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나’를 주인공으로… 문학의 정치적 힘[북리뷰]
자크 랑시에르 지음│최의연 옮김│오월의봄
佛 철학자가 살핀 문학의 정치
보들레르의 시·위고의 소설 등
평범한 인물들에 스포트라이트
우리 모두 주인공임을 알려줘
지난 스무 해 동안,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는 우리 문학과 학술에 끝없이 샘솟는 영감의 샘물을 제공했다. ‘미학 안의 불편함’에서 그는 기성의 정치적·경제적 권력이 강제로 배분한 사회적 지위, 그 자리에 길들어 느끼는 정체성, 즉 ‘∼다움’이란 감각적 진실에서 벗어날 때, 해방이 일어난다고 말한다. 정체성은 본래 권력의 언어다. ‘여성다움’ ‘노동자다움’ ‘선생다움’ ‘시다움’ ‘노래다움’ 같은 정체성과 연결고리를 끊을 때, 몸에서 일어서는 쾌감이 곧 혁명의 출발점이다. 그는 이 지적 해방의 논리를 정치, 철학, 미학, 교육학 등으로 확장하면서 종횡무진 사고를 전개한다.
‘무지한 스승’에서 그는 스승의 정체성을 혁파했다. 스승이란 자신이 아는 바를 제자에게 가르치는 자가 아니다. 모르는 걸 가르칠 수 있는 사람, 즉 제자들과 함께 무지를 깨뜨려 가는 사람, 수업을 통해 스스로 정신을 해방하는 사람이다. ‘프롤레타리아의 밤’에서 그는 몫 없는 자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들의 꿈을 포착한다. 이들은 미리 배분된 자리에 머무르기를 거부한다. 근면하고 성실한 사축(社畜)도, 투쟁과 해방을 외치는 강철 전사도 아니다. 이들은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며, 인류애를 고뇌하고 형이상학을 사유한다. 그들은 주어진 정체성 바깥에, 그 가장자리에 해방된 존재로 걸터앉아 있다.
랑시에르에게 해방은 전적으로 미학적이다. 동시에 문학은 그 자체로 정치적 수행성을 가진다. 권력이 미리 배분해 둔 감성 체제대로 느끼며 살기를 거부하고, 이를 뒤섞고 전복해 혼란에 빠뜨리는 발화법의 존재는 그 자체로 사회를 바꾸는 힘이 있다. 이런 논리는 언어 혁신에 대한 몰입과 옹호의 형태로, 2000년대 중반 이후 한국문학을 지탱해 왔다.
신간 ‘픽션의 가장자리’에서 랑시에르는 문학에서 ‘보잘것없는 존재들’이 스스로 말하는 순간으로 독자를 이끌고 간다.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에서 그가 형식화한 현대 민주정치에서 밀려나고 배제되어 잊힌 자들, 즉 ‘몫 없는 자들’의 정치적 자리를 찾아주었듯이, 짝패를 이루는 이 책에서 그는 고전적 픽션에서 행위자로 여기지 않았던 자들, 사건의 주인공이 움직이는 경로에서 우연한 배경으로 등장해 자기 꿈과 언어를 드러낸 보잘것없는 인물의 몫을 되찾아준다. 시쳇말로 하면, ‘지나가는 사람 1’의 정치 미학을 정립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정립한 고전 픽션 미학은 극히 적은 수의 영웅들, 고귀한 자들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그들의 삶이 보여주는 번영과 불운, 기대와 반전, 무지와 지식 간의 게임에 인과성과 개연성을 불어넣는 데 집중한다. 나머지 인간들의 삶은 공허했다. 일상의 무의미한 반복에 갇히고 운명을 바꾸어 줄 경험의 부재에 종속되어 이야기의 무대에 등장할 수 없었다.
발자크와 위고 등이 아리스토텔레스적 세계의 가장자리에 머물러 있던 이들을 픽션의 세계로 끌어들이면서 근대문학이 시작된다. 가장 강렬하고 가장 복합적인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그러나 보잘것없는 개인들의 삶이 문학의 영토에 들어선 것이다. 한마디로, 근대문학은 영웅이나 성자가 아니라 비루하고 평범한 시민의 삶에 언어의 그물을 던지고, 거기서 소용돌이치는 감정과 사건의 세계에 이야기 형식을 부여한다. 이로써 겨자씨처럼 자잘한 존재들도 운명의 부침 속에서 각성할 수 있는 주체임이 드러난다.
보들레르의 시, 릴케의 산문, 위고·모파상·프루스트·버지니아 울프·제발트의 소설에서 랑시에르는 아무것도 아닌 자들이 반복되는 시간에서 벗어나 영혼의 깊이와 위엄을 갖춘 존재들로 격상하는 ‘임의의 순간’을 포착한다. 이런 순간을 그려내는 일은 “죽음에서 삶을 창조하는 것, 사소한 사건과 거의 지워진 흔적으로부터 역사를 창조하는 일”이고, “아무것도 아닌 어떤 삶의 단순한 불행을 모든 것으로 변화시키는 혁명”이다.
이야기 바깥에, 또는 이야기의 가장자리에 있던 무명의 존재가 이름을 얻는 이 거룩한 순간은 기존 언어가 고착해 온 인간과 사물의 낡은 배치가 해체되는 시간이다. 또 우리가 함께 딛고 있는 공통 세계,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평등 세계를 지각하고 사유할 수 있는 순간이기도 하다. 따라서 문학의 정치는 그 내용이 얼마나 변혁적이냐에 따라 잘 수행되는 게 아니다. 문학의 정치는 ‘아무나’ 이야기의 주인일 수 있음을, 즉 삶으로 이야기를 만들고 이야기로 삶을 살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는 사실 자체에 놓여 있다. 문학은 우리가 모두 주인공임을 알려준다. 336쪽, 2만2000원.
장은수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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