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절혐오, 이기적인 범죄…이 진흙탕 속 고결한 정신

한겨레 2024. 9. 21.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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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황진미의 TV 새로고침
백설공주에게 죽음을
문화방송 제공

폐쇄적 지역소도시 ‘무천’ 배경
주검 없는 살인사건 누명 쓰고
10년 복역 후 결백 증명 몸부림
법·원칙 무시 속 외부자가 낸 틈

‘백설공주에게 죽음을-블랙아웃’(문화방송)은 16부작 범죄 스릴러 드라마이다. 독일 작가 넬레 노이하우스의 베스트셀러 소설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을 각색한 작품인데, 전혀 어색하지 않게 한국적인 정서를 잘 녹여냈다. 영화감독으로 내공을 쌓은 변영주 감독의 연출이 돋보이고, 변요한, 고준, 권해효, 이가섭, 고보결 등의 연기가 빛을 뿜는다.

11년 전 두명의 여학생을 살해한 혐의로 10년간 복역하고 출소한 고정우(변요한)가 마주하는 마을의 묘한 긴장과 적대가 감도는 분위기나,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고정우를 통해 조금씩 사건의 윤곽이 드러나는 완급 조절이 탁월하다. 진실이 한꺼풀씩 벗겨질수록 드러나는 평범한 인간들의 추악함에 소름이 돋는다.

권력자 가족이 죽음에 연루되자…

문화방송 제공

드라마는 무천이라는 가상 도시를 배경으로 한다. 경기도 소도시란 설정인데, 수도권답지 않게 공과 사가 구분되지 않는 끈끈하고 폐쇄적인 느낌이다. 이를테면 영화 ‘이끼’에서 풍기던 답답한 공기가 느껴진다. 한 다리 건너 다 아는 사이인 오래된 연고 사회 말이다. 영화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이나 ‘도가니’에서도 보지 않았던가. 폐쇄적인 지역공동체에서 사건이 벌어지면, 공정한 법질서가 집행되기 어렵다.

11년 전 주검 없는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영화 ‘의뢰인’과 드라마 ‘괴물’에서 보았듯이, 주검 없는 살인사건은 굉장히 다루기 힘든 형사사건이다. 살인사건 수사에서 가장 중요한 증거는 주검이며, 수사는 보통 부검에서 시작한다. 설령 범인이 자백했더라도, 확실한 정황이 있어도, 명백한 증거 없이는 재판 결과가 언제든 뒤집힐 수 있다. 그래서 주검 없는 살인사건은 미제로 남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법원에서는 “시체가 발견되지 아니한 상황에서 범행 전체를 부인하는 피고인에 대하여 살인죄의 죄책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피해자의 사망 사실이 추가적·선결적으로 증명되어야 함은 물론, 그러한 피해자의 사망이 살해의사를 가진 피고인의 행위로 인한 것임이 합리적인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증명되어야 한다”고 판시한 바 있다(대법원 2008년 3월13일 선고, 2007도10754).

하지만 무천에서는 이러한 원칙이 무시되었다. 사건 즉시 피의자가 특정되었다. 피해자 심보영, 박다은과 친했던 고정우가 집에서 만취한 채 자다가 체포되었다. 모범생이자 인기남이었던 그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며 범행을 완강히 부인했다. 그러나 강압 수사가 이어지자 허위 자백을 하게 된다. 사건은 80일 만에 종결되어 검찰을 거쳐 재판까지 갔다. 당시 수사과장이 현구택(권해효)으로, 고정우 아버지의 친구다. 그는 모든 증거가 고정우를 가리키므로, 빠르게 혐의를 인정하고, 미성년자인 상태로 재판받는 것이 양형에 유리하다고 조언했다. 고정우의 부모는 유복했지만 아들이 체포될 당시 해외에 있어서 상황 파악이 늦었고, 이후 현구택의 조언을 전적으로 믿으면서 다른 법률적 조력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현구택이 고정우를 피의자로 확정하고 빠르게 사건을 종결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첫째는 자신의 아들 현건오가 심보영의 죽음에 연루되었기 때문이다. 둘째는 무천시 국회의원 예영실(배종옥)이 석달 안에 사건을 처리하면 승진을 시켜주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예영실의 남편 박형식이 박다은의 죽음에 연루된 탓이다.

법질서가 원칙대로 통하지 않는 폐쇄적인 지역사회에 외부에서 온 존재가 균열을 낸다. 광역수사대 출신의 엘리트 형사 노상철(고준)과 의대를 휴학하고 전국을 여행하다 마을에 머물고 있는 하설(김보라)이다. 이들은 마을 사람 다수가 연루된 11년 전 사건과 무관한 외부인으로, 진실을 밝히려는 고정우의 조력자가 된다.

질투받는 백설공주는 죽어야?

문화방송 제공

한꺼풀씩 벗겨지는 사건의 진상을 보노라면, 영화 ‘베스트셀러’(2010)가 떠오른다. 영화에서 마지막에 밝혀지는 비밀은 20여년 전 시골 마을에서 일어난 젊은 여성의 살인사건이다. 여자를 짝사랑하던 청년이 서울로 떠나겠다던 여자를 말리려고 친구들과 몰려가고, 시비 끝에 여자가 사망한다. 청년의 아버지는 파출소장인데, 아들과 친구들이 급히 도망치느라 제대로 감추지 못한 주검을 발견한다. 사실 그때까지 여자는 숨이 붙어 있었고, 파출소장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상태였다. 그러나 파출소장은 아들의 범죄가 드러날 것이 두려워 여자를 살해하고 주검을 유기한다. ‘마더’(2009) 개봉 다음해에 나온 영화라, 충격이 조금 상쇄된 느낌이었지만 개봉 당시에도 얼얼한 느낌이었다. 부모가 아들의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 살인과 주검 유기로 마무리한다는 서사가 확인되며, ‘망각의 침’도 필요로 하지 않았으니까. (망각의 침은 영화 ‘마더’에 나오는, 허벅지에 놓으면 아픈 기억을 잊게 해준다는 침이다.)

‘백설공주에게 죽음을-블랙아웃’은 더욱 충격적인데, 부모가 자식의 범죄를 알고서 은폐하고 살인도 서슴지 않는 행동이 여러명의 공모로 조직적으로 일어난다는 점이다. 11년 전 현구탁은 사건 현장에 뒤늦게 나타났다. 아들 건오와 친구인 양병무, 신민수가 심보영을 성폭행하고 우발적인 사고로 심보영이 죽었다고 생각한 현구탁은 사건을 수습했다. 양병무·신민수의 아버지들과 함께. 현장에 없었던 고정우를 살인범으로 만들면서.

현구탁은 경찰로서 위기를 잘 모면하며, 유능한 일처리를 보여준다. 하지만 아버지로서 가장 끔찍한 실패를 보여준다. 쌍둥이인 두 아들은 모두 참혹한 정신적 괴로움을 겪는다. 한명은 자폐인으로 사건을 목격하였으나 홀로 그림을 그리다 정신병동에 유폐된다. 또 한명은 성폭행을 하지 않았지만 아버지와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지도 못한 채 미국으로 보내져 알코올과 약물 중독에 빠진다. 귀국해 자수하려 했지만, 아버지에게 가로막혀 결국 자살한다.

다른 아버지들도 기가 찬다. 자식들이 벌인 일을 같이 수습해준 것도 모자라, 11년 뒤 출소한 고정우에게 “피해자 아니야. 살인자야”라고 선을 그으며, 냉대와 행패를 부렸다. 10년간 고정우 엄마의 몰락을 지켜보고, 심보영 아빠를 적당히 위로했다. ‘망각의 침’도 없이, 어떻게 이럴 수가! 그들은 건오 아버지가 경찰인 덕에 한배를 탔다고 생각하며 “네 아이, 내 아이 없이 같이 키우며 살았다”고 뻔뻔하게 말해왔다. 그런데 건오가 성폭행을 하지 않았음을 알게 된 현구탁은 건오가 자살해버리자, 이들과 갈라서며 분노의 폭주를 한다.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이란 제목을 원문 그대로 번역하면 ‘백설공주는 죽어야 해’ 정도의 뜻이다. ‘백설공주’ 이야기의 핵심은 질투다. 애초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로 촉발된 갈등이다. 질투를 받는 백설공주는 죽어야 한다는 뜻이다. 원작에서는 ‘백설공주’ 연극의 배역이 심보영에게서 박다은으로, 결국 최덕미(고보결)에게로 가는 것이 나온다. 또한 원작에서는 심보영과 고정우는 친구보다 전 여친에 가깝다. 박다은이 전학 온 뒤 고정우와 사귀게 되면서 심보영은 질투심에 사로잡힌다. 원작에서 심보영은 고정우의 질투심을 유발할 생각으로 노골적으로 남자애들을 유혹하고 다녔다. 성적인 유혹으로 성폭력이 일어난다.

‘일류 학군지’ 집값이 비싼 이유

문화방송 제공

하지만 드라마에서는 유혹이 아닌 열등감에 의한 성폭력으로 묘사된다. “네가 고정우 좋아해봤자, 쳐다나 볼 거 같냐”는 양병무의 말에 심보영이 “너희도 고정우 따까리잖아”라고 받아친다. 이에 격분한 양병무가 심보영을 성폭행한다. 나중에 고정우가 양병무에게 묻는다. 심보영은 네가 좋아했던 친구 아니었냐고. “지랑 나랑 같은 처지면서 니 편 들잖아. 다 너 때문이야”라는 양병무의 대답은 열등감을 바탕으로 한 ‘굴절혐오’를 잘 보여준다. 굴절혐오는 자신보다 권력이 많은 사람에게 불만을 가지는 사람이 자신보다 권력이 적은 사람에게 나타내는 혐오를 이르는 말이다.

굴절혐오도 넓게 보면 질투의 변형이다. 강자에 대한 질투를 인정하지 않고, 약자에 대한 혐오로 치환하는 것이다. 일반 남성이 잘난 남자에게 갖는 질투심은 동성 사회의 연대를 해치는 것이 되기에 감춘다. 대신 잘난 남자를 추종하는 여성에 대한 혐오는 정당한 평가인 양 승인된다. 양병무는 고정우에게 품은 질투와 열등감을 숨긴 채 친구 사이를 유지한다. 반면 심보영에겐 연정과 굴절혐오를 동시에 품었다가, “따까리”라는 말에 공격욕을 폭발시키며 성폭행을 저지른다. 그 자리에서 신민수도 성폭행을 따라 하였다. 이는 성욕의 발현과는 다른 기전이며, 흔히 “무시해서 그랬다”는 남성의 인정욕구와 공격성의 발현이다. 여기에 자신에게 무관심한 고정우를 소유하기 위해 증거를 조작해 추락시키는 최덕미가 있다.

온갖 추악한 이기심이 난무하는 가운데 고정우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고결하다. 그는 감옥에서 10년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친구들과의 우정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굳이 고향으로 돌아온 것도 “20살이 되기 전에 죽은 친구들의 시신을 찾기 위해서”라고 답한다. 과거에도 지금도 고정우는 이타적이다. 엄청난 시련도 그의 영혼을 파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보다 강렬한 교훈은 이제는 중산층 부모들이 자녀를 질투와 선망의 대상이 되게 하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른바 ‘일류 학군지’에서 비슷한 계층의 비슷한 또래 아이들과 자라게 하지, 죽이고 싶은 백설공주로 만들지 않는다. 소셜믹스는 어렵고 일류 학군지 집값은 올라가는 이유이다.

대중문화평론가

‘씨네21’ 영화평론가로 출발하여 티브이 드라마, 예능 등을 두루 평론한다. 인권·역사·여성·장애·인구·성·계급·권력 등 사회과학 전반에 관심이 많다. 원래 전공은 의학·보건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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