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실패만이 항상 최선이다

안치용 인문학자, ESG연구소장 2024. 9. 21.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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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치용의 노벨상의 문장] 사무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인간은 모두 미치광이로 태어나는 거다. 그중에는 끝내 미치광이로 끝나는 자들도 있고.”
-<고도를 기다리며>(사무엘 베케트, 오증자 옮김, 민음사)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의 대표적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Waiting for Godot)> 등장하는 유명한 대사다. 얼핏 봐도 인간의 본성과 실존에 관한 법어 같은 느낌을 준다. 영어 원문은 더 법어 같다. 짧은 글이어서 영어로 기억하는 게 작가의 통찰을 포착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We are all born mad. Some remain so.”

이 간결한 원문에 <고도를 기다리며>의 주제와 베케트 사상의 고갱이가 모두 담겼다. 베케트는 실존주의 철학에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작품에서 이 주제가 반복된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인간 존재의 무의미와 허무를 다룬다. 고도를 기다리는 인간은 의미를 찾는 존재이자 끊임없이 기다리면서 기다림을 그만두지 못하는 존재다. 누구를, 무엇을 기다리는지 모르지만, 기다림은 아무런 결실을 보지 못한다. 과정을 뺀다면 허무하고 무의미할 뿐이다.

첫 문장 “우리는 모두 미치광이로 태어난다”는 번역문의 성격상 영어 구문이 주는 함의를 충분히 담지 못한다. 번역어 ‘미치광이’는 태어날 때부터 어떤 목적이나 방향성 없이, 근본적으로 혼란과 불합리 속에서 존재한다는 뜻이지만 동시에 현재형으로 우리가 모두 미친(mad) 존재임을 시사한다. 인간 삶의 설명불가능성을 ‘미친’으로 표현했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실존주의의 유명한 명제는 베케트에서 유효하다. 보기에 따라 인간이 모두 자유롭지만, 그 자유는 미친 선택의 자유에 불과하다. 실존주의에서 인간은 세계에 던져진 존재로 정의된다. 베케트의 표현으로는 미치광이로 태어난다고 할 수 있다. 불가해한 세계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상황에 부닥친다. 그러한 상황의 심리를 불안으로 표현해도 좋다. 자유, 정확하게 미친 선택의 자유와 불안은 동전의 앞뒷면이다.

인용문의 두 번째 문장 “Some remain so”는 폐부를 찌르는 칼날이다. “그중에는 끝내 미치광이로 끝나는 자들도 있고”와 따지고 들면 많은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중에 있다”는 정도의 판단이 아니라, 우선 “Some”이 제시된다. 일부가 아니라 또 전체가 아니라 적지 않은 상당수가 그 범주에 든다. “Some”의 뉘앙스는 그렇게(so) 머무는 게 보편성을 띤다고 에둘러 얘기한다.

미치광이(mad)와 그 상태(so)는 다르다. 미치광이로 태어나는 건 피할 수 없지만 그 상태에서 벗어나는 건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 상태에 머물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따라서 두 문장 사이에 한 문장이 숨겨져 있다. “그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이란 가정문 혹은 조건문이 은닉돼 있다.

곤충의 용어를 써서 의미 그대로 탈피의 노력을 하지 않고 남게 되는 그 상태(so)는 사실 미치광이가 아니라 미치광이로 태어난 상태이다. 인간이 모두 미치광이로 태어난다면 미치광이는 미치광이가 아니라 정상이다. 미치광이가 아닌 이가 비정상이다. 베케트가 이 문장에서 하려는 말은 실존주의 주장대로 던져진 존재인 인간이 그 던져짐에 아무런 의문을 품지 않고 그 상태로 머무르면 실존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의문을 품는다고 답이 있지는 않다. <고도를 기다리며>가 웅변하듯, 의문은 답이 없다는 걸 알면서 답을 기다리는 행위다. 삶의 목적은 찾아지지 않고 무의미한 기다림과 헛된 기대 속에 고뇌만이 뚜렷이 지각된다. 이게 실존이다. 실존이 감미롭고 행복한 것이면 좋겠지만, 천만에, 그건 쓰디쓰다.

베케트의 생각은 알베르 카뮈의 부조리 철학과 맞닿는다. 인간은 삶에 의미를 부여하려 하지만, 세계는 침묵한다. ‘부조리의 감정(Le sentiment de l'absurde)’은 세계의 불합리한 침묵 앞에서 절절한 호소를 그치지 않은 인간이 끝내 깨지지 않은 침묵에 느끼는 감정이다. <고도를 기다리며>에서는 기다림으로, 까뮈의 <시지포스 신화>에서는 언덕으로 바위를 밀어올리는 행위로 형상화한다.

그렇게 남은(remain so) 자들은 부조리한 삶 속에서 자기 인식이 없고 자신이 처한 무의미한 상황을 극복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삶의 부조리함에 갇혀 그 안에서 끝없이 반복되는 비참을 살아가는 정상적 미치광이로, 그들에겐 반성과 반항이 없다.

한데 허망한 게 그렇게 남지(remain so) 않을 대안이 없다는 점이다. 인간의 실존은 명확한 의미나 해결책을 찾을 수 없는 불확실한 것이다. 고도를 기다리지만, 고도는 절대로 나타나지 않으며 알고 보니 왜 고도를 기다리는지도 모른다. 인용문은 인간이 처음부터 미치광이로 태어났지만, 그 미치광이 상태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언제나 존재하며, 그것은 각자가 삶에서 어떻게 의미를 찾고 행동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끝내 미치광이로 남는 자들은 비겁자이다.

과연 그럴까. ‘Some’이란 표현은 미치광이로 남는 것에서 벗어나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완곡한 또는 수사적 어휘 선택이다. 실존주의는 삶의 무의미에 의미를 부여했을 뿐 삶의 의미를 찾아내지는 못한다. 삶의 의미 자체가 아니라 삶의 의미를 찾는 과정에 의미를 둘 수밖에 없다는 궁여지책이 마침내 모든 실존주의의 귀착점이다.

반성은 왜 허무로 귀결했을까. 실존을 본질에 앞서는 것으로 주장함으로써 실존주의자들이 본질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실존과 본질 사이에는 비교가능성이 없다. 각자의 길에서 삶을 꾸려나갈 힘을 얻는 정도이다. 답이 없는 게 답이라는 식으로 선문답하는 이는 미치광이보다 더 비겁자이다. 답이 없지만 문제는 있다. 이 정도면 비겁을 피할까.

베케트가 남긴 다음의 명언은, 답이란 게 없으니 이렇든 저렇든 큰 상관은 없겠지만, 인용문보다 실천적이다.

“도전 했는가? 실패했는가? 괜찮다. 다시 시도하라. 다시 실패하라. 더 나은 실패를 하라.”

마찬가지로 영어로 보면 더 간결하다.

“Ever tried. Ever failed. No matter. Try again. Fail again. Fail better.”

인용한 두 문장은 모두 삶의 부조리와 불합리를 인정하고, 그 속에서 인간의 행동과 선택이 반복적이고 실패할지라도 멈추지 않는 과정을 지속할 것을 강조한다. 실존적 투쟁에서 최선은 결국 “더 나은 실패”라는 얘기이다. 1969년 노벨문학상 수상.

▲Still life with bread (1936) Zygmunt Waliszewski (Polish, 1897-1936)

[안치용 인문학자, ESG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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