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출은 0인데 시가총액은 8650조…역대급 사기로 ‘살인마’라 불렸던 남자의 수법은 [히코노미]

강영운 기자(penkang@mk.co.kr) 2024. 9. 21.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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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코노미-5] 도박과 여자. 그의 인생에 유이(有二)한 낙이었습니다. 매일 밤 그가 향한 곳은 일확천금의 꿈으로 가득한 도박장. 한탕 크게 당겨서 큰 부자로 살아보겠다는 사내들의 어리석은 꿈으로 가득한 곳. 20살이 갓 넘은 청년은 이곳에서 자산을 탕진하고 있었습니다. 푼돈이라도 손에 쥔 날이면 여자에게 달려가곤 했습니다.

닳고 닳은 그에게 일말의 순애보가 남아있었는지. 그가 미치도록 갖고 싶어하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모든 귀족이 탐낼 정도로 미인이었던 탓에 라이벌도 많았지요. 꿈에 그리던 그 여인이 다른 남자의 추파를 받는 것을 보았을 때, 혈기를 끝내 참지 못하고 그 사내를 죽여버리고 말았습니다.

“고도리 들었네 .” 카라바조 ‘카드 샤프’ 1594년 작품. 기사 내용과 관계 없음.
이제 그에게는 노름꾼, 난봉꾼, 협잡꾼이라는 멸칭에 살인자라는 오명까지 덧대어집니다. 18세기 스코틀랜드 경제학자 ‘존 로’의 이야기입니다.

‘살인자’ 존 로의 영광은 역설적으로 이때부터 시작됩니다. 프랑스로 도주한 그가 재정 총감으로서 경제의 혁신을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가치로 환산했을 때 엔비디아와 애플을 합한 회사도 만들어 냈습니다(물론 거품이었지만). 오늘날 화폐 금융 시스템을 처음 상상한 것이 존 로였습니다. 한 살인자가 불러온 혁신을 사색하는 시간입니다.

귀족 난봉꾼 존 로
“돈을 배워야 한다.”

날 때부터 난봉꾼은 아니었습니다. 존 로는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의 번듯한 은행 가문 자제로 1671년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윌리엄 로는 금세공사이자 은행가. 돈에 눈이 밝았던 덕분에 젊은 나이에 이미 큰 부를 이룬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아들 존 로가 자신처럼 훌륭한 은행가가 되기를 바랐지요. 수학과 회계학을 꾸준히 공부시킨 배경이었습니다.

“경제가 제일 쉬웠어요.” 존 로 초상화.
존 로는 명석한 아이였습니다. 아주 복잡한 계산도 척척 해낼 정도로 두뇌가 총명했지요. 다니던 학교에서도 단연 주목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신은 대개 명석한 이에게 훌륭한 성품을 내리지 않습니다. 존 로가 그랬습니다. 그의 품행은 유달리 방정맞았습니다. 거칠게 놀기 좋아하고, 여자에게 집착하는.

아버지라는 이름은 그를 바로잡는 마지막 울타리였습니다. 에딘버러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그는 은행업을 배우면서 가업을 이어갑니다. 사내로서 이제 제 몫을 다할 무렵 아버지 윌리엄 로가 눈을 감았습니다. 존 로의 나이 고작 18살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부재로 방탕한 삶에 빠지다
“오늘도 죽도록 놀겠어.”

가업을 물려받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습니다. 사업을 통해 들어오는 큰돈을 존 로는 운용할 줄 몰랐습니다. 아버지에 의해 제어되던 방탕한 품성에 고삐가 풀린 것이었습니다. 술을 먹고, 도박하고, 여자를 만나는 삶에 빠져든 것이었지요.

그의 성(Law)과 다르게 Unlaw(불법)에 가까운 인물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영국 런던에서 방탕한 삶을 살다가 왕의 정부 ‘엘리자베스 빌리어스’에게 반해 살인까지 저지릅니다. 스코틀랜드의 번듯한 귀족 도련님에서 살인마로 추락하게 된 셈입니다.

“이거 따면 나랑 사귀는 거다.” 텐트 아래의 도박꾼과 창녀. 코르넬리스 드 보스의 작품. 기사 내용과 관계 없음.
그에게 내려진 건 사형이었습니다. 존 로는 자신의 운명을 거스를 줄 아는 사내였습니다. 이번에도 그가 좋아하는 ‘도박’을 감행합니다. 뉴게이트 교도소에서 탈옥에 성공합니다. 그는 그 길로 암스테르담으로 도주합니다. 무역과 금융의 수도였습니다.

‘은행가’로서의 기질은 이때부터 꽃 피우기 시작합니다. 물산과 돈이 활기차게 도는 도시 암스테르담에서 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몸소 체험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은행의 힘을 느낀 존 로
“은행이 강국을 만든다.”

가업에 대한 피가 다시 끓기 시작합니다. 암스테르담에서 은행의 역할을 보면서였습니다. 시 정부가 설립한 암스테르담 은행은 경제 순환의 마중물 역할을 자임합니다.

특히 그가 주목한 건 네덜란드 상인들이 활용하는 ‘환어음’이었습니다. 다른 나라 상인들이 무겁고 보관이 어려운 금화나 은화로 거래를 하는 반면, 네덜란드의 상인들은 ‘환어음’ 종이를 들고 간편하게 물건을 교환합니다. 경제적으로 튼실하고 안정적인 은행이 지급을 보증하는 시스템이었지요.

“이곳이 유럽의 경제 도시 암스테르담이다.” 17세기 후반 암스테르담 담 광장. 존 로는 이 시기 즈음 이곳에서 은행의 힘을 체감했다.
애써 무거운 금화를 배로 옮기지 않아도 됐습니다. 금화가 차지하는 자리에 물건을 하나라도 더 실을 수 있게된 셈입니다. 금화의 제한된 수량 탓에 거래를 하고 싶어도 못하는 상인들에게 환어음장과 같은 종이 지폐는 천군만마와 같았습니다. 금융이 실물 경제의 피와 살이 되고 있던 것이지요. 현대인에게 신용카드와 같은 결제 혁신이, 중세 네덜란드에서도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네덜란드의 무역은 더욱 활발해지고, 국부는 늘어납니다. 조그만 크기의 네덜란드를 강국 프랑스마저 무시할 수 없게 된 배경입니다. 프랑스와의 전쟁에서도 기어이 승리를 쟁취하는 네덜란드를 보며 존 로는 깨닫습니다. “금융은 한 나라를 강국으로 만든다.”

암스테르담 운하. 무역과 금융의 중심지로 성장하고 있었다.
이때부터였습니다. 존 로가 ‘신뢰 기반의 지폐(Fiat Money)’를 구상하기 시작한 건. 파리, 베니스, 제네바 등 힘 깨나 쓰는 도시를 방문하면서 그는 자신의 경제 이론을 완성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베니스에서도 암스테르담처럼 상인들이 종이로 거래를 하고 있는 모습을 목격합니다.

이 역시 신뢰있는 은행들이 중간에 지급을 보증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존 로는 이제 상상하기 시작합니다. “무역에서 사용되는 신용기반 지폐를 전 국가 차원에서 사용한다면, 그 국가의 부는 크게 늘어날 거야.” 유럽 화폐혁신의 불꽃이 존 로의 마음속에 촛불처럼 옮겨 붙습니다.

“신용이 경제의 전부입니다.” 존 로가 직접 쓴 경제 정책 제안서. 1934년 개정판.
풍운아 존 로 프랑스에서 길을 찾다
“자 나의 이론을 실현할 국가를 찾을 시간이다.”

경제 이론으로 무장한 존 로는 야심이 넘쳤습니다. 시칠리아 왕국과 사보이 공작에게 찾아가 자신의 말대로 경제를 이끌어 볼 것을 권했습니다. 당연히 돌아온 대답은 거절. 평판이 망가질 대로 망가진 귀족 자제의 말을 믿을 리 없었지요.

존 로는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는 프랑스로 향하는 배에 올라 탑니다. 어렵사리 루이 15세와 어린 왕을 보필하는 섭정 필립 오를레앙을 만납니다. 존 로를 면박할 것이란 모두의 예상과는 달리. 그는 큰 환대를 받았습니다.

“우리 프랑스를 살릴 비결을 알고 있다고?” 왕위에 오른 루이 15세. 그는 증조 할아버지루이 14세가 남긴 막대한 빚을 해결해야할 상황에 놓였다.
프랑스 왕실이 존 로를 반긴 이유가 있었습니다. 프랑스의 경제가 급격하게 무너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히코노미 4화 참고). 베르사유 궁 확장, 이웃나라와의 전쟁으로 루이 14세는 프랑스에 막대한 빚을 남겨 놨습니다. 1715년 나라 빚은 무려 20억 리브르(당시 화폐 단위)에 달했습니다. 이자만 해도 한해에 8000만 리브르나 됐습니다. 1년 국고 수입은 6900만 리브르.

가만히 있어도 매년 원금이 늘어나는 절체절명의 순간. 프랑스는 ’파산‘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때, “모든 빚을 갚을 수 있다”며 홀연히 나타난 운명적 사나이. 난봉꾼, 살인마로 불렸던 남자. 존 로였습니다.

“폐하, 사치를 부리고도 살 수 있는 길이 분명히 있습니다.” 존 로를 묘사한 삽화.
국가라는 이름의 지폐
“프랑스라는 이름의 신뢰를 활용해 지폐를 발행해야 합니다.”

존 로는 프랑스 경제 개혁의 선봉이 되었습니다. 그의 최우선 과제는 국가의 빚 청산이었습니다. 존 로의 ’첫 번째 화살‘은 은행이었습니다. 은행이 종이 지폐 발행을 늘려 경제를 활성화하자는 복안. 그동안 프랑스 경제는 금화·은화와 같은 무거운 화폐에 의존해 유동성 부족으로 경제가 원활히 돌아가지 않았다고 존 로는 분석합니다.

사용이 용이한 종이돈을 사용하면 그만큼 많은 경제 활동이 일어나고, 이는 세입의 증가로 이어진다는 구상이었지요. 지폐를 은행에 제출하면 언제든 은화로 교환되었기에 상인들은 안심하고 지폐를 활용한다는 설명도 덧붙입니다. 암스테르담에서 보던 모델을 국가 차원으로 확대한 것이었지요. 프랑스의 첫 은행 ‘방크 제네랄’의 출범이었습니다.

존 로가 설립한 은행 본부를 묘사한 1868년 그림.
‘존 로’의 체제는 완벽하게 안착하는 듯 보였습니다. 그가 프랑스에 도착한 지 1년 만에 국내 사업자 수는 60%나 늘었습니다. 프랑스 깃발을 단 무역함도 16척에서 300척으로 증가합니다. 방크 제네랄이 발행한 지폐가 무역의 문턱을 낮춘 덕분입니다.

방크 제네랄의 효과를 톡톡히 본 왕실은 은행을 인수하며 직접 운영에 나섭니다. ‘방크 로얄’로의 승격이었습니다. 프랑스 왕실은 더욱더 많은 사람들에게 은행권 지폐를 사용하라고 독려합니다. 존 로의 구상대로 프랑스는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1720년 프랑스의 새로운 재무총감이 임명됩니다. 존 로였습니다. 우리로 치면 나라 살림을 도맡은 기획재정부 장관. 방탕한 살인마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경제의 신’ 존 로만이 프랑스의 영광을 구현하고 있었습니다.

1720년 방크 로얄이 발행한 10리브르 지폐.
존 로의 두 번째 화살 ‘미시시피 회사’
“프랑스의 부를 위한 회사가 필요하다.”

‘두 번째 화살’도 곧바로 발표됩니다. 국부를 실질적으로 늘리기 위한 사업 구상안입니다. 미국의 미시시피강 인근 루이지애나 무역을 독점하는 국유회사를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름도 유명한 ‘미시시피 회사’였습니다.

“이곳이 프랑스를 부유하게 만들 지역인가.” 미국 미시시피강에서 원주민을 만난 프랑스 탐험대.
무역으로 벌어들인 돈을 부채 상환에 활용하자는 원대한 계획. ‘위대한 콜베르’가 이끌던 부국 프랑스로 만들자는 포부였지요. 은행(방크 로얄)-상업(미시시피 회사)-국가재정(프랑스왕실)이라는 삼각편대의 시너지를 노린 것입니다. 시민들은 점점 성장하는 프랑스와 미시시피 회사에 배팅하려는 열망에 휩싸입니다.

존 로는 여기서 또 하나의 획기적인 생각을 실행에 옮깁니다. 미시시피 회사 주식을 정부 채권으로만 살 수 있게 하는 방안이었습니다. 프랑스 왕실의 ‘빚’을 유망한 회사 주식으로 탈바꿈 시키는 전략입니다. 미시시피 회사의 장밋빛 미래를 의심하지 않았던 채권자들은 주식을 사는 데 선뜻 동의합니다.

“경제는 내 말만 들으면 된다네.” 재무 총감이 된 존 로.
프랑스 왕실로서는 빚도 갚고, 미시시피 회사 투자자도 모으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누린 셈입니다. 조금 뒤에는 뱅크 로얄이 발행한 은행 지폐로만 구매가 가능하도록 바꿨습니다. 지폐 사용이 늘어날수록 경제에 긍정적인 효과가 클 것이란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프랑스 시민들은 의심의 여지 없이 원했습니다. 더 많은 미시시피 주식을, 더 많은 프랑스의 지폐를. 귀족과 시민. 계급을 가리지 않고 이들은 모두 앞다퉈 미시시피 회사의 주주가 되었습니다. 프랑스는 곧 미시시피 회사라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존 로는 프랑스의 귀인이로다.” 존 로를 신뢰해 총 재무 책임자로 임명한 루이15세.
주식 광풍이 불다
“루이지애나에서 엄청난 금광이 터졌소.”

파리 시내는 흥분과 아드레날린으로 가득합니다. 미시시피 주식회사가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대박을 터뜨렸다는 소식을 들은 뒤였습니다. 모든 주주가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이제 자신들은 부자가 됐다고, 프랑스는 영원한 부국이 될 것이라고.

“엔비디아, 아니 미시시피 주식 샀어?” 프랑스 베르살 예배당 인근을 묘사한 그림.
광풍에 가까운 투기였습니다. 1년 사이에 주식 가격은 16배나 뛰었습니다. 국가 통치자가 밀어주는 사업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시골 촌부마저 미시시피 회사 주식을 사기 위해 파리로 올라왔을 정도였습니다. 그 당시 시가 총액을 오늘날 현금가치로 계산하면 6조 5000억 달러에 달한다는 분석도 있습니다(엔비디아와 애플을 합친 수준입니다. 얼마나 거품이 끼었는지를 증명하는 셈).

프랑스 왕실이 발행한 지폐는 엄청난 물가상승(인플레이션)이라는 부작용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프랑스 시민들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물가상승을 뛰어넘는 황금 ‘미시시피 회사 주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국가에 요구합니다. “더 많은 은행 지폐를 발행하라. 우리가 미시시피 주식을 살 수 있게.”

존 로가 지폐를 뿌리는 모습을 풍자한 독일의 동전.
거짓이 프랑스를 뒤엎었을 때, 진실 역시 대서양을 건너고 있었습니다. 미시시피 회사의 실적이 전무하다는 불편한 진실이었습니다. 장밋빛 미래는 모래성처럼 무너집니다. 모든 시민들이 미시시피 주식을 던졌습니다. 황금으로 여겨지던 주식은 어느덧 종이 쪼가리가 되어버렸습니다.

은행에는 지폐를 들고 은화 교환을 요구하는 시민으로 가득했고, 존 로를 잡아 죽이자는 분노의 사자후가 터져 나왔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은행권의 남발로 야기된 고물가, 주식 폭락으로 가난에 빠져버린 시민들, 금융에 대한 불신이었습니다.

“존버같은 소리하네. 이제 청산의 시간이다.” 미시시피 회사 버블을 풍자한 삽화.
다시 협잡꾼으로 전락한 존로
“저는 프랑스를 떠납니다.”

존 로의 말로는 비참했습니다. 프랑스를 조용히 탈출해 이탈리아 베니스에 정착합니다. 그가 경제를 배우고, 도박에 빠진 그곳이었습니다. 다시 돌아온 존 로는 다시 도박에 손을 댑니다. 협잡꾼에서 경제의 신으로, 또다시 협잡꾼으로. 1729년 그가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프랑스는 다시 격변에 빠져듭니다. ‘방크’라는 이름은 금기였습니다. 주식회사 설립은 무려 150년 동안이나 금지됩니다. 금융과 산업을 경시한 프랑스는 무너지고, 유럽의 헤게모니는 영국으로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루이14세의 말년처럼, 루이15세의 프랑스는 다시 과대 채무국으로 전락합니다. 후임 루이16세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경제를 엉망으로 만든 군주는 이렇게 된다.” 루이16세의 처형.
오늘날의 눈으로 존 로의 실패 원인은 명확합니다. 실물 경제에 기반하지 않은 과도한 화폐 발행은 극심한 물가상승을 초래함을 그는 몰랐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혁신성은 오늘날까지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신용’에 기반한 화폐 시스템이 경제를 혁신한다는 구상은 오늘날 현대 금융제도의 기반이 됐기 때문입니다. 존 로와 달리 오늘날 중앙은행은 그 어떤 정치세력으로부터 독립돼 운영됩니다. 그의 실패에서 교정해 더욱 정교한 프로그램을 구현한 것이지요.

민주주의가 민중의 피를 먹고 자라듯, 경제는 시민의 욕망과 부를 먹이삼아 성장합니다. 협잡꾼이자, 살인마, 그리고 위대한 경제 실험자였던 존 로가 남긴 교훈입니다.

존 로는 실패한 경제학자이지만, 그의 유산은 현대에도 살아남았다.
<네줄요약>

ㅇ루이14세가 남긴 빚으로 허덕이고 있던 프랑스를 구원해주기 위해 등장한 남자가 스코틀랜드 도박꾼 ’존 로‘였다.

ㅇ국가가 은행을 만들어 지폐 발행을 늘리고, 무역 회사를 독점하면 부를 늘릴 수 있다는 구상이었다.

ㅇ이 모든 계획이 ’미시시피 회사‘ 거품 붕괴로 실패하면서 프랑스는 금융을 금기하기 시작했다.

ㅇ그럼에도 신뢰 기반 지폐를 상상한 그의 구상은 오늘날 현대 금융제도에 녹아 있다.

<참고문헌>

ㅇ윤은주, 18세기 초 프랑스의 재정위기와 로 체제, 프랑스사 연구 16호

‘경제’는 맛보기에 어려운 식재료입니다. 채권, 이자, 화폐라는 단어만 들어도 쓴맛이 올라옵니다. 맛있게 즐기려면 ‘역사’라는 양념이 필요합니다. 히스토리와 경제를 결합한 연재물 ‘히코노미’는 먹음직한 요리를 내는 걸 목표로 합니다. 격주로 여러분의 경제 근육을 키워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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