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남과 머묾의 자리 [주말을 여는 시]
윤성학 시인의 「당랑권 전성시대」
어디서나 생길 수밖에 없는 갈등
합合을 찾지 못하면 무너지는 세상
팽팽한 사물이 서로를 당기는 순간
매
매받이는 사냥을 나가기 한 달 전부터
가죽장갑을 낀 손등에 나를 앉히고
낯을 익혔다
먹이를 조금씩 줄이고
사냥의 전야
나는 주려, 눈이 사납다
그는 안다
알맞게 배가 고파야
꿩을 잡는다
배가 부르면
내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꿩을 잡을 수 있을 만큼의
날아 도망갈 수 없을 만큼의 힘
매받이는 안다
결국 돌아와야 하는 나의 운명과
돌아서지 못하게 하는 야성이 만나는
바로 그곳에서
꿩이 튀어오른다
마중물
참 어이없기도 해라
마중물, 마중물이라니요
물 한 바가지 부어서
열 길 물속
한 길 당신 속까지 마중 갔다가
함께 뒤섞이는 거래요
올라온 물과 섞이면
마중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텐데
그 한 바가지의 안타까움에까지
이름을 붙여주어야 했나요
철렁이기도 해라
참 어이없게도
윤성학, 「당랑권 전성시대」, 창비, 2006.
윤성학 시인의 「당랑권 전성시대」를 읽으면서 변증법적인 사고가 먼저 떠올랐다. 모순 또는 대립을 근본 원리로 하여 사물의 운동을 설명하려는 변증법은 정正ㆍ반反ㆍ합合 3단계를 거쳐 사물의 역사가 전개됨을 이야기한다.
윤성학 시인은 물론 이런 변증법적인 사고를 염두에 두고 시를 쓰진 않았을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그런 사고가 시에 스며들도록 했을 것이다. 우리는 인간관계에서 언제 어디서나 대립과 갈등을 경험하게 된다. 그런 대립과 갈등은 어느 한 지점에서 합合을 이루지 못하면 끝내 파국을 맞는다. 이런 세상의 이치를 윤성학 시인은 자연스럽게 깨닫고 시에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표출했다.
'매'에서 화자인 매와 매받이는 모두 떠남과 머묾의 자리를 인식한다. '배가 부르면' 매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매받이는 알고 있다. 그리고 너무 힘이 없으면 사냥을 아예 못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적당한 굶주림의 자리를 매에게 인식시키는 것이다. '꿩을 잡을 수 있을 만큼의/날아 도망갈 수 없을 만큼의 힘'만을 유지시키는 것을 통해 팽팽한 야생의 순간을 연출한다. 떠남과 머묾이 합쳐진 그 절묘한 순간을, 그 순간이 갖는 탁월한 실존 방식을 윤성학은 시로 잘 형상화했다.
이러한 합合의 순간은 다른 여러 개 시에서도 나타난다. 결혼 전 여자와 산행을 하며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쓴 '내외'에서는 숲속에서 방뇨를 하는 여자와의 적당한 거리를 이야기한다. '너무 멀지도/너무 가깝지도 않은 곳에 서서' 느끼는 합合의 감정은 보고 싶은 마음과 보여줄 수 없는 마음이 만나는 지점이다. '1㎝도 멀어지거나 가까워지지 않는/그 간극'이 윤성학 시인 말대로 '세상의 안팎이 시원하게 내통內通하기 적당한 거리'인 셈이다.
'마중물'에서의 당신과 화자의 관계는 "소멸=불멸"을 의미하는 관계다. 화자는 당신의 깊은 속까지 마중 나가는 마중물이다. 당신과의 만남은 행복하지만 그것은 자기희생을 나타내는 소멸의 길이다.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처럼 말이다. 부모는 자식을 마중 나오는 마중물과 같은 존재다. 자기희생을 통해, 자기 소멸을 통해 자식을 더 좋은 세상으로 이끈다.
그런데 그 희생과 소멸이 곧 영원한 사라짐을 의미하지 않는다. 마중물이 영원히 당신과 섞여버렸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부모의 피가 자식의 몸속에 영원히 꿈틀거리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것은 곧 소멸인 동시에 불멸인 것을 의미하고, 모두를 관통하는 합合의 출발점임을 의미한다.
윤성학은 대상과의 끊임없는 관계를 탐구하면서 갈등을 봉합할 수 있는 변증법적인 태도와 방식을 암시한 시를 창작했다. 그러한 탐구는 '뼈아픈 직립' '철근 옮기는 법' '완강한 독서' '2인극' '돌아온 외팔이2' '굳은살' '구두를 위한 삼단논법' '칸' 등에서도 나타나는데 비유적인 방식으로 관계의 태도나 관계의 역할, 대상과의 거리를 자연스럽게 제시한다.
'이 남자의 뒷물'에서도 그런 인식이 드러난다. 항문외과에 가서 치핵이 밖으로 삐져나오는 병명을 진단받고 그것을 치료하며 느낀 것을 적고 있다. 안에 있어야 할 것이 밖으로 나왔을 때 느끼는 고통은 한쪽이 다른 한쪽을 침범하는 관계에서 비롯된다. "안을 밖으로 밀어내고/밖을 안으로 끌어당길 때마다" 느끼는 쓰라림. 안과 밖을 소통시키는 구멍의 역할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을 부정하면서 생긴 고통이다.
모든 관계는 자연스러운 거리와 역할과 태도가 필요하다. 이것은 일종의 암묵적인 합合이자 상생의 방식이다. 삶에서의 내적 외적 갈등은 피치 못할 상황이다.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삶의 질은 달라진다. 자연스럽게 갈등 상황을 극복하는, 관계 설정을 원하는 독자들에게 윤성학 시인의 「당랑권 전성시대」는 의미 있는 시집으로 다가갈 것이다.
하린 시인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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