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살리고 불행의 연막에서 건져내준, 풋살 [ESC]
아빠 암투병 도우면서도 계속해
축구광 아빠 모습 내 안에 남아
지친 몸과 마음 피할 곳 있어 소중
풋살을 주제로 글을 쓰기 시작한지 만 2년이 되었다. 더 많은 사람, 정확히는 더 많은 여성들이 풋살의 즐거움을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에 누구도 내게 요구한 적 없는 사명감을 어깨에 둘러매고 허우적댄 것도 여러번이다. ‘풋살’과 ‘풋살하는 여성’으로서의 이야기, 이제는 그야말로 ‘생활체육인’이 되어버린 나의 풋살 인생 곳곳의 장면들을 나눠왔는데 오늘은 그동안 한 적 없는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이 풋살 칼럼을 쓰기 시작한 2022년 8월은 나에게 꽤나 절망적인 시기였다. 다섯달 앞서 아빠가 암을 선고받았기 때문이다. ‘암’이라는 존재는 그 단어부터 사람을 압도하는 힘이 있다. 온갖 드라마 속 주인공들이 겪는 불행의 클리셰이자, 평범한 주변인들의 이야기 속에서조차 죽음과 가장 가까운 질병이라서일까. 게다가 아빠의 암은 예후가 좋지 않은 암이었기에 우리 가족은 모두 애써 씩씩한 척했지만 저마다 아빠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싸우고 있었다.
뛰고 오면 역동하는 힘 느껴져
그때 마침 나는 회사를 그만둔 상태였다. 번아웃이 온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나를 새롭게 기르는 시기를 갖기로 마음 먹었다. 한껏 쉬고, 마음껏 하고 싶었던 것들을 하며 스스로를 돌봐주고 싶었다. 그렇게 나에게 걱정없이 천진한 생활을 선물하고 싶었는데 아빠가 암에 걸렸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산책하듯 살아갈 채비를 하던 차에 불행이 발목을 잡는 것만 같았다.
자꾸만 다가오는 불행의 손길을 떨쳐내기 위해 애쓰듯 새로운 병원을 찾아 예약하고 부모님을 모시고 바쁘게 병원을 다녔다. 입원을 하면 엄마가 아빠 곁을 지키는 주보호자가 되었지만 큰 여정의 키를 잡고 있는 건 나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엄마, 아빠의 똑부러진 딸이니 어떻게든 더듬더듬 정보를 찾아 어느 병원으로 갈 것인지, 어떤 의사를 만날 것인지, 수술은 어디서 받으면 좋을지 결정해야 했다. 가능한한 아빠가 가장 좋은 의사에게 가장 효과가 좋은 방식으로 치료받고, 최적의 시기에 수술을 받도록 하고 싶었다.
이리 저리 기웃거리며 아빠의 투병을 도우면서도 일상은 굴러가고 있었다. 프리랜서로 일을 하고 있었기에 미팅에 참석하고, 촬영 현장을 누비고, 모니터 앞에 앉아 밤새 편집을 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자주 주저앉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터지는 눈물에 대비해 바지 주머니나 가방에 휴지를 꼭 챙겨다녔다. 쏟아지는 눈물은 어쩔 도리가 없었고, 혼자 있는 시간엔 그 무게 때문인지 쉽게 무기력해졌다.
가볍게 일을 벌인다거나 훌쩍 떠나버린다거나 하는 일은 할 수 없게 되었지만 그 와중에도 절대 놓을 수 없었던 게 하나 있었다. 풋살이었다. 거실 소파에 누워 울다가도 팀 훈련이 있는 수요일 저녁이면 몸을 일으켰다. 아무생각 없이 땀흘리며 뛰고 오면 몸과 머리가 가벼워지고 내 안에 여전히 역동하는 힘이 있음이 느껴졌다.
그 해에는 풋살인생 첫 대회에 출전하기도 했다. 매 경기마다 잔뜩 긴장해 배를 움켜쥔 기억, 어설프지만 함께 만들어낸 골맛이 선명하다. 그 대회 이후로 풋살의 매력에 더 깊이 빠져버렸다. 철원으로 첫 원정길을 떠난 것도 같은 해였다. 한 여름 철원의 운동장 위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땀에 절은 유니폼을 입은 채 물놀이를 하고, 숙소에서 탱탱볼 하나로 진이 빠지도록 놀았던 기억. 함께한 추억이 너무나 행복해서 팀원들을 더 사랑하게 되었던 소중한 기억들, 풋살을 하지 않았더라면 만날 수 없었을 이 장면들이 나를 살게 했다.
정말로 그랬다. 매년 말일쯤이면 한 해를 돌아보며 회고를 하곤 하는데, 2022년을 회고하며 적은 세 줄 요약에 당당히 한 줄을 차지한 건 “나를 살린 건 역시 풋살”이라는 문장이었다. 한 해을 돌아보기 전엔 그저 아빠의 투병을 함께하느라 많은 것을 놓쳐버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나만의 삶을 살고 있었고, 나를 불행이라는 연막에서 건져내준 건 언제나 풋살이었다.
차 트렁크 속 아빠의 축구화 9켤레
아빠는 짧은 투병 끝에 2023년 6월에 돌아가셨다. 야속한 일이었다. 아빠를 살리지 못했다는 죄책감,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지 못했다는 아쉬움, 아빠를 향한 연민의 마음으로 내내 괴로웠다. 몇개월을 미루다 뒤늦게 아빠 차 트렁크를 정리하는데 수납함에서 무려 아홉켤레의 축구화가 나왔다. 나는 풋살화 한 켤레를 몇년째 신고 있는데…. 브랜드별로 가장 좋다고 평가받는 풋살화는 다 있었고, 해외 직구로만 살 수 있었던 풋살화까지 있었다. 한 켤레 한 켤레 어찌나 깔끔하게 관리했는지 모두 꺼내놓고 보니 피식 웃음이 났다. 일주일에 단 하루 뿐인 휴일에도 아침이면 빠짐없이 조기축구를 하러 나갔던, 밤 늦게까지 해외 축구를 챙겨보던 축구광 아빠다운 면모였다. 그러고보니 아빠를 살게 한 것도 축구였구나. 아빠에게도 일상의 도피처가 있었다는 사실이 다행으로 느껴졌다. 돌이켜보면 이 칼럼의 첫번째 글도 아빠에 대한 기억으로 채워져있다. “새까맣게 변한 발톱, 시퍼렇게 멍든 발목, 피딱지가 앉은 무릎. 어릴 적 아빠의 모습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들이다. 아빠는 축구광이었다. 휴일이면 운동장으로 향했다. 공을 차고 돌아온 아빠는 반짝반짝 빛이 났다.” 축구화를 신고 운동장을 누비는 빛나는 아빠의 모습이 내 안에 남았다.
우리 가족의 노력과는 상관없이 다가온 죽음 앞에, 몰려온 인생의 허무함에, 여전히 쉽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언제나 하고 싶은 것, 가보고 싶은 곳이 많았던 나인데 좀처럼 무엇도 의미있게 다가오지 않는다. 인생의 허무를 온몸으로 맞닥뜨리고 있는 이 시간 속에서도 그저 하고 있는 게 있다면, 역시 풋살이다. 며칠 전, 아무 것도 안 해도 풋살은 하고 있다는 내 말에 친구가 그런 말을 했다. ‘누구나 일상의 도피처를 가진 건 아니’라고. 잠시 몸과 마음을 피할 곳이 있다는 자체가 매우 소중한 일이라고 말이다.
풋살을 하면서, 풋살 칼럼을 쓰면서 자주 스스로에게 물었던 질문이 있다. ‘이게 도대체 뭐라고 이렇게까지 열심히 하는가?’ 나뿐만 아니라 대회만 끝나면 눈물 흘리고, 핏대 세우며 성토하는 우리들은 정말 이게 뭐라고 이렇게 열심인 것일까. 긴 시간 시원하게 답하지 못했던 그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은 ‘풋살이 자꾸만 나를 살렸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풋살이 아니어도 좋다.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힘든 하루, 반복되는 일상으로부터 나를 건져네주는 무언가가 있기를 바란다.
글·사진 장은선 콘텐츠 제작자
온라인 매체 ‘닷페이스’에서 사회적 이슈를 담은 쇼트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현재는 영상 제작사 ‘두마땐필름’을 운영한다. 3년 전 풋살을 시작한 뒤로 인스타그램 @futsallog에 풋살 성장기를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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