란 게 어떻게 자신의 인생을 덧칠했는지, 그 과정에 발견한 허무함을 작품에 반영했습니다.  이념적 틀 속에 억압됐던 기억을 끄집어내, 그 한계를 벗어나려는 시도들입니다.
그동안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왔던 이데올로기의 틀을 뒤집어, 오랜 시간 강제됐던 믿음의 허상과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을 드러냅니다.

선무 作 '너도 해봐'(왼쪽), '입단선서'


20일 시작한 선무 작가의 ‘이데올로기’전입니다.

작가의 붓질은 이데올로기의 무게를 해체하는 도구가 됩니다. 익숙한 북한의 ‘선전화’ 차용하되, 남북 분단을 선전하던 이념의 환상을 도발적으로 비트는 방법을 가져왔습니다. 작품에서 ‘이데올로기’는 단순한 정치적 기호가 아니라 역사적 상처의 연장선이자, 체제의 서사 속에 반복되는 공허함의 상징으로 각인됩니다.

■ 이념의 틀 넘어.. ‘실재’를 향한 갈망

작가가 보여주려는 ‘이데올로기’는 정치 체제란 의미를 뛰어 넘어, 알튀세르(Louis Althusser)의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와 유사한 구조로도 읽힙니다. 이데올로기의 구조적 작동을 붓질로 해체하는 시도와 크게 다르지 않은 탓입니다.

사회의 구조적 틀 속에 사적 영역에서 일종의 지배계급의 작동 원리이자 사람들의 자발적 동의를 통해 체제 유지 수단으로 기능한 이데올로기를 해석하는 작가의 씁쓸한 통찰은, 곧바로 남북 경계에 대한 비판의 도구로 전환해 화폭에 펼쳐집니다. 남북 간에 굳어진 경계선을 넘나들며, 정치적 체제가 사람들의 사고를 지배하는 방식을 냉철하게 해체합니다. 경계에 서서 그 선을 다시 그리지만, 이번에는 고착화된 질서에 대한 저항으로 그어진 선들입니다.

예술가이자 사회운동가로, 4.3의 진실을 알리는 데 매진하며 예술작업과 함께 실천적 예술을 펼쳐온 박경훈 작가는 이런 선무 작가의 작업에 대해 “(작가는) 자신의 선전화는 더 이상 최고 존엄이나 생업 현장의 생산력을 고취하기 위한 체제 선전에 유용한 도구가 되지 못한다. 북한 울타리 밖에서는 낯설기만 한 그의 선전화풍 그림들은 오히려 웃프거나 슬픈, 남북 분단 현실을 비틀거나, 비판하거나 또는 평화의 염원을 그려내는 미디어로서 새로운 기능과 가치를 부여받는다”라며 “선북(線北)의 미디어가 선남(線南)의 또는 그 둘 다 아닌 선 밖의 미디어로 거듭난 셈”이라고 진단합니다.

선무 作 '온 사회에'(왼쪽), '한잔하자'



작품에선 낡아버린 미디어, 즉 ‘선전화’가 주는 이데올로기적 환상을 재해석하는 예술적 실험도 엿볼 수 있습니다. 그 안에선 상징계 질서에 억압된 욕망을 해체하려는 라캉(Jacques Lacan, 1901~1981)의 철학적 분석도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욕망은 상징계 질서에 갇혀 그 너머로 나아가지 못하는데, 그 너머가 바로 ‘실재계’로 설정됩니다. 실재계란 욕망이 최종적으로 목표로 하는 지점이자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채워질 수 없는 욕망의 대상으로 설정됩니다.

상징계 속에서 욕망은 갇혀 있지만, 작가는 그 경계를 넘어 실재계에 닿으려는 갈망을 형상화합니다. 현실을 지배하는 이념적 틀이 어떻게 우리의 사고를 구속했는지 작품을 통해 직시하게 만드는 셈입니다.

선무 作 '이거나 먹어라'


■ ‘천사’의 시선으로 본 분단의 상흔

더불어 작가의 작업은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이 언급한 ‘역사의 천사’를 떠올리게 합니다. 근대 비판의 장치이기도 한 ‘천사’란 개념은 파울 클레(P. Klee)의 데셍 ‘신천사’(Angelus Novus)’에서 가져온 것으로, 역사의 진보가 단순히 전진하는 것만이 아닌 그 후에 남겨진 파국과 폐허 속에서 인간이 무력하게 존재하는 모습을 설명합니다.

역사란 게 진보가 미래를 향해 등을 떠밀어도 잔해 더미와 파국을 어루만져야 하듯, 작가의 작품도 현실을 직합니다. 자신의 작업을 통해 진보라는 이름 아래 숨겨진 분단의 상처 그리고 이데올로기가 사람들에게 남긴 허무한 오늘을 작품으로 투영해 가감없이 드러냅니다. 작품이 남과 북 모두에서 버려진, 어딘가에 속하지 않는 존재들을 위한 예술적 저항으로 읽히는 이유입니다.

작가의 붓질은 평화와 통일을 향한 염원을 담고 있지만, 그 염원은 잔해 위에 결과를 남기고 있습니다. 남북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은, 이념을 초월한 존재들을 상상하고 그 이상향을 향한 갈망은 작품에 온전히 담아냈습니다.

선무 作 '려명'(제주도)


■ 제주에서 다시, “희망을 이야기하다”

작가는 분단의 상처를 재해석하며 남과 북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존재들을 꿈꾸고 평화와 통일을 향한 비전을 그립니다. 붓질 하나하나, 이념적 경계에 저항하면서 그 경계를 지우고자 하는 메시지가 불쑥불쑥 드러나는 이유입니다.

작가노트를 통해 작가는 “입이 있어도 말 할 수 없고, 눈이 있어도 볼 수 없으며, 발이 있어도 갈 수 없는 것이 이데올로기”라면서 “이데올로기는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 없는 것”이라 선언합니다. 남과 북이 함께 화목하게 사는 상상 속에서, 예술을 통해 그 비전을 구현하려는 작가의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제주에서의 작업들은 더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이념적 분열과는 거리가 멀지만, 제주라는 곳이 분단의 현실과 고통을 함께 경험한 공간인 만큼, 4·3의 비극을 겪은 섬의 풍경 속에서 남북 분단의 상처에 공감하며 분단의 현실을 새로운 시각으로 풀어내보려 합니다.

선무 作 '찢어진 우산'(자화상)


작가는 작가노트에서 “입이 있어도 말 할 수 없고, 눈이 있어도 볼 수 없고, 발이 있어도 갈 수 없다. 사람이 사람으로 살수 없게 하는 것이 ‘이데올로기’”라며 “결국 이데올로기는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 없는 것”이라 선언합니다. 이어 “이제 ‘그것’ 너머에서 화목하게 사는 남과 북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그리고 작품으로 표현한다”라고 작업 취지를 전했습니다.

박경훈 작가 역시도 “(작가는) 탈피, 탈색을 통한 착한 탈북 주민으로 남한 사회의 안정된 정착 또는 상업 화단의 성공한 예술가로 살기보다는, ‘선’을 지우는 적극적인 작업을 통해 남북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이상향-통일된 나라를 꿈꾸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라며 “더 낯선 제주에서 자기보다 앞서 ‘선’을 지우려다, 치도곤을 당하고 여전히 그 후유증을 겪고 있는 제주 섬사람들, 그들이 죽음으로 감당할 수밖에 없었던 제주의 역사와 그 역사가 스며 슬프나 아름다운 섬을 온전히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앞으로 작가의 작업과 방향성에 기대감을 드러냈습니다.

전시는 10월 4일까지 제주시 삼도2동 주민센터 옆, 갤러리 ‘포지션 민 제주’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황해도 출신의 작가는 북한에서 인민군 복무를 마치고 90년대 말 두만강을 건너 탈북해, 이후 중국에서 다시 대한민국을 찾아 정착했습니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회화과) 졸업(2007) 후, 같은 대학 미술대학원(회화과)을 졸업(2009)한 작가는 ‘행복한 세상에 우리는 삽니다’(대안공간 충정각, 서울, 2008)를 시작으로 ‘마인드 더 갭’(sbd갤러리, 뉴욕, 2011), ‘紅.白.藍’(원전 미술관, 베이징, 2014), ‘Iook at Us’(kunstraum, 독일 뮌헨, 2019), ‘나는 선무다’(마인블라우갤러리, 독일 베를린) 등 20여 차례 개인전을 개최했고 ‘분단을 보듬다’(이한열기념관, 서울, 2020), ‘국제 콜라보 벽화 전시회’(엘리자베스 존스 아트센터, 미국 오리건주, 2021), 전주수묵비엔날레 특별전 ‘산처럼 당당하게 물처럼 부드럽게’(해남 대흥사, 2023) 등 다수 단체전에 참가하는 등 국내외를 오가며 활발한 작품 활동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현재 예술곶 산양 4기 입주작가로, 제주에서 레지던시 활동을 하며 제주와 4.3에 대해 알아보고 작품에 담아내고 있습니다.

JIBS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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