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기초과학 미래…'연구자 자원동맹'만이 살 길
"전 세계적으로 자원 경쟁이 심화하며 기초과학의 미래도 어두워질 겁니다. 개별 과학자가 국경을 뛰어넘어 연구 자원을 공유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가 온 겁니다" 지난 12일 GIST(지스트·광주과학기술원)에 문을 연 IBS(기초과학연구원) 양자변환연구단을 이끄는 김유수 단장의 말이다.
김 단장은 일본 최고의 국립 기초과학연구기관이자 '노벨상의 산실'로 불리는 이화학연구소(RIKEN)에서 3개월 계약직 연구원으로 시작해 연구자로서 최고 직위인 수석 과학자에 임명된 '전설적' 인물이다. 2022년엔 도쿄대 응용화학과 교수로 임용돼 강단에 섰다. 그런 그가 기초과학 강국 일본에서의 화려한 경력을 뒤로 하고 광주에 자리 잡자, 그 이유를 둘러싸고 이목이 쏠렸다.
양자변환연구단 개소 하루 전인 지난 11일, 광주광역시 북구 GIST 캠퍼스 내 양자변환연구단 연구동에서 머니투데이와 만난 김 단장은 "스물여덟살에 한국을 떠난 지 딱 28년 만에 다시 돌아왔다"며 "출발점에서 반환점을 지나 다시 출발점에서 선 기분"이라고 말했다. 그가 이끌 양자변환연구단은 양자 상태에서 발생하는 분자 간 상호작용을 계측하고 제어하는 방법을 연구한다. 김 단장은 "이론으로만 다루던 무수한 양자 법칙을 실험적으로 증명하는 게 목표"라고 했다.
김 단장은 30년 가까이 계면화학을 연구했다. 계면화학은 각자 성질이 다른 물질이 맞닿을 때 그 경계면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연구하는 화학 분야다.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한 김 단장은 후지시마 아키라 도쿄대 화학과 교수 연구실에서 박사 과정을 시작했다. 아키라 교수는 빛을 통해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물질인 '광촉매' 반응을 최초로 발견하고 증명한 일본의 화학자다. 화학공학 전공자들로 채워져 있던 연구실에서 김 단장은 유일한 순수과학도였다. 그의 과제는 광촉매의 기반이 되는 빛과 분자의 상호작용을 화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이었다.
김 단장은 직접 단결정 샘플을 만들고 현미경을 개조했다. 48시간 내내 현미경을 들여다보며 분자들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기록했다. 그는 "빛과 직접적으로 만나며 분자들의 움직임을 고스란히 관찰할 수 있는 물질의 표면에 큰 관심을 갖게 됐다"고 했다. 연구자로서의 가치관도 이때 정립했다. 김 단장은 "아키라 교수는 물리적으로 가능하다면 닥치는 대로 하라'는 과학자로서의 태도를 항상 강조했다"고 말했다.
1998년, 박사 3년 차에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에 논문을 발표한 김 단장은 RIKEN에서 3개월짜리 계약직 연구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이곳저곳에서 남은 재료를 끌어다 저성능 현미경을 직접 개조하고 이를 통해 연구 성과까지 속속 내놨다. 이후 사이언스, 네이처에 굵직굵직한 논문을 연달아 발표하며 빠른 속도로 계면화학을 대표하는 연구자로 자리 잡았다.
그 와중에도 RIKEN을 대표해 각종 국제학회 및 위원회에 빠짐없이 참석했다. 김 단장은 "거절이라는 선택지는 한 번도 고려하지 않았다"고 그 시절을 회상했다. 그 결과 김 단장은 2015년, RIKEN의 수많은 연구원 중에서도 극소수만 임명되는 종신직 수석과학자에 올라 표면·계면과학 연구실을 이끌게 됐다.
'과학자의 성공 가도'를 달려온 김 단장이지만 그가 바라보는 기초과학의 장래는 어둡다. 이런 전망은 역설적으로 그가 한국행을 택한 결정적 이유가 됐다. 김 단장은 "국경을 뛰어넘어 연구자 간 '자원 동맹'을 시작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각 국가가 가진 자원은 한정돼 있는데 기후변화·안보·인구수 모든 면에서 위기를 맞으면서 더 적은 자원을 갖고 경쟁하게 될 것"이라며 "기초과학은 자원배분의 우선순위에서 밀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각국의 과학자가 각자의 자원을 공유해 살아남아야 한다"고 했다.
김 단장은 "먼저 일본과 한국 연구계의 교류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고 했다. 그의 한국행을 계기로 그가 몸담았던 RIKEN 표면·계면과학 연구실과 IBS 양자변환연구단은 각 기관이 보유한 최첨단 연구 장비부터 인력까지 여러 방면에서 자원을 교환하게 된다. 이어 도쿄대 응용화학과 GIST 화학과 간의 교류도 추진 중이다. 김 단장은 "연구과제가 끝나거나 사람이 그만두면 끊어지는 단기적 국제 공동연구가 아닌, 다음 세대까지 이어질 수 있는 지속 가능한 연구 생태계를 만들고 싶다"고 소망을 전했다.
박건희 기자 wissen@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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