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현의 미술래잡기] 이제 추석도 지났으니

2024. 9. 20. 17:3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16세기 민초의 삶 남긴
브뤼헐 '추수하는 사람들'
고된 노동과 휴식을 묘사
한 해의 수확 끝난 뒤
넉넉하고 풍족한 시기
지나온 시간 돌아보고
남은 시간은 결실위해 쓰길
대 피터르 브뤼헐 '추수하는 사람들'.

옛 속담에 틀린 말이 없다 하지만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야만 그 진정한 의미를 알아듣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문장은 이미 어릴 적부터 그 뜻을 충분히 이해할 만큼 추석 전후는 가만히 있어도 기분이 좋아지는 시기가 아닐까 한다. 유난히 더운 9월이지만 오곡이 무르익는 계절인 만큼 모든 것이 풍성하다. 설령 물가가 비싸고 내 실제 삶은 좀 쪼들려도, 점점 높아지는 하늘만 봐도 기분 좋아지는 철이다.

'5월 농부 8월 신선'이라는 말도 있다. 봄여름에 고되게 일하던 농부들도 음력 8월은 점점 선선해지는 날씨에 한결 가벼운 몸짓이 되며, 어느 정도 농사가 마무리되어 신선처럼 느긋하게 한 해를 마무리해 가고 이듬해의 풍년을 기원하며 준비할 수 있다.

무엇보다 눈앞 가득 한 해의 수확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 마음이 얼마나 넉넉할지 농사일을 하지 않아도 그 흐뭇함을 상상해볼 수 있다. 이런 마음은 추석을 지내는 우리뿐만 아니라 옛 유럽에서도 마찬가지였고 그런 모습을 남긴 작품들이 적지 않다.

대(大) 피터르 브뤼헐이 1565년에 제작한 '추수하는 사람들'은 늦여름 밭에서 밀을 수확하는 농부들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같은 성(姓)을 가진 아들들까지 모두 유명해서 끝에 '나이 많은'이란 의미의 '더아우데(de Oude)'를 특별히 붙여 부르는 피터르 브뤼헐은 16세기 플랑드르 지방 민초들의 삶을 애정 가득한 눈으로 들여다본 뒤에 만든, 사실적이면서도 해학적인 풍속화 작품을 많이 남겼다.

브뤼헐이 1년 중 가장 특징적인 여섯 시기를 골라 만든 일련의 작품들 중 늦여름 시기를 그린 것이 바로 '추수하는 사람들'이다. 오른편 하단에 일을 마치고 쉬는 이들의 모습이 재미있다. 자세히 보면 이들은 수확한 볏짚을 의자 삼아 편하게 자리 잡고 빵과 치즈, 수프 같은 음식을 열심히 먹고 있으며, 아예 항아리째 물인지 술인지를 마시는 사람도 있다. 나무 그늘에서 대자로 뻗은 이는 입까지 벌리고 단잠에 빠져들어 있고, 숟가락을 사용하지 않고 수프를 그릇째 들이켜는 소년은 아버지 같은 이에게 한 소리를 듣고 있으며, 그 옆의 여인이 이 광경을 보면서 웃고 있다.

고된 노동이 끝나고 맞이하는 식사 시간이 얼마나 행복한지 우리는 이미 다 알고 있는데, 내가 열심히 기른 농작물로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다는 건, 그리고 이제 곧 이 힘든 일도 다 끝나가는 게 눈에 보인다는 건 과연 얼마나 신날까.

그렇다고 놀고먹는 모습만 있는 것은 아니고, 달콤한 휴식과 밀접하게 결부된 노동이 더 많은 범위에 드러나 있다. 황금빛 밀밭을 배경으로 그림 왼편 앞쪽에는 열심히 낫을 휘두르며 일하는 농부들이 보인다. 쉬는 사람들 바로 뒤에도 허리를 깊이 굽혀 사과를 줍고, 볏짚을 정리하는 이들이 있다. 키보다 높은 밀밭 사이로 만든 길에는 멀리 수레 쪽으로 이미 거둔 작물을 들고 옮기는 여인들의 모습도 있고, 이쪽으로는 한 남자가 마실 것이 잔뜩 든 항아리를 낑낑대며 들고 오기도 한다.

계절이 무르익으며 대지는 우리에게 풍성한 먹거리를 만들어 주지만, 그게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은 아니고 모두 이처럼 농부들의 고된 노력으로 겨우 우리 식탁까지 오게 되는 것이다. 5월에 성실하게 일한 농부만이 8월에 신선이 될 수 있다. 이른 봄부터 열심히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비료를 줘가며 잡초를 솎아내고 비바람에 쓰러지지 않도록 잘 돌보아야 가을에 좋은 곡물을 수확할 수 있는 것은 누구나 아는 진리이다.

대부분의 우리 생활도 농부와 다를 바 없고, 지금 같은 초가을이야말로 한 해가 완전히 끝나기 전에 올해 자기 농사를 잘 지어온 것인지를 돌아볼 때이다. 새해에 꿈꿨던 계획 중에서 이미 그 목표를 달성한 것도 있고, 아직 시작조차 못 한 것도 있지만, 올해가 아직도 3분의 1 정도 남아 있다.

추석 연휴 기간 동안 잘 먹고 잘 쉬며 좋은 시간을 보냈으니, 이제야말로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 제대로 진정한 한 해의 수확을 거두겠다고 결심해도 늦지 않다.

[이지현 OCI미술관장(미술사)]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