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 만큼 자란다… 어느 老식물학자의 사랑 이야기[김선미의 시크릿가든]

글·사진 포항=김선미 기자 2024. 9. 21. 0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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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청산식물원의 ‘대왕나무’(낙우송) 앞에 선 이삼우 원장.
여기에서 폴짝, 저기에서 폴짝. 태어나서 지금껏 본 것보다 많은 수의 개구리를 단 하루 만에 본 것 같다. 부채로 부지런히 내몰아 보려 했던 한낮 모기의 기세도 대단했다. 오죽하면 명아주 앞에 ‘모기 물린 데에 잎을 짓이겨 즙을 내 바르세요’라는 팻말까지 있을까. 곤충을 위한 유토피아, 즉 인섹토피아(insectopia)가 있다면 이곳일 것이다. 꾀꼬리와 소쩍새 등 온갖 새들의 지저귐을 들으면서는 도시가 재(再)야생화되는 과정의 어디쯤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1세대 사립 식물원

경북 포항시 북구 청하면의 기청산식물원. 청하(淸河)는 맑은 물이란 뜻의 지명이다. 설립자 이삼우 원장(83)의 딸인 이은실 부원장(56)이 말했다.

“이건 천남성이에요. 원래 무성했던 잎은 열매가 익으면서 쓰러지고 있어요. 꽃은 코브라처럼 무시무시하게 생겼는데 실제로 독성이 많아요. 옛날에 임금님이 사약을 내릴 때 쓰였죠. 지금은 연구 끝에 약재로 사용되고 있어요. 천남성이 기본 종(種)이라면 울릉도에만 자라는 섬남성도 있어요. 열매를 옮기는 게 새인지 들짐승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날부터 식물원 곳곳에서 자라고 있어요. 처음에는 사람이 자연을 흉내 낸 ‘생태 조경’을 했지만, 그다음부터는 새와 벌들이 그려가고 있어요. 참 기특하죠.”

기청산식물원의 마크. 알이 꽉 찬 곡식만 골라내는 ‘키’와 조화를 상징하는 하프를 조합했다고 한다.
기청산식물원은 서울대 임학과를 나온 이삼우 원장이 기존의 과수원을 야생의 숲 같은 식물원으로 바꾼 곳이다. 한국 식물학계의 아버지로 통하는 고 이창복 교수(1919∼2003)의 제자인 그는 우리 자생식물의 소중함을 일찍 깨달았다. 1960년대 중반 고향인 포항으로 내려와 모감주나무와 참느릅나무 등을 심으면서 식물원의 기초를 닦았다.

살충제를 쓰지 않는 자연 농법을 도입했더니 곤충이 몰려들어 숲 생태계가 되살아났다. 그간 정성껏 심어 키운 우리 자생식물의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기청산식물원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1세대 사립 식물원이자 식물학도들에겐 교과서 같은 장소가 됐다. 2만여 평 부지에 2000여 종의 자생식물이 사는데, 이 중 800여 종이 희귀·특산 식물이다.

● 국내 희귀·멸종위기 식물의 지킴터

이 식물원의 설립 취지는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삶을 목적으로 한 홍익인간 세상을 열어가는 데 식물학적으로 기여하는 것’이다. 대표적 활동이 국내 희귀·멸종위기 식물의 서식지 외 보전이다. 무분별한 포획으로 인해 본래의 서식지에서 멸종했거나 멸종위기에 처한 야생 동식물을 체계적으로 보전, 증식해 생물 다양성을 유지한다.

포항에서 가까운 울릉도의 멸종위기 식물들을 보전하는 게 대표적이다. 일례로 섬개야광나무는 전 세계에서 울릉도에만 자생한다. 절벽에 자라면서 생존력이 매우 약한 이 식물을 전문 인력들이 주기적으로 울릉도에 가서 모니터링하고 기청산식물원으로 수집해 와서는 대량 증식을 통해 보전한다. 식물의 이력을 철저하게 관리해 국가식물종관리시스템에 등록해야 산림생명자원 관리가 제대로 되고 수입 식물이 종종 자생종으로 둔갑해 유통되는 걸 막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수목원의 할 일이라는 것이다.

● 삶의 자세를 가르쳐주는 나무들

은행나무로 만든 생울타리.
이삼우 원장이 각별히 좋아한다는 가을 풍경. 벤치 뒤 적황색 단풍은 감태나무, 그 뒤의 갈색 단풍은 참느릅나무다. 기청산식물원 제공
기청산식물원을 걷다 보면 썩어 쓰러진 나무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 자체를 자연의 순환 과정으로 보기 때문이다. 은행나무로 만든 생울타리도 이곳에서 처음 봤다. 이 원장이 참느릅나무 앞에 섰다. “박목월의 시 ‘청노루’에 등장하는 이 나무를 제가 참 좋아합니다. 1년의 절반은 잎이 거의 없는 상태로 살아요. 잎이 무성해 그늘을 드리우면 다른 식물이 잘 자랄 수 없으니 태양 에너지를 양보하는 것이죠. 나무의 세계는 우리 인간들이 배울 게 참 많아요.”
이달 14일 200여 명이 찾아와 즐긴 기청산식물원의 ‘대왕나무 아래 상사화 음악회’. 기청산식물원 제공
이 식물원에서 ‘대왕나무’(King Tree)로 불리는 높이 15m, 둘레 350cm의 낙우송도 꼭 봐야 한다. 호흡근이 발달해 마치 오백나한이 부처의 설법을 듣기 위해 몰려오는 정경 같다는 평이다. “원래 이 나무가 있던 자리는 우리 식물원 소유가 아니었어요. 주택단지를 조성하려고 대형 굴착기가 들어오는 걸 보고 당장 멈추게 하고 융자를 받아 주변 토지를 사들였어요. 이자 갚느라 너무 힘들어 어느 날 나무에게 넋두리했는데 그걸 알아들었으려나요.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나무가 방송에 소개되면서 1년 치 이자를 갚을 수 있었어요. 은혜를 보답하는 의리 있는 나무라 해마다 막걸리를 한 말씩 대접합니다.”

● ‘K에코 투어리즘’의 가능성

기청산식물원에 핀 붉노랑상사화.
기청산식물원의 9월은 석산(꽃무릇)의 계절이다. 예년에는 붉노랑상사화, 위도상사화 등 각종 상사화가 여름에 피고 난 후 9월 중순부터 석산을 볼 수 있었는데, 올해는 더위로 인해 21일부터 10월 초까지 만개가 예상된다.
10월 초까지 만개가 예상되는 기청산식물원의 상사화. ‘이룰 수 없는 사랑’이 꽃말이다. 기청산식물원 제공
석산은 ‘이룰 수 없는 사랑’(꽃말)의 슬픔을 애써 숨기려 빨간 립스틱을 바른 걸까. 반세기에 걸친 기청산식물원의 노력도 어느 1세대 사립 식물원장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이지 않기를 염원한다. 이 식물원은 부원장인 딸에 이어 손자까지 삼대(三代)가 식물원에서 일하지만 새로 생겨나는 국공립 식물원들에 비하면 시설이 낡고 투자 여력도 없는 형편이다. 식물원 업계에서는 “기청산식물원은 국내 1세대 사립 수목원의 자존심과 사명으로 지금껏 유지된 것”이라며 “선진국일수록 다양한 형태의 식물원을 갖추고 있는 만큼 우리나라도 국공립과 사립 식물원이 공존할 방안을 모색할 때”라고 입을 모은다.

다행히도 기청산식물원은 지속 가능한 생태계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에코 투어리즘’(환경 보호와 지역 발전을 목표로 하는 여행)의 가능성이 큰 곳이다. 이 식물원의 울릉도 희귀·특산식물 보전과 ESG 활동을 세계 식물원들이 주목하고 있다. 한국에서만 만날 수 있는 식물을 보기 위해, 그 식물이 초대한 새들의 노래를 듣기 위해 전 세계에서 관광객들이 밀려드는 즐거운 상상을 해본다.

주변 가볼 만한 곳
● 월광회집

찐’ 포항 사람들이 찾는 월포해수욕장 맛집. 이곳의 물회는 살얼음 뜬 육수를 붓지 않는다. 신선한 참가자미회에 물은 그저 한 숟가락 정도 넣고 비벼 먹는 게 포항 스타일. 함께 나오는 얼큰한 경상도식 매운탕도 일품이다.

● 청하공진시장

드라마 ‘갯마을 차차차’의 촬영지. 1일과 6일에 오일장이 선다. 수십 년간 한자리를 지
켜온 상인들이 채소와 생선 등을 판다. K드라마를 보고 찾아온 외국인 관광객들이 방송에 나왔던 ‘보라슈퍼’ 등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 숲마을 정원

포항시 민간정원 1호(경상북도 6호). 포항시산림조합이 2017년 조성한 산림 복합문화공간이다. 포항 지역 농산물과 임산물이 제공되는 숲마을 뷔페는 1인당 8000원. 그야말로 속이 편안해지는 건강밥상이다. 온실에서 각종 식물을 살 수 있고 커피도 마실 수 있는 숲카페는 힐링의 장소다.

글·사진 포항=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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