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질 위기’ 전통 공예에 실용성과 현대적 미감 곁들여 [ESC]
비움과 채움의 미학, 말총 작품
‘바대’로 몬드리안의 점선면처럼
누비 이불 대신 무릎담요로 제작
멸종 위기 동식물이 있는 것처럼 사라질 위기에 처한 전통 공예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백두대간을 호령하며 오랫동안 이 땅의 사람들의 삶과 함께했던 호랑이가 자취를 감췄듯이, 오랜 시간 손에서 손으로 대를 이어온 공예 장인들이 사라질 수 있다는 말이다. 만드는 이가 없다면 그들이 빚어온 공예품도 가까운 미래에는 박물관 속 유물이 될 처지다.
사라진다는 것은 퍽 쓸쓸하다. 그래서 멸종 위기나 전승 위기라는 말에 한 번 더 귀기울이고 들여다보게 된다. 손놓고 있기보다 관심을 보탠다면 사라지는 시기를 조금이라도 늦추거나 어쩌면 개체를 늘리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진심 어린 마음으로 말이다. 그렇게 관심을 보태고 응원하는 마음으로 최근에 본 전시가 있다.
거의 사장된 기법으로 조형 개척
서울 중구 덕수궁 돈덕전과 덕흥전에서 열린 ‘시간을 잇는 손길’전인데 국가무형유산 중에서도 단절 위기에 처한 전승 취약 종목을 지원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전통 공예 기술로 선정된 20종목, 29명의 국가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기 만든 80여 점의 작품이 작년에 복원해 개관한 돈덕전에 자리를 잡았다. 한산 모시짜기의 방연옥, 매듭장 정봉섭, 소목 가구에 쓰이는 장석을 만드는 두석장 김극천, 부채를 제작하는 선자장 김동식, 전통 나침반을 만드는 윤도장 김희수, 쇠뿔을 얇게 펴서 채색 그림을 그려 가구나 소품에 장식하는 화석장 이재만 등 평소에 보기 힘든 전통 공예품의 정수를 한 자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전시 기간이 9월22일까지라 곧 끝나지만 이 귀한 전시에 한 명이라도 더 방문해 응원의 마음을 보탤 수 있기를 바란다.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된 공예 장인의 경우 전통 기법을 보존하고 계승해야 하기 때문에 원형을 보여주는 작품이 대부분이다. 전통 공예를 이어가는 감사한 제도이고, 보유자와 이수자와 교육생 등이 애쓴 덕분에 비록 전승 취약 종목일지라도 여전히 우리 곁에서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있다.
더불어 전통 공예가 전통으로만 머무르지 않고 지금의 우리 생활에서도 자연스럽게 사용될 수 있도록 궁리하고 디자인해 선보이는 장인과 작가가 있다. 전통 갓과 망건 등을 만드는 소재인 말총(말갈기나 꼬리의 털)으로 갓이 아닌 다채로운 작품을 만드는 정다혜 작가를 가장 먼저 손꼽고 싶다. 사장되다시피한 조선시대 말총 공예 기법으로 자신만의 조형을 개척한 점이 놀랍다. 꾸준히 연구하고 하루하루 촘촘하고 성실하게 엮어가며 고대 빗살무늬토기의 형태를 빚은 작품인 ‘성실의 시간’은 지난 2022년 세계적으로 권위있는 로에베 공예상의 한국인 최초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 작품의 가운데에 띠 부분으로 새긴 무늬는 조선 중기 유물인 사방관(망건 위에 쓰는 네모 모양의 관)에서 가져와 공예의 역사적 맥락을 이었다. 가는 말총을 바늘로 오랜 시간 엮어 입체를 빚는 수행 같은 작업과 500년 동안 우리 곁에서 머물렀던 독창적인 말총 소재라는 점이 높은 관심을 받았다.
정다혜 작가의 말총 작품은 짜임 자체도 아름답지만 빛이 투과해 만든 그림자 또한 작품의 일부인 듯 섬세한 감동을 자아낸다. 손으로 숨결을 불어넣어 가볍게 비워져 있지만 조선으로부터 500년을 이어온 시간과 작가의 정진하는 시간으로 채워진 비움과 채움의 미학이 결합한 작품이다.
아름다움을 넘어 뭉클함
한복을 짓는 침선장 전수교육을 받은 김영은 작가는 한복에서 ‘바대’라는 요소에 주목해 이를 응용한 가방, 가리개 등의 작업으로 확장하는 작품을 선보인다. ‘바대’는 움직임이 많아서 해지기 쉬운 겨드랑이, 어깨, 고름뒷부분에 덧대는 천 조각을 말한다. 여름용 저고리인 적삼 같이 얇은 홑겹 한복에서는 빼놓지 않고 사용했던 전통 기법으로 바대 덕분에 옷은 손상이 줄고 중첩되는 조각이 장식 효과도 더한다.
이 바대를 한복으로부터 분리해 새로운 쓰임을 부여한 작업은 마치 몬드리안의 점과 선, 면으로 표현한 구성 작품처럼 모던하고 단순한 기하학적 순수함을 느낄 수 있다. 실크의 종류이자 얇아서 비치는 소재인 노방주를 주로 사용해 같은 색을 겹쳤을 때는 선명해지고 다른 색은 오묘하게 섞이는 조화와 대조의 표현이 회화적으로 펼쳐진다. 우리 전통 직물이라 익숙한 질감에 색 조합과 기하학의 구성은 그래픽에 가깝다. 이는 김영은 작가가 회화 작업과 네덜란드 에인트호번 디자인 아카데미에서 유학한 경험이 스몄기 때문이다. 디자이너를 꿈꾸던 유학 시절 오히려 한국 문화의 뿌리와 정체성을 탐구해야 함을 깨달은 그는 침선의 길을 잇기로 했다. 한국전통공예건축학교에서 국내 유일의 국가무형유산 침선장 기능보유자 구혜자 선생에게 한복을 배워오고 있으며 한복에 깃든 우리만의 솜씨와 아름다움을 소개하기 위한 길을 모색해 나가고 있다.
우리나라 전통 패딩이라고 할 수 있는 누비도 국가무형유산 제107호로 지정해 전통 공예로서의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두 겹의 옷감 사이에 솜을 넣고 줄을 지어 바느질해 보온성과 내구성을 높이는 작업인 누비의 맥을 현대적으로 이끌고 있는 김은주 작가는 한복을 짓다가 2002년 김해자 누비장 기능보유자의 제자가 되었다. 20여 년이 넘도록 누비의 길을 성실하게 걸으며 전통 기법과 현대적 미감이 어우러지는 작품을 통해 누비와 우리 생활을 연결하기 위해 ‘온누비’라는 브랜드도 만들었다. 특히 예전에는 대표적인 혼수 품목이었으나 이제는 찾기 어려운 누비 이불을 대신해 무릎담요로 제작한 ‘온:블랭킷'으로 누비의 따스함을 전한다. 김재경 디자이너와 협업해 저고리의 곁마기와 배래의 곡선을 표현한 문양을 새겨 한국적 그래픽을 구현한 점도 곱고 친근하다.
전통 공예에 현대의 미의식을 곁들여 이 땅의 공예가 사라지지 않도록 부단히 애쓰고 있는 공예가들의 작품에는 평생을 바쳐 몸으로 익힌 기술과 손으로 써 내려간 사유까지 깃들어 있다. 그들의 작품에서 아름다움을 넘어 뭉클함이 밀려오는 까닭은 이 때문이다.
박효성 리빙 칼럼니스트
잡지를 만들다가 공예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우리 공예가 가깝게 쓰이고 아름다운 일상으로 가꿔주길 바라고 욕망한다.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명성도 크기도 ‘왕’…푸바오 인기 넘보는 호주 펭귄 ‘페스토’
- ‘200㎜ 폭우’ 부산서 대형 땅꺼짐…트럭 2대 빠져
- 15살이 쏜 총에 같은 학교 14살 사망…태국 또 총기 사고
- 나를 살리고 불행의 연막에서 건져내준, 풋살 [ESC]
- ‘또 하나의 달’ 생긴다…소행성, 두 달 동안 지구 돌다 떠나
- “36년 봉사에 고발·가압류?…지자체 무책임에 분노”
- 야탑역 이어 강남 대치동서 ‘흉기 난동’ 예고…경찰, 주변 순찰 강화
- 윤 ‘체코 원전 수주’ 장담했지만…‘지재권’ 걸림돌 못 치운 듯
- ‘사라질 위기’ 전통 공예에 실용성과 현대적 미감 곁들여 [ESC]
- 이스라엘의 저강도 장기전, 갈수록 꼬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