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비아 로드리고, 열정 뽑아낸 뱀파이어…초승달·그믐달 사이
20대 여성 관객 몰리며 이들 세대 아이콘 증명
"김치 많이 먹고 올리브영에서 과소비"…韓 문화 감응
펑크 팝 선보이며 로킹한 무대
21일도 공연…양일간 1만5000명 운집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첫 곡 '배드 아이디어 라이트?(bad idea right?)'부터 심상치 않았다. 거친 록 사운드에 마음을 맡긴 듯한 꾸밈 없는 결연한 표정, 발차기를 비롯한 당당한 몸짓은 록스타의 에너지였다.
미국 Z세대 대표 팝스타 올리비아 로드리고(Olivia Rodrigo)가 20일 오후 서울 잠실실내체육관에서 펼친 첫 내한공연 '올리비아 로드리고 : 거츠 월드 투어(Olivia Rodrigo : GUTS World Tour)'는 폭발적이었다.
대표곡 중 하나인 '뱀파이어(vampire)'에서 낭창낭창한 가창력을 뽐내면서 시원스레 거친 말을 내뱉는 그녀는 왜 자신이 Z세대의 표상으로 통하는지를 실감케 했다. 로드리고는 관객을 홀리는 뱀파이어가 맞는데, 그들로부터 피 대신 열정을 쭉쭉 뽑아냈다.
특히 20대 여성의 열렬한 지지를 끌어냈다. 이들은 로드리고에게 수시로 "멋있다"를 외쳤다. 이날 관객 중엔 유독 세련된 젊은 여성이 많았다. 실제 인터파크티켓 예매자 통계에 따르면, 이번 로드리고 예매 성비 비율은 여성이 74.5%, 남성이 25.5%였다. 특히 20대 비율이 무려 63%에 달했다. 30대 비율은 18.9%로 2030이 81.9%를 차지했다.
세계 팝 시장의 주요 흐름 중 몇몇 줄기에서 한국은 다른 경향을 보인다. 로드리고와 미국 팝 슈퍼스타 테일러 스위프트의 인기가 다른 지역보다 비교적 덜하다. 로드리고와 스위프트는 각기 개성이 뚜렷한 싱어송라이터지만 공통점을 찾자면 미국 젊은 여성들의 삶을 가사로 옮겨낸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영미권에서 큰 공감대를 형성한다. 하지만 남녀 관계에서 적나라하고 솔직한 노랫말은 국내 정서엔 아직 부합하지 않는다.
하지만 다른 문화권이라도 공감할 수 있고 접점을 찾을 수 있다는 걸 이날 로드리고와 그녀의 공연이 증명했다. 자신의 어린 시절이 담긴 영상이 스크린에서 흘러나온 '틴에이지 드림(teenage dream)'을 그랜드 피아노를 연주하며 부르기 전에 로드리고는 "청소년 시절에 눈물의 생일 파티 등 감정에 휘둘려 보냈다. 하지만 앞으로를 걱정하는 소녀들에게 기적이 찾아올 거라는 말을 전하고 싶다. 내가 그 이후에 엄청난 장면들을 맞이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어느 문화권이든 통할 수밖에 없는 진심이다.
애초 이날 공연만 예정됐다가 단숨에 매진, 21일 공연을 추가해서 양일 간 1만5000명이 운집하는 사실만 봐도 로드리고에 대한 호응도가 확인된다.
특히 유독 로드리고의 공연은 다른 내한공연에 비해 외국 국적의 여성이 많았다. 옆자리에 앉은 한국 여성과 서로 인사하며 사진을 찍어주는 모습이 많이 눈에 띄었다. 로드리고가 평소 강조하는 여성 간 연대, 지지 등이 자연스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또 로드리고의 의상은 노출이 많은 편이었지만 섹시함이 아닌 자신감에 방점이 찍혔다. 밴드 멤버도 여성이 주축을 이뤘고, 현대무용 같은 예술적인 순간들을 선사한 여성 안무팀도 고혹적이었다.
로드리고는 이날 공연 전 소셜 미디어를 통해 "'거츠(GUTS) 월드투어 서울'의 티켓 수익 일부를 한국여성재단(KFW)에 기부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한국여성재단에 대한 소개도 더했다. 1999년부터 창의적인 성평등 프로젝트, 여성 폭력 피해 예방·피해자 지원 사업, 미혼모·이주 여성의 경제적 자립 등과 관련한 사업을 통해 수많은 여성 단체와 활동가를 지원해왔다고 설명했다. 한국여성재단 홈페이지 링크까지 첨부했다. 로드리고의 이번 기부금 역시 어려운 상황에 처한 여성을 위해 사용된다.
로드리고는 지난 3월 미국 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에서 열린 '거츠' 투어에 특별 부스를 설치하고 응급 피임약과 콘돔, 임신중지(낙태) 치료 관련 자료가 담긴 스티커 등을 무료 배포하는 등 꾸준히 여성문제에 대한 관심을 가져왔다. 이 캠페인은 보수단체의 반발로 중단했지만 '펀드 포 굿(Fund 4 Good)'을 내걸고 다양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한국 문화에도 적극 감응했다. 김치를 많이 먹고 국내 대표적 뷰티숍 문화인 '올리브영'에서 과소비도 했다는 이 '소 아메리칸(so american)'은 우리말로 '감사합니다'를 외치며 한국말도 배웠다고 했다. 지난 17일 입국한 로드리고는 한국이 자신이 가본 곳 중에서 가장 멋진 나라 중 하나라고 했다.
이날 로드리고 공연은 이런 화제성 외에도 내용, 형식 그리고 서사 측면에서도 나무랄 데가 없었다.
특히 로드리고의 무대 표현력이 탁월했다. '발라드 오브 어 홈스쿨드 걸(ballad of a homeschooled girl)'에서 무릎을 꿇고, '메이킹 더 베드(making the bed)'를 들려줄 때는 말 그대로 누웠는데 리프트 무대가 침대 형상을 만들었다.
'프리티 이즌트 프리티(pretty isn't pretty)'에선 여성 무용수들과 함께 수직, 수평 운동의 미학을 만들어낸다. 무대 밑에서 위로 나온 무용수들과 일렬로 서로 기대어 무리를 만드는 정경은 드라마틱했다. '데자뷔(deja vu)'에선 영상을 통해 기시감을 느끼게 하는 군무를 연출했다. '젤러시, 젤러시(jealousy, jealousy)' 때는 여성 베이스 연주자와 관능적인 2인무를 선보였다.
또 다른 대표곡 '드라이버스 라이선스(drivers license)'도 그랜드 피아노를 치면서 들려줬는데 팬시하면서도 웅장한 분위기가 일품이었다. 반면, '해피어(happier)' '페이버릿 크라임(favorite crime)'을 부를 때는 데이지의 어쿠스틱 기타만 반주로 삼아 담백했다. 화려하면서도 청순한 로드리고의 매력이 돋보이는 시간들이었다.
화룡점정은 역시 이번 투어의 상징인 객석 사이로 떠오르는 달과 별 세트였다. 747 항공기 1대 물량인 항공 파레트 38개, 무게 약 100톤에 달하는 무대 장비를 공수해 해외 공연과 똑같이 재현했다.
'로지컬(logical)'를 부르기 전 공연장에 하나둘씩 별이 떠올랐고 플로어석 뒤 공연장 중간에 나타난 로드리고가 탄 초승달이 두둥실 떠올라 2층, 3층 관객과도 가까워졌다. 공중에서 노래부르는 것이 힘들 텐데도 로드리고의 가창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녀는 한국의 '리비에스'(livies·팬덤명) 큰 함성에 한국에 와서 정말 행복하다며 웃음으로 화답했다. 그리고 객석 곳곳을 향해 손을 크게 흔들었다.
그리고 역시 달 위에서 '이너프 포 유(enough for you)'를 불러나갔다. 달은 회전을 했는데 방향, 각도에 따라 마치 초승달(북반구 기준 달의 오른쪽이 보이는 것) 혹은 그믐달(왼쪽 편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뉴 문'으로도 불리는 초승달은 커나가는 희망을, '올드 문'으로도 통하는 그믐달은 어둠을 상징하기도 한다. 두 달의 형상을 오가며 때로는 보름달처럼 꽉 찬 것 같기도 한 달 속에서 로드리고와 관객들은 그 순간에도 성장해갔다.
막바지엔 하드록 풍의 록페스티벌을 방불케 했다. 로드리고는 '브루탈(brutal)'에선 점핑을 멈추지 않았다. 남자친구의 여자친구에 집착하는 '옵세스드(obsessed)'에선 발음을 흘리는 창법과 누워서 부르는 정경들이 관능적이었다. 종반부엔 직접 격렬한 기타 연주를 선보이기도 했다.
로드리고가 미국 팝 펑크의 아이콘인 에이브릴 라빈의 음악을 듣고 자란 걸 감안하면 이런 분위기는 당연했다. 로드리고는 지난 4월 세계 최대 대중음악 축제로 통하는 미국 '코첼라 밸리 뮤직 앤드 아츠 페스티벌'에서 미국 록밴드 '노 다웃'의 무대에 깜짝 등장해 협업하기도 했다.
이날 본공연의 마지막인 '올-아메리칸 비치(all-american bitch)'에선 우렁찬 떼창이 나왔다. '굿 포 유(good 4 u)', '겟 힘 백!(get him back!)' 등 앙코르까지 이날 공연 직전 그리고 공연 내내 공연장 바깥에서 내린 폭우도 꺾지 못한 열기가 이어졌다.
젊음을 계시 받는 자의 자부심을 어떻게 매력적으로 보여줄 지 아는 이가 로드리고다. 그는 무대 뿐 아니라 자신의 삶을 노래하는 퍼포머다. 춘하지교(夏秋之交·봄과 여름이 바뀌는 때)를 빌려 하추지교(夏秋之交·여름과 가을이 바뀌는 때)라고 명명하련다. 로드리고와 함께 한국에 가을이 왔다. 그 만큼 우리는 성숙해졌다.
☞공감언론 뉴시스 realpaper7@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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