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카 끈매듭·인디언 소가죽도 어엿한 책

김유태 기자(ink@mk.co.kr) 2024. 9. 20. 16:51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잉카문명 길이 2m넘는 끈매듭
가축 수·빌린 대금 기록한 듯
라코타족은 버펄로 소가죽에
마을서 벌어진 1년 사건 기록
조선시대, 中·日보다 책 숭상
최초의 책은 기원전 33세기
점토·가죽·천연 섬유서 시작
이젠 디지털 스크린으로 진화

안데스의 험준한 산맥에선 키푸(khipu)란 이름의 끈매듭이 종종 발견된다. 잉카 문명의 유산이자, 잉카인의 무덤에서 나오는 고대 유물이다. 중심 끈은 대략 길이가 2m를 넘고, 여기에 100개는 족히 넘는 하위 끈들이 줄줄이 매달려 있다. 발굴된 키푸 가운데 최다수 끈은 762개. 더 자세히 보면 하위 끈 10개가 하나의 매듭을 이룬다.

면이나 라마 털로 만든 끈매듭의 용도가 뭔지를 알지 못했던 학자들은 긴 탐구 끝에 끈매듭의 의미를 해석해냈다. 그건 장식물이 아니라 소유한 가축 수나 빌린 대금의 잔액을 기록한 '십진법의 기록물'이었다. 즉, 저 매듭 하나하나가 '문자'를 대신했던 것. 따라서 매듭 전체가 현대로 따지면 한 권의 '책'이었던 것이다.

옥스퍼드 책의 역사 제임스 레이븐 외 15인 지음, 홍정인 옮김 교유서가 펴냄, 3만8000원

신간 '옥스퍼드 책의 역사'가 출간됐다. 책이 출몰한 시점을 기원전 33세기로 잡고, 무려 53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인류의 책을 탐험하는 600쪽이 넘는 벽돌책이다. '무엇이 책을 책이게 하는가?'란 근원적 질문에서 시작하는 이 책은, 불변적이지 않고 언제나 변화에 능했던 '책의 가변성'을 탐험한다.

갑골문자나 점토판 등 낯익은 단어들은 건너뛰고, 흥미를 돋우는 부분만 들여다보자. 현대 인류는 책을 대개 '종이책' 형태로 생각한다. 80억 인류가 태어나기 전부터 종이책만 봐왔으니 그럴 법도 하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끈 매듭 책'처럼 옛날엔 기이한 책이 다수였다고 책은 쓴다.

북아메리카 평원의 라코타족은 17세기에 특이한 책을 매년 제작했다.

당시에도 종이는 상용화됐지만 라코타족은 종이가 아닌 특수 소재를 사용했다. 바로 소가죽, 버펄로 가죽이었다. 거기엔 짐승의 '꼬리'까지 달려 있었다.

라코타족은 한 해 동안 가장 중요했던 사건을 가죽 정중앙에 그리고 이를 중심으로 시계 반대 방향으로 모두가 기억해야 할 사건을 순서대로 기록했다. 일종의 '마을 연감'이었다. 그러므로 이 동물 가죽 책은 "무릇 책이란 종이 위에 단어가 쓰여 있어야 한다"는 편견을 전복시키는 증거품이 된다.

중세 시대 책은 대부분 규모가 컸다. 장엄하고 큼직한 서체로 신앙의 위용을 과시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럽 설교자들은 그런 책을 들고 나가기가 거추장스러웠다. 움직이기 편하려면 책은 가벼워야 했다. 그 때문에 거대 텍스트보다는 작은 텍스트, 큰 종이보다 작은 종이가 선호됐다. 더 작은 책에 관한 열망이 높아지던 중 결국 "안경 없이는 읽을 수 없을 정도의 작은 글씨"로 쓰인 책까지 나왔다. 이런 책은 독서 용도라기보다 기도 소품, '액막이 부적'에 가까웠다.

중세를 넘어서면서 유럽 출판 산업은 나날이 번창했다. 몸집을 키우는 출판업자들과 달리 작가들은 가난했다. 당시엔 저작권 개념도 희박해서 몇몇 출판업자들은 '원고료를 한 푼도 내지 않는' 해적판을 냈다.

이를 드러내는 상징적 사건이 18세기에 발생했다. 바로 '괴테 전집' 사건이다. 독일 베를린에서 성업 중이던 한 출판업자는 괴테의 전집을 보란 듯이 내고는 정작 원작자 괴테에겐 고작 '접시 세트'를 선물로 보냈다. 괴테는 한 벗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남겨 비양심적인 출판업자의 만행을 역사에 새겨버렸다.

'난 도자기 접시나 빵을 얻기 위해 글을 쓰지 않는다. 죽은 작가에게도 벌어지지 않을 일이 살아 있는 나에게 벌어졌다.'

책은 동서양을 가로지르며 한국 출판의 역사도 깊이 들여다본다. 한국은 한·중·일 동아시아 3개국 가운데 책을 가장 중요시했던 나라, 심지어 추앙하기까지 했던 국가였다고 이 책은 기록한다. 16세기 조선의 스승들은 학생들에게 '격몽요결'을 읽히면서 책 앞에 두 손을 모으고 무릎을 꿇으라고 했다.

책을 읽는 건 신성한 행위, 책은 고귀한 가치와 불변하는 진리의 전달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신성성이 조선에서 책 생산이 제한된 이유라고 이 책은 설명한다. 조선 조정은 텍스트 생산을 19세기까지 장악했다. 반면 일본은 그 시기 출판업이 활황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책의 잠재력을 알아봤다. 17세기 무렵 일본 교토와 오사카는 도서 거래의 중심지였다.

현대에 '세상에서 가장 큰 서점'이 탄생했으니 그 이름은 바로 '아마존닷컴'이었다. 태양 아래 존재하는 모든 것을 팔았던 이 플랫폼은 '킨들'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책을 만들어냈다. 종이책에 익숙하던 세대는 전자책의 등장에 놀랐지만 저자는 킨들 역시 "근대 후기의 소비자가 읽고 싶은 것을 골라 읽게 해주는 수많은 포맷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점토나 가죽, 천연 섬유에서 시작돼 어느덧 디지털 스크린, 중앙처리장치(CPU), 임의접근기억장치(RAM), 그리고 그래픽카드를 근간으로 하는 방식으로 진화한 책은 결국 '무엇이 책을 책이게 하는가?'란 질문에 답한다. 요약하면 이렇다.

"책의 본질이란 물질적 형식이 아니라 수단이다. 한 가지 유형의 책의 역사란 있을 수 없으며, 여러 가지 책의 역사가 있었을 뿐이다. 절대적인 의미로서의 '책의 역사'란 인간이 책의 본질을 오독한 결과다. 일관한 하나의 형태로서의 책의 역사는, 처음부터 없었다."

[김유태 기자]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