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는 폴란드부터 아시아의 시작으로 보았다

2024. 9. 21.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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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지현 ‘반전의 세계사’] 그때그때 달랐던 동·서양 경계
동양과 서양의 경계가 어디냐고 묻는다면, 많은 사람이 ‘우랄산맥’이라고 답할 것이다. 세계지리, 세계사 수업 등에서 우리는 카자흐스탄 북부에서 북극해까지 남북으로 러시아를 종단하는 우랄산맥 서쪽은 서양이고 그 반대편이 동양이라고 배웠다. 실제로 우랄산맥 주변에는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를 기리는 기념비가 꽤 있다. 1846년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황태자 시절 방문한 기념으로 세운 예카테린부르크의 기념비가 대표적이다.

우랄산맥은 꿈쩍 않고 그대로지만,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는 자주 바뀌었다. 고대 그리스에 서는 코카서스 산맥에서 흘러나와 그루지아를 관통하는 ‘리오니강’이 경계였고, 로마 시대에는 ‘돈강’으로 바뀌었다. ‘볼가강’과 우랄산맥 사이의 늪지대가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가 된 것은 18세기 들어서의 일이다. 1880년의 프랑스산 유럽 지도는 우랄산맥 서편의 돈강, 볼가강 지역의 러시아를 전부 유럽에 포함하는 대신, 산맥 동쪽은 ‘아시아’라고 큰 글씨로 쓰고 있다.

로마 시대는 돈강이 유럽·아시아 경계
우크라이나계 러시아 사실주의 화가 일리야 레핀의 그림 ‘최후통첩을 보낸 튀르키예 술탄에게 조롱의 답장을 쓰는 자포로제 카자크’(1880-91). 동슬라브계인 카자크(코사크) 족의 용맹하고 비유럽적인 모습이 강조된 이 그림은 때로는 ‘동양’으로, 때로는 ‘서양’으로 여겨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사진 러시아국립미술관]
우랄산맥이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가 된 결정적인 계기는 러시아가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에 대한 식민주의적 팽창이었다. 오리엔탈리즘에 따르면, 유럽이 아시아를 식민화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아시아가 유럽을 식민화할 수는 없지 않은가? 차르 시대의 ‘문명화 사명’이나 공산주의 소련 시절의 ‘복지 식민주의’라는 구호 아래 수행된 식민주의 프로젝트가 우랄산맥을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로 만든 것이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우랄 동쪽에 사는 시베리아의 유목민족들은 때때로 ‘인간 동물원’의 전시물로 유럽 러시아인들의 식민주의적 호기심을 만족시켰다. 서구적 식민주의의 러시아적 변용이었다. 러시아 식민주의에서 우랄 동쪽의 유목민족은 아시아·아프리카인을 대신했다. 21세기에도 유럽 러시아는 ‘민속’의 이름으로 자국의 시베리아 소수 민족을 전시했다.

우랄산맥 양쪽에 걸쳐 있는 러시아는 서양인가 동양인가? 답은 간단치 않다. 아직 진행 중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유럽 러시아인들의 논평은 많은 생각거리를 준다. 2022년 12월 젤렌스키 대통령이 워싱턴을 방문해서 바이든 대통령과 우크라이나 전쟁 지원에 대한 정상회담을 갖자, 러시아 외무부의 자하로바 대변인은 ‘집합적 서양’이 러시아와 두번째 충돌을 불사하고 있다 논평했다.

나토 중심의 ‘서양’과 러시아를 대척점에 놓음으로써, 러시아는 서양이 아니라고 시사한 것 이다. 미디어에서 드러난 보통 러시아인들의 생각은 더 흥미롭다. 텔레비전 토크쇼에서 한 토론자는 서양이 이기면 러시아인들을 ‘인간 동물원’의 전시대상으로 삼을 것이므로 전쟁에서 지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며 격앙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서양 식민주의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불안감을 접하다 보면, 러시아는 서양이면서도 서양이 아니라는 생각을 떨구기 어렵다.

서양이면서 서양이 아닌 러시아의 역사적 딜레마는 대부분의 동유럽 국가들도 안고 있다. 18세기 말 ‘서양’에서 온 여행자들은 프로이센에서 폴란드로 3마일만 들어가면 아시아적 풍습과 유럽적 풍습이 갈라지는 경계를 확연히 느낀다고 썼다. ‘비굴함·더러움·허영심·거짓말·의심·질투·비겁함’ 등등의 묘사를 보면 마치 19세기 말 지독하게 가난하고 불결하며 문화의 불모지인 조선에 대한 비숍 여사의 여행기를 연상케 한다.

18세기 말 이래 서유럽의 식자들에게 동유럽은 유럽과 아시아의 지리적 경계이자 문명과 야만의 철학적 경계였으며 절반은 아시아인 유럽이었다. 영국과 프랑스 등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이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겨냥했다면, 독일의 오리엔탈리즘은 슬라브족의 동유럽을 타자화했다. 독일의 식민주의자들에게 동유럽은 ‘원시적인 아시아적 슬라브인들’로 오염된 변경이었다. 1850년대 독일의 한 괴짜 공작은 아프리카에서 얼룩말, 타조, 영양 등을 가져와 우크라이나 스텝 지대에 풀기도 했다. 그에게 ‘하얀 검둥이’들이 사는 우크라이나는 그저 추운 아프리카였을 뿐이다.

동유럽에 대한 독일의 오리엔탈리즘은 나치의 집권 이후 더 공고해졌다. 히틀러에게 유럽과 아시아는 게르만족과 슬라브족의 경계에서 갈라졌으며, 폴란드부터 아시아는 시작이었다. 우랄산맥은 더는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가 아니었다. 나치는 ‘동방부(Ostministerium)’를 만들어 동유럽 정책을 주관했는데, 영국의 ‘인도부’가 모델이었다. 러시아는 히틀러의 인도였다. 소련과 동유럽에 대한 나치의 묵시록적인 살육과 약탈은 슬라브족의 아시아적 야만으로부터 서양의 기독교 문명을 지키기 위한 십자군의 수사로 정당화했다. 때로는 미국식 서부 개척의 메타포가 사용되기도 했다.

서구가 아시아와 아프리카인을 ‘전시’한 ‘인간 동물원’의 예. 1904년 미국 세인트루이스에서 열린 세계박람회에 ‘전시’된 필리핀의 이고로트족의 사진. [사진 미국 미주리 역사박물관]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유럽의 식민주의자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폴란드인은 독일인을 마주치면 인도에서 차도로 내려가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여 경의를 표시할 의무가 있었다. 아시아적 야만의 폴란드인들은 극장·연극·박물관·전시회 등의 방문이 금지됐고, 타자기·전축·라디오·카메라·자전거 등의 소유는 불법이었다. 나치가 동유럽 점령지에 급조한 유대인 게토는 미국의 인디언 보호구역과 같은 발상이었다.

나치의 학제에서 폴란드 연구는 ‘동방 연구(Ostforschung)’라는 이름으로 자리 잡았다. 동유럽에 대한 독일판 오리엔탈리즘의 정수였다. 프랑스에 주둔한 독일 군인들이 가졌던 열등감 콤플렉스와는 대조적으로 동유럽을 점령한 나치 군인들은 문화적 우월감을 넘어 식민주의적 사명감을 가졌다. 폴란드 점령군인 독일 병사들은 ‘동양인들의 신비로운 정신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고 썼고, 아시아적 병사들로 구성된 붉은 군대는 볼셰비즘이라는 아시아적 이념을 기독교적 서구에 강요하려는 야만의 군대였다.

폴란드에서는 독일 연구를 ‘서방 연구(studia zachodnie)’라고 불렀다. 포즈난에 있는 오랜 전통의 독일연구소는 아직도 공식 명칭이 ‘서방 연구소(Instytut Zachodni)’이다. 프랑스의 발전된 물질 ‘문명’에 대해 고유한 정신 ‘문화’를 강조하는 등 19세기 이래 영국과 프랑스에 대해 독일인들이 가졌던 열등감 콤플렉스는 폴란드와의 관계에서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폴란드를 동양으로 만드는 대신, 독일은 서양이 됐다.

서양과 동양은 절대적 개념이 아니라 관계적 개념이다. 동유럽의 동양적 이미지는 냉전 시대에 더 강화됐다. 나토를 중심으로 뭉친 미국과 서유럽 반공 블록은 북유럽의 발틱 3국, 남유럽의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중부 유럽의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등 공산권 블록을 ‘동유럽’으로 통칭함으로써, 스탈린 치하 공산주의 체제의 아시아적 야만성을 강조했다. 동유럽은 동쪽 유럽이 아니었다.

1980년 연대노조 운동이 한창일 때, 국민적 지도자로 등장한 바웬사는 “폴란드를 제2의 일본으로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이 구호는 1991년 전후 최초의 민주적 대통령 선거 때 다시 등장했다. 후진적인 폴란드를 선진적인 일본으로 발전시키겠다는 바웬사의 연설에서는 과연 어디가 동양이고 어디가 서양인가? 야만적 동양 대 문명화된 서양이라는 오리엔탈리즘의 이분법에 바웬사의 이 말을 대입하면, 우랄 동쪽의 일본이 서양이고 서쪽의 폴란드가 동양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마르코 폴로, 중국·일본인 백인으로 봐
중국에서 ‘동양’은 전통적으로 자바섬 인근 해협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마르코 폴로 등의 유럽 여행자들이 중국인과 일본인을 아직 ‘백인’이라고 부를 때의 일이다. 그 동양이 오리엔탈리즘에서 말하는 ‘후진적이고 열등하며 미신적이며 감정적이고 여성적인’ 동양으로 바뀌게 된 것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이 계기였다.

청나라와 러시아에 잇달아 승리하자, 일본은 이들의 서양이 됐다. 중국은 ‘동양사’로 배치하여 오리엔탈리즘의 대상으로 삼고, 서양과 거의 동격인 일본은 동양사에서 떨어트려 국사로 분리하되, 본받아야 할 선진적인 서양은 서양사로 편제하는 국사-동양사-서양사라는 3분과 체제가 제국 일본의 학제로 자리 잡았다. 동양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후발 제국 일본의 욕망이 학제로서의 ‘동양사’를 낳은 역설은 세계사의 부조리를 잘 보여준다.

임지현 서강대 석좌교수. 서강대에서 서양사 전공. 대표 저서로 『희생자의식 민족주의』(2021), 『기억 전쟁』(2019), 『대중 독재』(2004), 『우리 안의 파시즘』(공저 199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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