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35년 만에 끌어안고 펑펑…홀로 월남한 아들의 눈물[뉴스속오늘]

박상혁 기자 2024. 9. 20.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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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9월20일 남북한 이산가족 고향 방문단 및 예술공연단이 판문점을 건너 각각 평양과 서울로 향했다./사진=e영상역사관 갈무리


1985년 9월 20일. 3박 4일 일정의 '남북 이산가족 고향 방문 및 예술공연단 교환 방문' 행사가 막을 올렸다. 한국전쟁 발발 35년 만에 헤어진 가족들이 다시 만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이날 남한 측 이산가족 고향방문단·예술공연단은 판문점을 통과해 평양으로, 북한 측 방문단은 서울로 향했다.

방문 인원은 사전 합의한 대로 남북한 각각 △고향방문단 50명 △예술공연단 50명 △취재기자 30명 △지원인력 20명 등 151명이었다.

이 행사의 하이라이트인 이산가족 상봉은 상대측이 마련한 시간과 면회 장소에서 이뤄지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14년의 회담 끝에... 마침내 합의된 이산가족 상봉
제1차 남북적십자 본회담이 진행되고 있는 장면/사진=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갈무리

이날 행사를 개최하기까지 남북은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대화의 첫 단추는 이산가족 찾기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던 우리 측이 먼저 끼웠다.

1971년 8월 12일 대한적십자는 '1천만 이산가족 찾기 운동'을 위한 회담을 북측에 제의했고, 북한이 이 제의를 받아들여 1972년 8월 30일 평양에서 제1차 남북적십자회담이 열렸다. 이듬해 7월까지 서울과 평양을 번갈아 총 7차례 본회담이 열렸다.

대화는 1977년 12월 이후 갑자기 중단됐다. 이후 △1978년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1983년 아웅산 폭탄 테러 사건이 잇따르며 남북 관계는 크게 악화했다.

분위기는 1984년 재선에 성공한 로널드 레이건 미국 전 대통령이 한반도 안정·평화 정책을 추진하며 반전됐다. 이듬해 고르바초프가 새 소련공산당 서기장으로 선출돼 미국과 대화 기조를 강화하자 남북한도 관계를 재정립해야 했다.

때마침 1984년 북한이 우리 측 홍수 피해에 쌀과 옷감 등 수해 물자를 제공해주겠다며 나섰다. 우리 측은 대화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이를 수용했고, 북한에 적십자회담 재개를 촉구했다.

1984년 서울 일대에 홍수 피해가 발생하자 북한이 수해 물자로 보낸 쌀. 이 사건을 계기로 남북한 간의 대화가 재개됐다. 일각에선 수해 물품 지원 제의를 남한이 수락하자 북한이 상당히 당황했다는 증언도 있다./사진=대한뉴스 제 1059호 갈무리


우여곡절 끝에 양측은 1985년 5월 27일 열린 제8차 적십자 회담에서 이산가족 고향방문단 교환에 합의했다. 예술단 공연도 교환해 각각 서울과 평양에서 공연하기로 결정했다.

남북은 이산가족 고향단이 방문할 지역을 두고 마지막까지 입장차를 보였다. 남한 측은 이산가족이 직접 자기 고향에 방문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북한 측은 이를 거부했다.

결국, 양측은 방문지를 서울과 평양으로 정하고, 해당 지역 출신자 위주로 고향방문단 인원을 구성하기로 합의했다.
감동적인 이산가족 상봉…현장은 순식간에 눈물바다
1·4 후퇴 때 두 아들과 헤어져 혼자 월남한 아버지가 평양에서 재회했다./사진=대한뉴스 갈무리

1985년 9월 20일 양측 대표단이 판문점을 통과하며 행사는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산가족 상봉은 이튿날인 1985년 9월 21일 오전 10시쯤 이뤄졌다. 남한 측 방문단이 평양 고려호텔 상봉장에 들어서자 현장은 순식간에 눈물바다가 됐다.

이날 상봉장엔 혼자 월남해 한국에서 변호사가 된 아들이 평양에 홀로 남기고 온 아버지를 만나 한동안 부둥켜안고 눈물을 터뜨렸다.

이 외에도 △1·4 후퇴 때 두 아들과 헤어져 혼자 월남한 아버지 △어머니를 홀로 두고 월남해 한국에서 목사가 된 아들 △누나를 두고 혼자 남한으로 피신한 남동생 등이 재회했다.

평양 고려호텔 상봉장에서 이산가족이 상봉하고 있는 모습./사진=대한뉴스 갈무리


북한 측 고향방문단은 서울 쉐라톤호텔에서 이산가족 상봉을 했다.

이날 상봉으로 남북 100명의 이산가족방문단 중 65명(한국 35명·북한 30명)이 92명의 가족·친척들과 만났다.

그 시각 서울예술단은 평양대극장에서, 평양예술단은 서울국립극장에서 공연을 실시했다. 공연은 21일~22일까지 이틀에 걸쳐 진행됐다. 공연은 '상대방을 비방하지 않는다'는 원칙하에 정치색으로부터 자유로운 전통 민족 가무 중심으로 진행됐다.

1985년 9월 23일. 남북 고향방문단 및 예술공연단이 판문점을 거쳐 각각 서울과 평양으로 귀환하며 행사는 막을 내렸다.
성공적인 이산가족 상봉… 끝나자마자 남북 관계 다시 살얼음판

1996년 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을 보도하고 있는 모습./사진=KBS 뉴스 갈무리

행사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 이듬해인 1986년. 남북 관계에 다시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대한적십자사는 '제2차 이산가족 고향 방문'을 추진하려고 북측에 꾸준히 대화를 제의했다. 하지만 북한은 "1986년 1월 20일에 열리는 한미합동군사훈련 '팀스피리트'와 대화는 양립할 수 없다"며 남북적십자회담을 비롯해 예정된 모든 남북회담을 일방적으로 연기했다.

이후 북한은 △1987년 KAL 858편 폭파 사건 △1993년 북한의 NPT(핵확산방지조약) 탈퇴 선언 △1996년 강릉 무장 공비 침투 사건 △1999년 제1연평해전 등을 일으켜 양측 관계는 악화 일로를 걸었다.

2000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취임한 그해 8월 15일 이산가족 상봉을 재개하기까지 15년간 인적교류는 모두 끊겼다.
아직도 만나지 못한 이산가족 13만
1988년~2024년 8월 이산가족 신청현황/사진=남북이산가족찾기 이산가족정보통합시스템 갈무리

'남북 이산가족 고향 방문 및 예술공연단 교환 방문 행사'로 이산가족들은 한국전쟁 발발 35년 만에 혈육의 정을 나눴다.

특히 △이산가족들이 남북을 왕래하며 가족·친척들과 상봉했다는 선례를 만든 점 △양측이 대화를 통해 이산가족 상봉을 이뤄낸 점 등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남북 간의 이질화 현상은 끝내 극복하지 못했다. 또한 북한이 팀스피리트 훈련을 구실로 대화를 일방적으로 중단하는 등 상대를 위협 세력으로 보는 한계점도 명확했다.

통일부에 따르면 1988년부터 2024년 8월 31일까지의 이산가족 신청자는 13만4158명이다.

박상혁 기자 rafandy@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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