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업 놓고 갈등···결국 금 간 75년 동업
고려아연 2년전 신사업 추진하며
한화·현대차 등 외부주주 유치
영풍 "무차입 기조에 배치" 반대
두 가문 동업관계 금가기 시작
올 주총 표대결로 갈등 표면화
2022년 8월 4일 장형진 영풍(000670) 고문은 다음 날로 예정된 계열사 고려아연(010130) 이사회에서 한화그룹이 고려아연 유상증자에 참여하는 안을 의결할 것이라는 보고를 직원들로부터 받은 후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영풍그룹 지주사인 영풍은 계열사 고려아연의 최대주주다. 그럼에도 영풍 오너가 2세인 장 고문은 이사회가 열리기 직전에야 고려아연이 외부 주주를 유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장 고문은 해당 안건에 대한 반대 입장이 명확했다. 외부 주주가 늘면 고려아연에 대한 지배력이 약화되기 때문이다. 그는 고민 끝에 이사회에 불참했다. 이사회에 직접 참석해 반대를 했다가는 영풍 장 씨 가문과 고려아연 최 씨 가문의 동업 관계에 금이 갔다는 세간의 인식이 확산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고려아연은 고려아연대로 속사정이 있었다. 친환경 사업을 추진하던 고려아연은 파트너사로 한화그룹에 주목했다. 해외에서 신재생에너지·수소 등 신사업 추진은 불확실성이 있는 만큼 윈윈할 수 있는 ‘동맹’ 관계를 구축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지분 희석을 원하지 않는 장 고문이 걸림돌이었다. 이사회 직전에야 영풍에 한화의 지분 투자 관련 안건을 통보한 배경이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2024년 9월 12일. 영풍이 국내 최대 사모펀드(PEF) 운용사 MBK파트너스와 손잡고 고려아연 경영권 확보에 전격적으로 나섰다. 막대한 자본력을 자랑하는 사모펀드를 직접 끌어들이는 공개매수 방식을 통해서다. 추석 직전이었던 터라 고려아연 측은 기습적으로 허를 찔렸다는 반응이었다. 결과가 어찌 되든 3세 경영에 이르러 영풍과 고려아연의 동업 관계는 파국으로 끝을 맺은 셈이다. 이에 대해 장 고문은 “지난 75년간 2세에까지 이어져온 두 가문 공동경영의 시대가 이제 여기서 마무리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면서 “3세에까지 지분이 잘게 쪼개지고 승계된 상태에서 그들이 공동경영한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적절하지도 않다”고 밝혔다.
영풍의 시작은 ‘영풍기업사’로 고(故) 장병희·최기호 창업주가 1949년 함께 창업했다. 1974년 자매회사 고려아연이 설립된 후 고려아연은 최 씨 일가가, 영풍과 전자 계열사는 장 씨 일가가 각각 맡아왔다. 영풍그룹은 현재 공정거래법상 장 고문을 총수로 하는 대규모 기업집단 32위에 올라 있다. 장 고문은 3세에 경영권을 물려준 후에도 고려아연에 대한 관심을 계속 이어왔다.
재계에서는 장 씨 가문과 최 씨 가문이 결별 수순을 밟게 된 근본적인 요인으로 고려아연이 2022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한 친환경 사업을 꼽는다. 고려아연 3세인 최윤범 회장은 부회장이던 2021년 12월 2차전지 소재, 신재생에너지 및 그린수소, 폐기물 리사이클링 분야를 신성장 동력으로 삼겠다며 ‘트로이카 드라이브’ 경영을 선언했다. 아연·납 생산량 기준 세계 1위 비철금속 기업에 오른 경쟁력을 기반으로 제련 기술력을 살릴 수 있는 친환경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겠다는 게 골자였다. 고려아연은 지난해 말 신사업에 10년간 12조 원을 투자해 2033년 매출 25조 3000억 원을 달성하겠다는 구체적인 청사진도 드러냈다.
하지만 장 고문이 생각하는 사업 방향성과 투자 기조는 명확히 달랐다. 신사업에는 막대한 투자가 필요한 만큼 외부 차입 확대와 배당 축소가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장 고문은 ‘무차입 경영’에 기반한 보수적인 투자를 하는 가풍을 이어온 터라 최 회장의 사업 기조 전환이 달가울 리 없었다. 더구나 한화를 시작으로 현대차그룹·LG화학이 친환경 사업의 전략적 파트너사로서 고려아연의 주주로 잇따라 참여하면서 지배력 약화에 대한 우려가 더욱 커졌다. 지난해 8월 장 고문은 고려아연이 현대차그룹을 대상으로 제3자배정 유상증자를 결의하는 이사회에도 불참했다. 이후 장 씨 일가와 최 씨 일가는 지분 매입 경쟁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상대적으로 지분이 많은 장 고문 측으로서는 배당 확대가 추가 지분 확보에 유리했다.
양 가문 간 껄끄러운 관계가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은 올 3월 19일 열린 고려아연 주주총회 때 영풍과 고려아연이 사상 처음으로 표 대결을 벌이게 되면서다. 최 회장과 장 고문 간 깊어진 갈등의 골이 현금 배당안을 놓고 드러난 것이다. 영풍은 고려아연이 상정한 주당 5000원 안건에 반대했지만 참석 주주 62.74%의 찬성으로 통과됐다.
고려아연은 이러한 여세를 몰아 동업 관계의 상징이었던 서린상사도 장악했다. 영풍그룹 계열사인 서린상사는 고려아연과 영풍의 수출 판매와 물류 업무 등을 담당해왔으며 고려아연 측과 영풍 측이 보유한 지분이 각각 66.7%, 33.3%다. 올 6월 열린 임시 주총에서 고려아연이 추천 인사 4명을 신규 사내이사로 선임하며 경영권을 확보하자 2014년부터 서린상사를 경영해온 장 고문 차남 장세환 대표는 사임했다. 이후 고려아연은 영풍빌딩을 떠나고 회사 로고도 변경했다.
그러는 사이 영풍의 본업은 위기에 놓였다. 영풍의 올 2분기 매출은 7520억 원으로 20% 감소했으며 영업이익은 8338만 원에 그쳤다. 특히 박영민·배상윤 대표가 석포제련소 중대재해 사건으로 구속된 상태다. 더구나 장 씨 일가가 맡아온 전자 계열사도 부진한 실정이다. 장 고문 장남인 장세준 대표가 이끄는 코리아써키트는 지난해에 이어 올 상반기에도 적자를 냈다. 반면 고려아연은 올 2분기 사상 처음 분기 매출 3조 원을 돌파하는 등 그룹 내에서 차지하는 매출 비중이 70% 이상으로 확고한 존재감을 다지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고려아연이 영풍그룹에서 확고한 캐시카우 역할을 하는 상황에서 최 씨와 장 씨 집안의 갈등은 결국 고려아연을 누가 차지하느냐를 두고 정점으로 치달았다”고 전했다.
김기혁 기자 coldmetal@sedaily.comCopyright © 서울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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