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페이크 알기 전부터 ‘더 빨리, 더 자주’…‘불편함’ 깨달을 때, 아이들은 배운다 [플랫]
최근 사회적 충격을 일으킨 딥페이크 성범죄에서 눈에 띄는 점은 가해자와 피해자 상당수가 10~20대라는 사실이다. 디지털 기기와 기술에 친숙한 청소년·청년 세대가 별다른 경각심 없이 디지털 성범죄에 빠져들고 있다는 방증이다. 전문가들은 이런 현상을 멈추려면 교육 현장에서 ‘시간 때우기’가 아닌 변화된 환경에 맞춰 성인지 감수성을 기를 수 있는 실질적인 성교육, 성폭력 예방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히 딥페이크 성범죄를 예방하려면 여성과 성에 대한 사회와 자신의 왜곡된 인식을 성찰하고, 피해자 입장에 공감하도록 하는 교육이 필요하다. 경향신문은 지난 10~11일 이런 문제의식을 반영해 초등학생·대학생에게 성폭력 예방 교육을 하는 현장을 찾아가 강사와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플랫]딥페이크 성착취물이 ‘장난’이었다는 아이들, ‘반성’을 가르치려면
‘불편함’ 깨달아야 세상 변한다…‘소통형’ 교육하면 아이들은 서로에게 배워
“여성 아이돌에게 유튜버가 성적인 말을 하는 ‘쇼츠’를 봤다. 댓글에서는 사람들이 ‘재미있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너무 역겨웠다.”
지난 10일 오전 서울 강동구의 한 초등학교 5학년 교실에서 디지털 성폭력 예방 교육 강사 조은영씨(50)가 ‘내가 보고 들은 야한 말·행동’ ‘그 대상이 된 성별’ ‘그 때 나의 감정’을 노란색 메모지에 적게 하자 한 아이가 이렇게 적었다. 다른 아이는 “남자아이가 여자아이 가슴을 치고 지나가는 걸 본 적이 있는데 기분이 너무 더러웠다”고 적었다. 학생 24명이 메모지에 적은 내용은 대부분 여성을 향한 성희롱적 말과 행동이었고, 학생들은 이로 인해 ‘불쾌했다’고 적었다. 이날 아하서울시립청소년성문화센터가 진행한 예방 교육은 이렇게 학생들이 자신의 경험을 나누며 시작했다.
조씨가 “여러분 야한 거는 나쁜 건가요?”라고 묻자, 학생들은 우렁찬 목소리로 “아니요!” “자연스러운 거예요!”라고 외쳤다. 조씨는 이 대답에 “그런데 여러분은 왜 기분이 나빴을까요? 성에 대해 궁금해하는 건 잘못이 아니지만, 그 궁금증 때문에 다른 사람을 성희롱하고 물건처럼 대하는 거는 잘못이기 때문이에요”라고 설명했다.
그는 기자에게 “어린아이들도 타인을 성적 대상화하는 것이 불쾌한 일이라는 것은 직감적으로 알고 있다”며 “‘야한 것’과 ‘성적 대상화’의 차이를 정확히 짚어주고, 주로 여성이 성적 대상화되는 이유를 고민하게 하는 게 예방 교육의 역할”이라 말했다. 조씨는 “학년이 올라갈수록 ‘야한 말·행동’을 적어보라 하면 성적 대상화에 해당하는 말을 적고도 키득거리며 웃거나 ‘야한 장난’ 정도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럴 때 다른 친구들이 왜 그러한 말이 잘못된 것인지 설명해 주면 아이들도 수긍하곤 한다”며 “예방 교육 영상만 틀어주는 게 아니라 친구들과 눈을 맞추고 소통하는 교육을 하면 아이들은 서로를 가르치고 배운다”고 했다.
성적 대상화에 ‘불편함’을 느끼고 표현해야 범죄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은 예방 교육의 핵심이다. 이날 수업에서 조씨는 ‘대학 내 단톡방 성희롱’ ‘n번방’ ‘딥페이크 성범죄’ 사건 등 실제 범죄 사례들을 소개했다.
“남학생들만 있는 단톡방에 몰래 찍은 여학생들 사진을 올려서 성희롱하고, 여학생들을 성추행하겠다고 말하면서 키득키득 웃었대요. 그런데 이 일이 어떻게 알려지고 뉴스에도 나왔을까요? 어떤 남학생들은 웃고 재밌어했지만 어떤 남학생은 웃는 게 불편했고, 문제를 알렸기 때문이에요. 우리에게는 이런 불편함이 필요해요. 그래야 안전한 세상이 되는 거예요.”
학생들은 “불편해야 안전할 수 있다”는 조씨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A군은 “불편함을 느낄 줄 알아야 문제를 바로 알아차릴 수 있다는 걸 배웠다”면서 “자기 인권이 소중하면 남의 인권도 소중히 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고 말했다.
조씨는 예방 교육이 “금지와 통제에 목적을 둬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사회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서로를 존중하는 법을 가르치는 데서부터 예방 교육을 시작해야 한다”며 “딥페이크 범죄 때문에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사진을 올리지 말라고하는 것은 여성 청소년들에게 자신을 표현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이라 말했다.
“옆의 여성이 동등한 존재임을 인식하기”
“‘우리 집에 넷플릭스 보러 갈래?’ 오늘의 성교육 주제입니다. 흔한 플러팅인데 갑자기 왜 이런 주제로 말하는지 궁금하시죠?”
지난 10일 경기 안성시 중앙대 다빈치캠퍼스 인권센터는 ‘포괄적 성교육’을 진행했다. 강사로 나선 남다른성교육연구소 성평등교육전문위원 이한씨가 교육 주제를 말하자 야외 광장에 모인 학생 25명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이씨는 “n번방 사건부터 딥페이크 성착취물 사건까지 모두 옆에 있는 여성이 나와 동등한 존재, 소통하고 관계 맺을 수 있는 존재로 인식하지 못해 벌어진 일”이라며 “머리로만 동의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실천할 수 있는 교육을 하려 한다”고 말했다
이날 수업은 동영상 시청으로 끝나곤 하는 기존 성교육과 달리 야외에서 강사와 대면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본격적인 수업은 ‘동의의 감각’을 몸으로 익히는 것부터 시작됐다. 학생 두 명씩 짝을 이뤄 손가락을 맞대고 상대방이 움직이더라도 손가락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과제였다. 이씨의 지시에 따라 학생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줄곧 상대방이 어디로 움직일지 의중을 파악해 따라가려는 모습이었다. 이씨는 “손끝만으로도 상대방이 움직이고자 하는 태도와 의도를 사전에 얼마나 잘 알아차릴 수 있는지를 피부로 느껴보도록 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성인 대상 교육인만큼 성적 관계에 대한 현실적이고 직설적인 조언도 나왔다. 이씨가 “나에게 섹스가 어떤 의미인지 고민해봐야 한다”고 말하자 조금 전까지 서로를 마주보며 웃던 학생들이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씨는 “왜곡된 남성성에 빠져 거대한 성기 스펙에 대해서만 얘기하기에 앞서 상대방과 대화를 제대로 나눠본 적 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며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를 값싼 성인용품과 다를 바 없는 존재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플랫]‘금욕적 성교육’이 만든 ‘성교육 과외’, ‘포괄적 성교육’으로 바뀔 이유
그간 ‘정자와 난자가 만나 임신이 이뤄진다’ 같은 성적 성장을 설명하는 데 그치는 성교육만 받았던 학생들은 이날 강의를 들은 뒤 “이렇게 제대로 된 성교육을 듣고 싶었다”고 말했다.
3학년 김류광씨는 “옛날에 받은 성교육에선 성희롱 상황에서 ‘하지 마세요’ ‘싫어요’라고 말하라고 하지만 과연 현실에서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냐”며 “성교육 강사가 ‘섹스’라는 단어를 별스럽지 않게 말하는 개방적인 성교육을 해야 우리 사회가 바뀌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성적 성장뿐 아니라 성인지 감수성을 확립할 수 있는 교육이 청소년 때부터 이뤄지면 좋겠다는 의견도 있었다. 3학년 홍다영씨는 “타인을 지배하는 것이 자신의 성적 요구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디지털 성범죄가 벌어진다는 사실이 오늘 같은 교육을 통해 더 많이 알려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학생들의 요구와 달리 포괄적 성교육이 광범위하게 이뤄지기는 쉽지 않다. 포괄적 성교육에 대한 백래시가 심해졌고 관련 예산이 삭감됐기 때문이다. 이씨는 “그간 인천에서만 10여군데 학교로 교육을 나갔는데 올해는 불과 2~3곳으로 줄었다”며 “성교육 예산이 이렇게 확 줄었다는 점에서 보자면 딥페이크 성착취물 사태는 사실상 정부가 방치해서 벌어진 일”이라고 말했다.
딥페이크 알기 전부터 ‘더 빨리, 더 자주’
“아~ 너무 불쾌해요! 왜 저러는 거예요?”
지난 11일 오전 대구 동구 송정초등학교 3학년 5반. 학생 24명은 푸른나무재단의 ‘푸른코끼리 사이버폭력 예방교육’ 중 사이버 공간에 퍼진 신체 사진 때문에 힘들어하는 오리 캐릭터의 사연을 영상으로 보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사이버 성폭력’이라는 표현이 익숙하지 않은 학생들이지만 오리가 겪은 일이 장난이 아니라 폭력이라는 것을 쉽게 인지했다. 학생들은 4교시 동안 사이버 폭력의 여러 유형을 배우고, 각각의 폭력 상황에서 피해자 또는 목격자로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토의했다.
딥페이크뿐 아니라 디지털 환경에서 벌어지는 학교 폭력 양상이 점차 진화하면서 학생들이 새롭게 알아야 하는 폭력 유형도 많아졌다. 사이버 공간에서 계속 따라다니며 반복적으로 댓글을 다는 것이 ‘사이버 스토킹’이고, 기프티콘이나 개인정보 제공을 강요하는 것이 ‘사이버 갈취’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날 교육에선 사이버 폭력을 예방하려면 정직·약속·용서·책임·배려·소유 등 친사회적 능력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 강조됐다. 푸른나무재단에서 4년째 활동 중인 강사 조영신씨는 “친사회적 능력을 일상 속 어디서든 활용할 수 있어야 사이버 환경에서도 실천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학생들이 실제로 처할 법한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고민하게 하는 것이 교육의 핵심이었다. 학생들은 단체 채팅방에서 친구가 따돌림당하는 모습을 목격했을 때, 가해자가 사실 과거 피해자라서 복수하려고 하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게 됐을 때 등 딜레마적인 상황에서 각자 어떻게 할 것인지 골똘히 고민했다.
주변인으로서 폭력 상황을 방관하지 않고 피해자에게 공감하는 모습이 중요하다는 것도 중요하게 다뤄졌다. 단체 채팅방에서 언어폭력을 목격했을 때 단순히 채팅방을 나가겠다고 말하던 학생들도 ‘피해자가 주변에 자기편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라는 강사의 질문을 듣고 난 뒤에는 “피해자에게 응원의 말을 전달하겠다”고 말했다.
📌[플랫]‘딥페이크 공문’ 받은 엄마들…“딥페이크 토양 제공한 건 어른들, 지금이라도 성평등 교육 구상해야”
학생들은 영상물 시청에 그치던 교육과 달리 대처법을 스스로 고민해본 교육이 도움됐다고 말했다. 이다연양(9)은 “릴스에서 사이버 폭력에 대한 얘기를 볼 때마다 ‘언젠가 나도 피해자가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부모님이 걱정하실까봐 얘기하기가 어려웠다”며 “이번 교육을 계기로 주변인으로서 어떻게 할지 배웠고, 친구뿐 아니라 가족과도 교육 내용을 공유할 것”이라고 말했다.
교사들은 사이버 폭력 가해자·피해자 연령대가 점차 낮아지는 만큼 예방 교육도 훨씬 더 빨리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송정초 교사 김가은씨는 “초등학교 3학년만 돼도 대부분 휴대폰을 사용하고 게임이나 채팅을 사용하는 빈도가 많다 보니 사이버 폭력 관련 연령이 낮아지는 것을 체감한다”며 “훨씬 빨리, 자주 교육을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딥페이크가 무엇인지 아직 잘 알지 못하는 저학년 학생 대상 교육의 경우 내용을 더욱 섬세하게 꾸려야 한다. 김씨는 “초등학교에서 딥페이크 사례를 너무 자세하게 교육하면 오히려 문제 행동에 노출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며 “사이버 공간에서 바른 행동이 무엇인지 제시하는 한편 영상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체험이나 직접 판단할 수 있는 교육 기회가 더욱 적극적으로 제공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 김송이 기자 songyi@khan.kr · 이예슬 기자 brightpearl@khan.kr
플랫팀 기자 fla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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