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으로 인한 죽음’, 경제학에 책임을 묻는다[북리뷰]

오남석 기자 2024. 9. 20.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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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경제학 나쁜 경제학
게티이미지뱅크

앵거스 디턴 지음, 안현실·정성철 옮김, 한국경제신문사 출간

"내가 이민을 온 1983년 이후 미국은 더 어두운 사회가 됐다. 이민자가 품을 수 있는 희망은, 여러 가지 현실적 이유가 작용한 탓도 있겠지만 미국 경제와 정치의 오염, 즉 우리의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그런 오염 때문에 훨씬 더 줄어들고 말았다."

소비와 빈곤, 복지 연구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2015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앵거스 디턴 미국 프린스턴대 공공국제정책대학원 명예교수가 새 책 ‘좋은 경제학 나쁜 경제학’(원제 ‘Economics in America’·한국경제신문) 서문에서 내놓은 미국 사회에 대한 진단이다.

디턴 교수는 고향인 스코틀랜드를 떠나 미국 이민을 감행한 뒤 "미국이 특별히 이민자뿐만 아니라 그들의 자녀에게까지 약속하는 부와 기회에 대해 경외감을 느꼈다"고 회고한다. 그런데 지금은 "온갖 종류의 불평등 지수 비교에서 미국은 지구상의 거의 모든 다른 나라보다 그 격차가 심하다"고 말한다.

약 40년의 시간 동안 미국은 어쩌다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하는 땅’에서 ‘많은 사람이 절망사(deaths of despair)하는 불평등한 땅’으로 바뀌었을까.

저자는 최저임금, 건강보험 및 의료 시스템, 인플레이션과 빈곤 측정, 빈곤의 원인과 해결 방법, 인종 차별, 연금과 주식시장 등 시민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구체적인 주제들을 중심으로 그 연원을 추적해간다. 그러면서 불평등이 심화하는 과정에서 경제학과 경제학자들의 책임은 없는지 따져 묻는다.

"미국은 유럽에 비해 그런 기회를 누릴 수 없거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을 지원하는 데 인색하다. 많은 사람은 이 두 가지 측면, 즉 미국에서 기회 활용의 불평등과 기회를 활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낮은 관심이 상호 연관돼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기회는 사람들이 그 기회를 잡는 것을 방해하는 안전망(safety net)이 없을 때 가장 잘 작동하며, 또 기회가 많으면 안전망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는 주장이다."

이는 미국 사회는 물론 경제학계까지 감싸고 있는 능력주의(meritocracy)에 대한 비판으로 연결된다. 미국 사회는 많은 기회가 있더라도, 어떤 사람들은 이런 기회를 다른 사람들보다 잘 이용한다는 점을 간과해 왔다는 얘기다. 이런 풍토는 진작부터 영국 경제학자들과 영국 사회에서 소득 불평등이 주요 화두였던 것과 달리 미국에서는 최근까지도 그런 고민이 없었던 이유가 됐다.

저자는 수많은 사람의 생계와 복지에 영향을 미치는 경제학과 경제학자들의 변화를 촉구한다. 불평등에 눈 감은 기존 태도로는 ‘민주적 자본주의’(democratic capitalism)의 약화가 가져온 재앙적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저자가 보기에, 그 재앙적 상황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게 절망사다.

"절망사와 관련된 재앙이 우리에게 말하는 바는 사람들은 자기 일과 그것에서 얻는 의미, 그리고 자기 가족과 자녀, 지역사회를 소중히 여긴다는 것이다. 민주사회의 제대로 된 공동체에서 품위 있는 삶을 살기를 바라는데, 이 모든 것이 대학 학위를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영위하기 어렵게 되어 가고 있다는 게 문제다."

재앙에서 벗어나기 위해 저자가 제시하는 해법은 미국 사회와 경제학자들이 재분배(redistribution)보다 선분배(Predistribution)에 대해 더 관심을 갖는 것이다. 선분배는 세금과 소득이전 등이 일어나기 전에 시장이 소득을 균등하게 배분하는 매커니즘으로, 어떤 경우에는 사람들이 원하지도 않고 소득격차 해소 효과도 없는 재분배보다 더 유효할 수 있다. 저자는 많은 경제학자들이 불안해 할 수 있겠지만 노동조합 장려, 지역 기반 정책, 관세, 일자리 보존 등 사람들의 고통을 ‘방지’하는 규칙과 정책을 검토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책의 성격을 단지 미국의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해 미국 사회와 미국 경제학자들에게 던지는 제언으로 축소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경제학자들이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정부와 시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더욱 현실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저자의 지적은 다른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특히, 한국처럼 극단적인 소득 양극화로 치닫고 있는 사회는 두말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동료 경제학자들을 향한 저자의 마지막 말은 더 큰 울림을 남긴다.

"무엇보다 철학자들과 더 많은 교류가 필요하다. 그래서 한때 경제학의 중심에 있었던 철학적 영역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

수많은 사람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경제학이 방향타 잃은 숫자놀음에 그쳐서는 안된다는 노학자의 당부다.

오남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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