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년째 시각장애인과 협업···"보이지 않아도 예술이 될 수 있죠" [작가의 아틀리에]
코·얼굴 없는 코끼리로 관객에 질문 던져
모형부터 골조→외피→해체작업 되풀이
"현대미술 작가들은 '프레임 체인저' 역할
'본다는 것의 본질' 알리며 설득해나갈 것"
출판사 해냄에듀가 최근 공개한 2022년도 개정 중학교 미술 교과서에는 특별한 작품이 한 점 실려 있다. 한쪽 팔이 몸 전체보다 크게 부각된 이 테라코타 작품의 제목은 ‘보이지 않는 힘’. 출판사는 이 작품에 대해 “눈에 드러나지 않은 잠재된 에너지를 강조했다”며 “미술은 눈으로 보기만 해야 하는 걸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보이지 않는 힘’은 현대미술가 엄정순이 주도하는 ‘우리들의 눈’ 프로젝트에 참여한 학생 진성범의 작품이다. 지난해 광주비엔날레에서 ‘코 없는 코끼리’ 작품으로 화제가 된 엄정순은 1996년부터 시각장애인의 예술 활동을 지원하는 ‘우리들의 눈’을 설립하고 그들과 협업한 작업을 세상에 선보여왔다.
누군가는 이 프로젝트를 유명 작가의 재능 기부 정도로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직업 화가가 다른 이유 없이 27년이나 재능 기부를 지속한다는 게 결코 쉬워보이지는 않는다. 엄정순에게 ‘우리들의 눈’은 어떤 의미일까. 이 프로젝트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들어보기 위해 서울 종로구 북촌 한옥마을에 위치한 ‘엄정순 스튜디오’를 직접 찾았다.
처음 작업실에 들어선 기자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작업실 앞은 수많은 관광객들로 인해 다소 번잡했고 시끄러웠다. 게다가 그의 대표작인 ‘코끼리 프로젝트’를 진행하기에도 공간이 다소 좁아보였다. 여기에서 코끼리를 제작할 수 있을까. 기자가 묻자 작가는 “사람들의 한복판에 있다는 것이 이 작업실의 가장 큰 장점”이라며 자신의 작업 과정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코끼리 프로젝트’라 불리는 그의 작업은 두 갈래로 나뉜다. 우선 높이 3m에 이르는 대형 코끼리를 제작하는 스튜디오 작업이 첫 번째 갈래다. 코끼리를 제작하는 과정은 마치 건축가가 집을 짓는 일과 같다. 작가는 가장 먼저 스튜디오에서 높이 50㎝ 이내의 작은 코끼리 모형을 만든다. 작업실에는 그가 최근 제작해둔 코끼리 모형들이 창가에 늘어서 있었다. 작은 코끼리 모형이 진짜 코끼리만큼 커지기 위해서는 작가의 상상력에 기반한 시뮬레이션이 필요하다. 최종 시뮬레이션은 엔지니어들에게 전달돼 코끼리의 ‘뼈’를 만드는 ‘골조 작업’으로 이어진다. 이 작업은 작가의 북촌 작업실이 아닌 외부 공간에서 이뤄진다. 그동안 작가는 코끼리의 ‘피부’에 해당하는 외피를 제작한다. 작가는 코끼리 모형에 펜으로 수많은 곡선을 그려두고, 그 선을 따라 약 130조각의 천을 직접 직조해 만든다. 천 조각을 직접 꿰매 이어 붙인 게 거대한 코끼리의 외피다. 작가는 이렇게 애써 제작한 작품을 낱개로 해체해 보관한 후 전시장에서 다시 조립하고, 전시가 끝나면 또다시 해체한다.
엄정순은 “해체와 조립의 과정을 통해 약 600년 전 한반도에 처음 이주한 코끼리의 고단한 서사를 탐구한다”고 설명했다. 1.5m에 이르는 코끼리의 코는 코끼리의 막강한 무기다. 야생에서는 어떤 육식동물도 코끼리에게 함부로 덤빌 수 없고, 인류 역사에서 지배자들은 코가 긴 코끼리를 자신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한 선물 혹은 운송 수단으로 활용하며 경외와 숭배의 감정을 동시에 드러냈다. 이런 이유로 코끼리는 떠돌이처럼 세계 곳곳을 이주했다. 그런데 조선의 코끼리는 달랐다.기록에 따르면 처음 코끼리를 본 조선인들은 그 기이한 생김새를 혐오하고 학대했다. 그러다 한 관료가 코끼리 코에 맞아 죽는 사건이 생기면서 유배당하는 처지에 이른다. 작가는 “우리가 여행할 때 갖고 다니는 가방을 ‘트렁크’라고 부르는데 코끼리의 코도 영어로 ‘트렁크’”라며 “조선 코끼리는 코 때문에 여행 가방처럼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살았고, 이런 이주의 서사를 보여주기 위해 해체와 조립의 과정을 반복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시각장애인들에게는 어떨까. 코끼리의 ‘코’를 보지 못한 시각장애인들에게 코는 아무것도 아니다. 작가는 이 같은 상상력을 기반으로 공공 프로젝트인 ‘코끼리 만지기’ 작업을 시작했다. ‘코끼리 만지기’는 전국 12개 맹학교를 순회하며 음악·냄새 등 오감을 통해 코끼리를 상상하는 교육을 진행하고, 직접 코끼리를 만나고 돌아와 작품을 만들어 전시하는 프로그램으로 ‘코끼리 프로젝트’의 두 번째 갈래다. 전국을 떠돌았던 조선 최초 코끼리의 외로운 여정을 따라간다는 의미다. 북촌의 작업실이 엄정순의 예술 활동을 위한 첫 번째 아틀리에라면 두 번째 아틀리에는 ‘우리들의 눈’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전국의 모든 장소다.
하지만 ‘앞을 볼 수 없는 이들이 코끼리를 직접 만질 수 있는 기회를 달라’는 제안을 받아들일 동물원은 많지 않다. ‘우리들의 눈’은 처음 전남 광주의 우치 동물원에서 3년간 작업을 이어갔으나 이곳의 코끼리가 다른 곳으로 이주하면서 결국 태국 치앙마이의 코끼리 캠프까지 가서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작가의 치밀한 ‘프레젠테이션’과 지난한 ‘설득’의 과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코끼리 만지기’는 단지 만지는 데서 끝이 아니다. 작가는 시각장애 학생들과 함께 청각과 촉각·후각으로 느낀 코끼리를 재해석해 대형 설치 작품으로 재구성한다. 시각장애 학생들은 그에게 제자이면서 동시에 함께 작품을 제작하는 동료인 셈이다. 완성된 작품은 전시장에서 ‘만질 수 있는 작품’으로 전시된다. 시각장애인들에게 코끼리를 ‘본다는 것’은 코끼리를 ‘만지는 것’이다. 관객들은 시각장애인들처럼 작품을 보는 대신 만지면서 ‘보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할 수 있다. 그는 “시각장애인에게 있어 전체를 만질 수 없는 코끼리와 같은 거대한 물체는 만지는 부위의 특성이 그 물체의 전부”라며 “본다는 것과 보지 못하는 것의 사회적 격차는 하늘과 땅만큼 크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광주비엔날레에서 선보인 ‘코 없는 코끼리’는 이 같은 작가의 철학을 보여주는 ‘코끼리 프로젝트’의 진수다. 당시 관람객은 코끼리의 다리와 몸통을 만지며 코끼리의 다른 부위를 체험했다. 작가는 “코끼리의 코는 생태계에서 막강한 권력인데 그 권력이 사라지면 사람들은 비로소 그를 설명하기 위해 다른 부위를 찾아보게 된다”며 “코끼리의 코를 사람의 눈으로 바꿔 생각해보자는 게 나의 제안”이라고 말했다.
현재 작가는 서울 학고재 갤러리에서 딩이, 시오타 지하루와 함께 ‘잃어버린 줄 알았어’라는 제목의 3인전에 참여하고 있다. 이곳에 전시된 신작 ‘얼굴 없는 코끼리’는 코뿐 아니라 얼굴도 없다. 작가는 이곳의 코끼리를 관객에게 등을 돌린 채 걸어가는 모습으로 배치해 고단한 이주의 여정에 동행해볼 것을 제안한다. 이를 통해 관중에게 ‘코가 없다고 해서 코끼리가 아닌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코’를 ‘눈’으로 바꿔보자. 볼 수 없다고 해서 예술을 할 수 없을까. 또 보이는 것만이 예술 작품인가. 작가는 “현재 우리의 세계는 대개 평면 이미지로 이뤄져 있지만 그 이미지는 시각이라는 하나의 감각만으로 제작된 게 아니다”라며 “본다는 것의 본질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자”고 제안한다.
‘우리들의 눈’ 프로젝트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교육 커리큘럼을 짜고 시각이 아닌 다른 감각을 통해 감성을 표현할 수 있는 다양한 교구와 교재를 만드는 인프라 확충 사업에 주력하고 있다. 작가는 “전혀 다른 형태의 두 작업을 동시에 수행해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 그 이면의 무언가를 발견하자는 것이 나의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우리들의 눈’ 프로젝트가 단순한 재능 기부가 아닌 명백한 ‘예술 활동’이라는 것. 생각해보면 기체조마저도 작품이라고 말하는 현대미술의 세계에서 이 같은 작업이 예술이라 불리지 못할 이유는 없다. 그는 “현대미술 작가들은 다양한 세계에서 영감을 얻어 ‘이것이 예술’이라고 사람들을 설득하고 워크숍을 하는 과정을 거치는 일종의 ‘프레임 체인저’”라며 “두 가지 작업을 균형감 있게 유지하면서 ‘우리들의 눈’을 세계 프로젝트로 확장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서지혜 기자 wise@sedaily.comCopyright © 서울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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