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달아, 달아, 내 소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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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날 늦은 저녁에 같이 사는 식구와 달맞이를 하러 나갔다.
'한가위만 같아라' 하는 덕담이 지금 이 순간에도 어울릴까? 탐스러운 보름달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지만, 폭염주의보가 내려진 날씨를 생각하면 '올해 추석만 같아라'라는 말로 소원을 비는 건 무리 같았다.
물가 안정과 세계 평화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으나 그보다 먼저 내 마음을 가볍게 해줄 실질적인 바람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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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에 성묘마저 고생길로
풍속·문화 세월따라 변해도
안녕 바라는 맘은 변치않길
추석날 늦은 저녁에 같이 사는 식구와 달맞이를 하러 나갔다. 해가 졌는데도 한낮의 열기가 수그러들지 않아 살갗에 닿는 공기가 후텁지근했다. 그래도 보름달만은 어느 한 귀퉁이 찌그러져 있지 않은 채 까만 하늘에 두둥실 떠 있었다. 달과 지구의 거리가 가장 가까운 날에 볼 수 있다는 특별한 슈퍼문이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달을 보며 소원을 빌던 나는 문득 말을 멈추고 생각했다. '한가위만 같아라' 하는 덕담이 지금 이 순간에도 어울릴까? 탐스러운 보름달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지만, 폭염주의보가 내려진 날씨를 생각하면 '올해 추석만 같아라'라는 말로 소원을 비는 건 무리 같았다. 풍성한 오곡백과를 즐기기엔 물가가 무서울 정도로 치솟았고 서울 하늘엔 오물 풍선이, 나라 밖 어딘가에선 폭탄을 장착한 드론이 날아다녔다. 게다가 딥페이크 범죄 때문에 달맞이하는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기에도 겁이 나는 세상이었다. "안녕하세요"라는 누군가의 안부 인사에 잘 지낸다는 답을 하기가 쉽지 않은 시기였다.
명절을 맞아 오랜만에 만난 친척들 사이에도 기나긴 무더위가 화제였다. 나는 며칠 전 엄마와 이모들이 대전 현충원으로 할아버지의 성묘를 다녀왔다는 걸 들은 터라 잘 다녀왔느냐고 물었다. "이야, 말도 마라. 더워서 죽는 줄 알았다." 이모는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표정으로 그날의 상황을 재연했다.
"할아버지 앞에 딱 앉는 순간 땀이 주룩주룩 나는데, 우리가 얼음 막걸리를 가져갔거든? 그걸 한 모금 마시니까 죽겠는 거야. 아이고, 얼마나 더운지. 아버지, 나 더워서 못 있겠어. 우리 저기 그늘에 갔다 올게!" 이모는 코미디언처럼 어깨를 움찔거리며 더위에 몸서리치다 줄행랑을 치는 연기를 했다. 성묘에 나설 땐 할아버지 앞에서 울기도 하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려 했지만, 그런 마음이 싹 가실 만큼 너무 더웠다고 했다. 나는 그 고생담이 안타까우면서도 익살스러운 이모의 연기에 눈물이 맺힐 만큼 웃었다.
"그러다 온열 질환으로 쓰러지면 어떻게 하려고요. 요즘엔 응급실도 못 가는데." 내가 겨우 웃음을 멈추고 말하자 친척 어른들은 안 그래도 요즘엔 아프지 않으려고 평소보다 몇 배로 조심하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아마 내년에도 더울 거라고, 앞으로는 선선한 가을에 성묘를 다녀오시라고 당부했다. 여름에 태어나 여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위해 자식들은 기일에 맞춰 성묘를 갔지만, 이제는 그 애도의 방식마저 기후위기에 적응해야 했다.
달을 보며 내가 기원하는 소망도 '가을 폭염'이란 신조어에 맞게 바뀌었다. 달맞이를 하고 온 밤, 나는 '달타령' 노래를 듣다가 뒤늦은 소원을 빌었다. "올겨울엔 옆집 사람이 에어컨을 달게 해주세요."
나는 내년 여름에 닥쳐올 폭염을 미리 걱정하며 부디 옆집 사람이 할인 기간에 맞춰 집에 에어컨을 들이길 바랐다. 물가 안정과 세계 평화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으나 그보다 먼저 내 마음을 가볍게 해줄 실질적인 바람이 흘러나왔다. 올여름 역대 가장 긴 열대야라는 기사를 볼 때마다 에어컨 없이 지내는 옆집 사람의 안부가 걱정됐다. 에어컨을 가동하는 데 어마어마한 전력이 소모되고, 그 결과 더 심한 기후위기가 닥쳐온다 해도, 우선 손톱 밑에 가시 같은 내 불편한 마음을 해소하고 싶었다. 추석날 달빛 아래 모여 강강술래를 돌았던 과거의 풍속은 머지않아 에어컨 아래에서 홀로그램 달을 보는 것으로 바뀔지도 모르겠다. 그때도 우리는 달을 보며 소원을 빌 수 있을까. 인간의 문명은 달을 넘어 화성에 다다를 만큼 발전했지만, 그 기술의 발달이 달빛을 올려다보며 세상의 안녕을 바라는 마음마저 모두 휩쓸어가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김멜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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