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의 기억] 농사의 밑거름

2024. 9. 21.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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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장군, 전북 고창, 1975년 ⓒ 김녕만
저만치 떨어진 구석 자리가 그의 차지였다. 뒷마당 헛간에서도 가장 한갓진 뒷전이었다. 그 옆을 지나다닐 땐 이마를 찌푸리고 코부터 움켜쥐었다. 혹시 옷깃이라도 닿을세라 되도록 멀찌감치 피해 다녔다. 하지만 따가운 눈총을 받는다 해도 농가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요긴한 농기구였으니 바로 똥장군과 똥바가지, 똥지게 3종 세트다. 그런데 왜 하필 장군이라고 했을까? 찾아보니 ‘액체를 담아서 옮길 때 쓰는 그릇’을 장군이라고 했다는데 아무튼 장군이라는 당당한 이름에 걸맞게 예전엔 대접받는 존재였다.

옛날부터 “한 사발의 밥은 남에게 줘도 한 삼태기의 거름은 주지 않는다”는 말이 전해질 정도로 농부는 거름을 몹시 귀하게 여겼다. 땅이 있어도 거름이 없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으니 그럴 만했다. 화학비료가 넉넉하지 않던 그때는 아궁이에서 나오는 재, 사람과 가축의 분뇨가 주된 거름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농작물을 먹은 사람이 배설한 인분을 거름 삼아 농작물을 키우고 그 농작물을 또 사람이 먹고 배설하고, 완벽한 친환경 사이클이라는 점이다. 조선시대 박제가 선생의 말을 빌리면 한 사람이 하루에 배설하는 분뇨로 하루 먹을 곡식을 생산해낸다고 했으니 그 말이 사실에 부합한다면 참으로 에누리 없이 정확하고 기가 막힌 도돌이표 순환이다.

그렇게 인분이 귀하다 보니 이웃집에 놀러 갔다가도 변소에 가고 싶으면 자기 집 변소로 달려갔다. 자기네 거름에 보태기 위해서다. 돌이켜보면 당시 어린아이들에게는 한밤중에 후미진 변소에 가는 게 고역이었다. 이상하게 변소에만 앉아 있으면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를 써도 온갖 무서운 귀신 이야기들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라 울고 싶었다. 공포에 떨며 볼일을 마치자마자 튕기듯 변소를 뛰쳐나오면 캄캄한 밤하늘에는 별들이 가득하고 간혹 별똥별이 떨어지는 광경을 보기도 했다. 그러나 이젠 화장실이 집 안으로 들어와 있으니 한밤중에 깨어도 별 볼 일이 없어진 지 오래다.

사진가 김녕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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