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닥다리라 비웃지마라 더 독해진 노장의 질주

문일호 기자(ttr15@mk.co.kr) 2024. 9. 20.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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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조정·AI로 체질개선한 레거시 기업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기준금리를 0.5%포인트나 내린 것은 주식시장에 '양날의 칼'이다. 금리 인하로 유동성을 풍부하게 공급해 주가를 끌어올리는 요인이 되지만 연준의 금리 인하는 향후 몰아칠 경기 침체를 예고한다는 점에서 주식시장에 악재가 될 수도 있다. 경기 침체가 가시화되면 기업들의 실적은 악화되고 이는 주가를 끌어내리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런 가운데 경기 침체를 예상하고 구조조정을 단행한 전통(레거시) 기업들이 주목받고 있다. 월스트리트는 개인용 컴퓨터(PC) 시대의 유산인 IBM과 델 테크놀로지(델), 대형 할인마트 업계 넘버원 브랜드 월마트, 스포츠 스타 마케팅의 원조 나이키에 주목하고 있다. 그동안 저성장에 빠졌다가 인공지능(AI)을 장착하고 대규모 구조조정에 나서며 각성한 '명가'들이 투자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 특히 AI 테마를 이끌었던 빅테크의 주가가 워낙 고평가된 탓에 기대 수익률이 떨어지고 있는 것과 대조된다.

레거시 기업들은 지난 수년간 기존 사업 방식을 고수하느라 빅테크의 절반 수준에도 못 미치는 이익률에 그쳤다. 하지만 외부에서 AI라는 '치트키'(강력한 무기)를 도입하고, 내부적으로는 탈중국 등 인력 조정으로 마진을 높이며 주가가 상대적 강세를 보이고 있다. 이들 종목은 최근 1년 새 영업이익률이 상승해 월가 목표주가가 오르고 있지만, 다른 AI 관련 기업보다 저평가 상태라 향후 주가 상승 탄력이 높다는 것이다. 월가에선 지나치게 빅테크 위주의 포트폴리오를 갖고 있다면 이들 종목을 편입해 투자 수익률을 높일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AI 플랫폼과 '탈중국'으로 완벽 부활한 IBM

1911년 뉴욕에서 창립한 IBM은 카드분류기나 펀치카드와 같은 정보처리 기계를 만들었다. 이후 PC까지 석권하며 정보기술(IT) 시대 레거시, 그 자체가 됐다. 그러나 IBM은 스마트폰 시대를 열어젖힌 애플 때문에 과거의 유물로 한동안 머물렀다. 2010~2019년 주가가 30% 넘게 하락하며 투자시장에서도 '찬밥' 신세로 전락했다.

그러던 IBM 주가가 최근 1년 새 50% 가까이 오르며 월가가 이 레거시 브랜드 이름을 소환하고 있다. IBM의 AI 서비스는 '왓슨'으로 대표된다. 왓슨은 마이크로소프트(MS)나 구글과 같은 클라우드 기반 AI 서비스와 달리 기업 내부 서버에 직접 설치해 운영한다는 점에서 비용 절감형 플랫폼이다. 특히 IBM의 왓슨은 의료 데이터를 분석하는 헬스케어와 테니스 해설 등 스포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19일 블룸버그에 따르면 AI 효과로 지난 2분기(4~6월) IBM 실적이 월가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미국 주식은 주당순이익(EPS)이 중요한데 EPS를 통해 회사 성장성과 주주환원 정도를 한 번에 볼 수 있기 때문이다. EPS를 높이려면 매출 증가와 함께 비용을 줄여야 한다. 실적이 정체됐을 때는 주식 수를 줄이는 소각을 통해 EPS를 끌어올릴 수 있다. 월가는 IBM의 2분기 EPS를 2.2달러로 추정했는데 실제로는 이보다 10.5% 높은 2.43달러를 달성했다.

여기에 탈중국 효과로 얻은 비용 절감도 '깜짝 실적'의 이유로 제시된다. IT 업계에 따르면 IBM은 올 들어 중국 연구개발(R&D) 직원들의 사내 인터넷 접속 차단을 시작으로 대규모 감원을 진행 중이다. 업계 관계자는 "IBM이 베이징, 상하이, 다롄 등 중국 법인에서 1000여 명을 해고할 것"이라며 "이는 작년에 시작된 대대적 구조조정의 일환"이라고 말했다. IBM은 작년 1월 중국에서 직원 3900명을 감축한 데 이어 같은 해 말 AI로 8000명의 직무를 대체한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IBM의 글로벌 직원 수는 2020년 말 35만2600명에서 2023년 말 28만2000명으로, 3년 새 20%나 감소했다. '탈중국'의 이유는 중국 경기만 유독 좋지 않아서다. 작년 중국 법인 매출은 전년 대비 19.6% 줄어든 반면 다른 아시아·태평양 지역은 1.6% 증가했다. 최근 주가 급등에도 불구하고 IBM의 향후 12개월 예상 순익 기준 주가수익비율(PER)은 19.96배다. MS(32.57배)보다 저평가된 상태다.

구닥다리 PC 업체 델 S&P500으로 화려한 입장

PC 전성시대의 대표 주자였던 델은 최근 AI 서버 매출 증가로 올해 주가가 급등세를 보이며 투자자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월가는 델의 2분기 EPS가 1.71달러라고 예상했는데 실제로는 이보다 10.5% 높은 1.89달러를 기록했다. 델의 고객들이 여전히 AI 서버를 사느라 줄을 서 있으며 델의 지속적인 자사주 소각이 배경으로 자리 잡았다는 분석이다.

최근 이 회사 창업자이자 최고경영자인 마이클 델은 AI 수요의 단기 침체 우려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했다. 그는 "엄청난 AI 수요가 있고 성장 중"이라며 "대형 클라우드 업체 등 기업에서 전 세계 각국까지 수요처가 계속 확장되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 델의 지난 2분기(5~7월) AI 서버 매출은 31억달러에 달했는데 이는 직전 1분기(17억달러)보다 82.4%나 급증한 수치다. AI 서버를 포함한 델의 인프라스트럭처 솔루션 매출은 1분기보다 38% 증가한 116억5000만달러를 기록했다. 이 사업부 실적은 AI 시대가 열리기 전까지 주력 사업이자 또 다른 사업부의 부진을 만회하고도 남는다. 같은 기간 PC와 노트북을 판매하는 클라이언트 솔루션 매출은 4% 감소했다. 이는 델의 한 자릿수 영업이익률로 이어지고 있다. 작년 2분기 5.5%에서 올 2분기 5.7%로 소폭 개선되는 데 그쳤다.

향후 마진은 나아질 가능성이 높다. 델은 최근 3년 새 직원 수를 24.1%나 줄였는데 이는 IBM(-20%)보다도 과격한 구조조정이다. 주식 수는 7월 말 현재 기준으로 1년 전보다 2.6% 감소하며 EPS 상승을 견인했다.

여기에 AI를 장착한 델의 PC가 신규 수요로 이어질 것이란 전망에 월가는 델의 목표주가를 상향하고 있다. 델의 PER은 14.84배에 그친다. 최근 JP모건은 보고서를 통해 "지속적인 영업비용 감소와 중장기적 AI 매출 성장세를 고려하면 델의 현 주가는 미래 실적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 델은 2021년부터 배당을 주기 시작했는데 당시 연간 주당 배당금은 0.33달러였다. 올해는 1.74달러가 예상되는데 3년 만에 5배 이상 인상한 수치다. 최근 델이 미국 우량기업 지수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에 편입된 것은 당연하다는 반응이다.

AI 날개 달았더니 주가 우상향하는 월마트

월마트는 창고형 할인매장 업계의 세계 시가총액 1위 기업이다. 수년 전까지만 해도 '온라인 강자' 아마존 때문에 그 이름이 묻힐 것이란 예상이 많았다. 그러나 최근 실적 발표 당시 AI로 야무지게 비용을 절감하고 고객들의 호평까지 받으며 당당하게 'AI 관련주'로 묶이고 있다.

수년간의 노력으로 월마트는 대규모언어모델(LLM)을 활용해 8억5000만개의 제품 정보를 문서화하는 데 성공했다. LLM은 주로 언어 번역과 문서 처리에 활용되는 대표 AI 기술이다. 이는 고객의 쇼핑 시간을 줄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직원들의 업무 만족도를 높여줘 전반적인 비용 절감으로 실적에 반영되고 있다. 월마트의 2분기(5~7월) EPS는 0.67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9.8% 증가했다. 월가 예상치(0.65달러)보다도 3.1% 초과 달성했다. 월마트의 EPS가 월가 추정치를 초과 달성한 것은 이번 분기를 포함해 9개 분기 연속이다.

경기 침체 우려로 매출 성장이 둔화됐지만 AI 기술과 인력 구조조정으로 비용을 줄여나가고 있다. 최근 3년 새 직원 수는 8.7% 감소해 210만명(작년 말 기준)이다. 이렇게 줄인 비용을 주주들에게 돌려준다.

코로나19 사태 직전인 2019년 월마트의 연간 배당금은 주당 0.71달러였는데 올해는 0.83달러로 추정된다. 5년 새 배당 인상률은 16.9%다.

[문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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