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아무것도 아닌 것의 가장자리, 폭발하는 픽션의 힘
픽션적 합리성의 전개와 변천 살펴
의미발생 위계 거부하는 공통감각
‘아무것도 아닌’, 결정적 파열음
픽션의 가장자리
새로운 주체, 공통의 세계를 찾아 나선 지적 여정
자크 랑시에르 지음, 최의연 옮김 l 오월의봄 l 2만2000원
자크 랑시에르(84)는 2000년대 한국문학 담론에서 가장 많이 호명된 외국 이론가 중 한 사람이다. 특히 진은영 시인의 2008년 논문 ‘감각적인 것의 분배’를 계기로 시의 정치성 논의에서 랑시에르는 매우 중요한 참조점으로 구실했다. 그 논문에 큰 영향을 준 ‘감성의 분할’, 그리고 국가 박사학위 논문인 ‘프롤레타리아의 밤’을 비롯해 미학과 정치, 철학에 두루 걸쳐 있는 그의 책은 20권 가까이 번역 출간되어 한국 독자들에게 읽혔다. 그 목록에 최근 ‘픽션의 가장자리’(2017)가 추가되었다.
이 책에서 랑시에르는 우선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기대어 픽션의 합리성 개념을 정초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플라톤은 이데아로부터 두 단계 떨어져 있다는 이유로 시를 폄훼하고 공화국에서 시인을 추방했다. 그렇지만 역사가 개별적 사실을 말하는 데 반해 시는 보편적인 것을 말하기 때문에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고 고귀하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반론이다. 랑시에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를 이어받아 “픽션을 일상적 경험과 구별하는 것은 결여된 현실성이 아니라 과도한 합리성”이라는 말로 책을 시작한다.
그러나 고전 비극에서 픽션적 합리성의 원칙에 따라 개안(開眼)과 추락의 운명을 경험하는 주체는 어디까지나 고귀한 신분을 지닌 소수일 뿐이었다. 근대 픽션은 소수의 몫이었던 이런 운명을 평범한 다수 대중에게 나누어 주는 데에서 출발한다. 랑시에르는 스탕달과 발자크, 플로베르, 프루스트 같은 프랑스 작가들은 물론 조지프 콘래드와 버지니아 울프, 윌리엄 포크너 같은 영미권 작가들, 독일 작가 제발트와 브라질 작가 주앙 기마랑이스 등의 다양한 작품을 예로 들며 픽션적 합리성의 전개와 변천 과정을 살펴본다.
책의 제1부 ‘문과 창문’에서는 프랑스 혁명 이후 등장한 문학작품들에서 창문이 계급적 위계를 어떻게 무너뜨리는지를 보여준다. 과거에는 “귀족과 귀부인들이 궁전의 창문이나 호화로운 사륜마차의 문을 통해 오직 멀리서만 시골과 서민들을 바라봤”던 데 비해, 혁명 이후의 소설들에서 “창문들은 귀족들을 자연사 박물관에 전시된 동물들로 변형시키고, 역으로 일하기 위해 몸을 구부린 노동자들의 얼굴을 예술의 광경이자 사랑의 대상으로 변화시킨다.”
추리소설의 역사를 일별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픽션적 합리성에 대한 전복을 시도하는 제2부 제2장 ‘인과성의 모험들’은 특히 흥미롭다. 추리소설은 무엇보다 픽션적 합리성을 장르의 핵심으로 삼는다. 분석과 추리를 통해 범인을 추적해 가는 과정에서 합리성은 불가결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초의 추리소설로 꼽히는 에드거 앨런 포의 ‘모르그가의 살인’은 랑시에르가 보기에 추리소설로서 커다란 결격사유를 지니고 있다. 추리의 대상인 범죄에는 합리적으로 추적할 만한 동기가 있어야 하는데, 오랑우탄의 우발적 살인이라는 이 소설 속 사건은 인간적 동기를 결여하기 때문에 범죄의 기준에 미달한다는 것이다.
아서 코넌 도일의 셜록 홈스를 비롯한 추리소설 속 탐정들은 대체로 겉으로 보이는 것이 아닌, 범인이 공들여 숨겨 놓은 단서들을 근거로 범인을 추론한다. “만약 시체가 물가에서 발견되었다면, 그것은 그 시체가 성안에서 살해된 이후 고의적으로 옮겨졌다는 것을 가리킨다. (…) 범죄가 일어난 게 분명한 방의 마루에 도끼가 놓여 있다면, 그것은 살인자가 그 도끼를 이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렇듯 외양과 진실이 어긋나는 추리소설의 문법에서 랑시에르는 이데아와 시에 관한 플라톤의 주장을 떠올린다. 플라톤이 보기에 시가 이데아의 모방인 현실의 이차적 모방일 뿐인 것처럼, 추리소설 속 외양(단서)은 진실(범인)로부터 관찰자를 최대한 멀리 떨어뜨려 놓는 구실을 할 뿐이다. “범죄는 그것이 저질러졌던 것처럼 보이는 방식으로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추리소설의 합리성은 아리스토텔레스적 합리성에 대한 전복이요 쇄신에 해당한다.
제발트의 소설 ‘토성의 고리’는 1992년 8월 말이라는 구체적인 날짜에 영국 동부 도시 노리치 부근이라는 분명한 장소에서 착수한 여행을 다루고, 문서고의 기록물들과 사진 등을 제시하며 이야기의 사실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반복되는 여담과 의미 없는 세부 사항들, 시간과 공간을 가로지르는 몽상 등은 그런 사실성을 의문에 부치며 새로운 사실성과 새로운 픽션의 탄생을 보여준다. “사소한 사건들과 거의 지워진 흔적으로부터 역사를 창조하는” 제발트의 소설은 의미 발생에 작용하는 위계를 거부하며, “종속시키지도 파괴하지도 않으면서 연결시키는 공통 감각을 생산한다.”
제발트에 이어 랑시에르는 울프와 포크너의 작품들을 다루는데, 특히 에리히 아우어바흐의 ‘미메시스’에서 강조했던 ‘보잘것없는/임의의’ 순간 개념을 통해 논지를 펼친다. 울프 소설 ‘댈러웨이 부인’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래를 중얼거리는 노파와 전쟁의 트라우마에 시달리다 창문에서 뛰어내린 청년 셉티머스를 등장시킨 두 장면은 얼핏 사소하고 작품 주제와 무관해 보이지만, 사실 그것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과 모든 것 사이의 경계에 있는 동요의 순간”을 포착한다. ‘소리와 분노’에서 작가 포크너가 백치 벤지의 알아들을 수 없는 불평을 두고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저 소리였을 뿐이다”라며 깎아내렸다가 이내 “이것은 행성들의 회합에 의해 잠시 소리를 낸 시간의, 불의의, 고통의 총체였을 수도 있다”며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는 대목은 보잘것없는/임의의 순간이 사실은 결정적인 동요의 순간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순간으로부터 랑시에르가 생각하는 픽션의 급진적 정치성이 솟아오른다.
“임의의/보잘것없는 순간은 또한 파열의 힘이자, 배가의 힘이다. 임의의/보잘것없는 순간은 지배적인 시간, 즉 승리자들의 시간의 ‘승리’가 가장 확실시되었을 때조차 승리자들의 시간을 폭발시키는 힘이다. 지배적인 시간이 말 바깥, 시간 바깥에 있는 이들을 밀쳐낸 곳, 아무것도 아닌 것의 가장자리에서 이 힘은 작동한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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