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와 딸, 대명사를 공유하다 [책&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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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가 소설 안으로 진입할 때 진술은 시나리오와 어떻게 달라지는가? 벨기에 브뤼셀 출신의 영화감독 샹탈 아케르만은 카메라가 되어 브뤼셀의 어느 가족 안에 들어가 진술을 시작한다.
"그리고 나는 다시 브뤼셀의 거의 텅 빈 넓은 아파트를 바라본다. 통상 가운을 입고 있는 여자 한 명만 있는 그곳을. 얼마 전에 남편을 잃은 여자." 소설은 중간 부분부터 아무렇게나 재생한 영화처럼 돌연하게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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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셀의 한 가족
샹탈 아케르만 지음, 이혜인 옮김 l 워크룸프레스(2024)
카메라가 소설 안으로 진입할 때 진술은 시나리오와 어떻게 달라지는가? 벨기에 브뤼셀 출신의 영화감독 샹탈 아케르만은 카메라가 되어 브뤼셀의 어느 가족 안에 들어가 진술을 시작한다.
“그리고 나는 다시 브뤼셀의 거의 텅 빈 넓은 아파트를 바라본다. 통상 가운을 입고 있는 여자 한 명만 있는 그곳을. 얼마 전에 남편을 잃은 여자.” 소설은 중간 부분부터 아무렇게나 재생한 영화처럼 돌연하게 시작한다. ‘나’로 시작한 진술은 ‘여자’를 바라보며 계속되고 우리는 곧 이 여자의 가족에 관해 이런저런 사연들을 알게 된다. 여자는 남편을 잃었고 두 번째 수술을 앞두고 있으며 딸이 둘 있고 여러 친척과 왕래하며 살고 있다. 두 딸 중 하나는 결혼해 아이가 있고 또 다른 딸은 프랑스 파리의 메닐몽탕에 혼자 산다. 진술은 깜박 낮잠이 든 여자의 잠꼬대처럼 분절했다가 이어지길 반복하는데, 처음 소설의 문을 연 ‘나’에 초점을 맞추고 이야기를 따라가던 독자는 돌연 대명사가 지시하는 대상이 달라지는 순간을 발견하고 크게 당황한다. 정체를 알 수 없었던 ‘나’는 카메라였다가, ‘얼마 전에 남편을 잃은’ 가족의 어머니였다가 갑자기 메닐몽탕에 사는 딸이 된다. ‘나’는 또 ‘그녀’와 겹치기도 하는데, ‘나’가 딸일 때 ‘그녀’는 어머니가 되고 ‘나’가 어머니일 때 ‘그녀’는 딸의 옷을 입는다. 이렇게 인칭대명사가 교차하고 혼용되는 혼란의 순간 대명사의 지시성은 효력을 잃고 해체되며 소설에 진입했던 카메라는 어디론가 사라진다. 초점 화자를 잃어버린 독자는 누구에게 기대어 이 이야기를 끝까지 독해해야 할까?
“내 딸이 하는 수많은 이야기 중 모두가 진실은 아니지만 개중 진실인 것도 있고 그건 보통 웃음을 자아내는 이야기보다는 슬픈 이야기가 대부분이고, 그 애는 우리가 함께 모여 있고 기억이 날 때면 웃긴 이야기도 하는데 그 이야기들은 항상 진실은 아니지만 가끔 진실이기도 하다.” 자꾸만 인칭이 바뀌는 인물들이 이어가는 횡설수설과도 같은 이야기 안에서 우리는 가족이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이 브뤼셀 가족의 남편이자 아버지였던 남자를 애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가족 모두 오래전 홀로코스트의 기억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음을 짐작한다. 이렇게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분명한 실루엣을 투척하는 방식은 아케르만 감독의 영화 기법과도 닮아 있다. 그러나 단편이라고 할 만한 길지도 않은 이야기를 다 읽고 나면 우리는 평생 한 스타일로 묶는 게 불가능하게 언제나 완벽하게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 세상에 선보여 온 영화감독이 48살에 처음 발표한 이 소설 역시 오직 소설이라는 장르로만 설명할 수 있는 진술의 미학에 도달했음을 깨닫는다. 분명한 시각적 묘사에 의존하지 않고도 인물과 사건과 배경을 온전히 진술의 문장으로만 구축해냈다는 점에서 카메라로부터 독립한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특히 ‘나’와 ‘그녀’의 교차와 혼용을 통해 어머니와 딸이 한 몸이었던 시절부터 분리 이후의 애착과 분열과 불안까지 효과적으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소설은 이른바 ‘모녀 서사’의 전범이 된다.
이주혜 소설가·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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