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사채로 근근이 버텼는데…적자 가계부에 ‘미래’가 적혔다

허윤희 기자 2024. 9. 20.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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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돌봄청년의 굴레(하) 월120만원 디딤돌소득이 바꾼 삶
게티이미지뱅크
끊을 수 없는 ‘돌봄’이라는 굴레에 갇힌 이들이 있다. 질병, 장애 등을 가진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만 14~34살의 청년이나 청소년들, 즉 ‘가족돌봄청년’이다. 보호받아야 할 나이에 가족을 돌봐야 하는 이들은 ‘일찍 철들었다’ ‘효자다’라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이런 말조차 버겁고 부담스럽다. 정부와 사회가 함께 짊어져야 할 돌봄 무게를 홀로 감당하는 이들에게 꿈을 꾸며 성장하는 시간은 없다. 정부는 가족돌봄청년을 전국적으로 10만여명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아직 정확한 규모나 실태 파악은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한겨레는 이 사회에 존재하지만 드러나지 않은 이들의 현실은 어떤지, 이들에게 필요한 돌봄은 무엇인지를 2회에 걸쳐 살펴봤다.

최미경(가명·28)씨는 조울증을 앓는 여동생과 살고 있다. 부모의 학대에 시달려온 최씨 자매는 8년 전 집을 나오면서, 최씨가 동생의 보호자다. 맨몸으로 집에서 나온 터라 최씨 홀로 벌어 생계를 꾸려가는 것은 힘에 벅찼다. 게다가 동생은 몇차례 정신병동에 입원하는 등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집에서만 지내는 ‘고립 청년’이 된 동생을 돌보는 최씨는 커피숍 서빙, 식당 홀 서빙, 아기 돌보기 등 단기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꾸려가고 있다. 최씨는 “동생이 몇번 자살 시도도 해서 혼자 놔두면 불안하다. 동생 병원에도 같이 가야 하고 약을 제때 먹도록 챙겨야 하고. 동생을 돌봐야 하니 휴가를 갑자기 낼 일이 많아 직장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단기 일자리를 찾아 일하다 보니 벌이는 더욱 불안정해졌다.

힘들어도 기댈 곳은 없었다. “동생이 어느 날 저한테 와서 ‘언니랑 나랑 둘이 독방에 있는 것 같아. 우리만 (사회와) 떨어져 있는 것 같아. 외로워’ 그러는 거예요. 그 말을 듣고 동생한테 뭐라고 해줄 말이 없었어요.”

최씨는 “동생이 아프니 병원비로 돈이 많이 나간다. 매달 정신과 치료비만 10만~20만원 정도 나가고, 병원에 입원할 때면 6인실이라도 한달에 160만원이 든다. 월세, 생활비까지 빼고 나면, 내가 버는 돈보다 지출이 항상 많다”고 말했다.

지난해 5월 최씨의 가계부를 보면 수입은 알바로 번 돈 70만원과 대부업체에서 빌린 100만원을 합친 170만원이다. 지출은 월세 50만원, 동생과 자신의 의료비 40만원, 대출 이자와 대부업체 원금 상환 110만원, 식비와 생활용품 구입비 11만원 등 230만원이다.

그는 생활비가 부족할 때마다 사채로 돈을 빌리거나 카드 돌려막기를 했다. 빚은 계속 쌓였다. 대부업체의 고리대금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정규 일자리가 없는 최씨가 급할 때 손을 뻗을 만한 곳은 이곳뿐이다.최씨는 “직장에 다니는 것도 아니고 알바 한달에 150만원도 못 버니 은행이나 대부업체에서 돈을 빌리기 어려웠다. 사채를 쓸 수밖에 없었다”며 “사채 이자 300% 되는 곳도 있었다. 못 갚으면 계속 연락이 오고 협박을 당한 적도 있었다”고 말했다.

항상 마이너스였던 가계부가 달라진 건 지난 4월부터다. 서울시의 ‘1호 가족돌봄청년’으로 선정돼, 서울시로부터 매달 디딤돌소득(안심소득) 120만원을 지원받으면서다. 서울시는 2022년 7월부터 기준 중위소득 85% 이하 가구(재산 기준 3억2600만원 이하)에 기준소득보다 부족한 가계소득의 절반을 현금으로 채워주는 소득보장제도인 디딤돌소득 시범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올해 4월부터 내년 3월까지 진행하는 디딤돌소득 3단계 시범사업에는 최씨를 포함한 가족돌봄청년 128가구를 지원 대상에 포함했다. 지방자치단체가 제도권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거나 사각지대에 있는 가족돌봄청년에게 소득을 지원하는 건 전국 처음이었다.

지난 7월 최씨의 수입은 알바비 90만원과 디딤돌소득 120만원을 더해 모두 210만원이다. 고정 지출은 월세 50만원, 의료비 40만원, 교통비 5만원, 통신비 4만원, 공과금과 관리비 10만원, 부채 상환(학자금, 생계대출 이자) 20만원이다. 개인워크아웃을 신청해 대부업체로부터 받은 불법 대출의 이자는 내지 않고 있다.

식비와 생활용품 구입에 50만원을 썼다. 그동안 하지 못했던 ‘작은 사치’다. “항상 돈이 부족하니 식비로는 꼭 필요한 쌀이나 반찬거리만 사고, 과일은 엄두도 못 냈어요. 그런데 요즘에는 과일을 사요. 얼마 전엔 운동화도 샀어요. 낡아도 계속 신고 다녔는데 이참에 큰맘 먹고 샀죠.”

최미경씨 가정사에 관한 사연이 담긴 책 ‘엔딩까지 천천히’. 최미경 제공

‘마이너스’만 보였던 최씨 가계부엔 이젠 ‘미래’가 적힌다. 청약저축 2만원, 직업훈련 학원비 15만원이다. 그는 고정적으로 지원금이 들어오니 미래 계획을 세울 수 있단다. “스무살 때부터 항상 돈이랑 시간이랑 바꾼 느낌이었어요. 남들은 학원 가고 자격증시험 공부 할 때 저는 돈을 벌어야 하니 일을 해야 했어요. 단순 알바라 아무리 해도 경력이 안 되는 ‘물경력’이고요. 이제 고정적으로 지원금이 들어오니 자기 계발도 할 수 있고 시간을 번 것 같아요. 취업을 위해 엑셀 등 컴퓨터 관련 직업훈련교육도 받고 있어요.” 수입 210만원에서 지출 196만원을 빼면 14만원이 남았다. 남은 14만원은 저축도 했다.

최씨는 자신을 돌보지 못하고 지칠 때마다 팟캐스트에 보낸 자신의 사연글에 적힌 답장을 마음에 새긴다. ‘앞으로의 삶은 와이(Y)님의 선택으로 달라질 거예요. 와이님을 망하게 하는 것도 와이님을 구원하는 것도 오로지 와이님 자신이어야 합니다. 가족에게 그 권리를 넘겨주지 마세요.’

서울시는 디딤돌소득 지원을 받는 가족돌봄청년을 대상으로 올해 하반기 삶의 질 등 질적 연구를 진행할 계획이다. 박지혜 서울시 안심소득과 주무관은 “지원을 받은 가족돌봄청년들 대다수가 (디딤돌소득으로) 밀린 월세를 내거나 운전, 컴퓨터 등 자격증을 따기 위해 학원을 다닐 수 있게 됐다”며 “생계를 꾸려가기 급급했는데 이 소득으로 자기의 미래를 위해 준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 같다고 한다”고 말했다.

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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