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출소서 경찰관 살해 도주…21년간 안잡힌 범인은 '대전 은행 강도'
서로 떠넘기기…당시 알리바이 검증으로 이정학 검거, 무기 징역형
(서울=뉴스1) 신초롱 기자 = 2002년 9월 20일 오전 12시 50분쯤 전북 전주시 금암동 금암2파출소 소속 백선기(사망 당시 54세) 경사가 흉기에 찔려 숨진 채 발견됐다.
순찰을 돌고 온 동료 경찰들이 발견 당시 백 경사는 모로 엎드려 있는 상태였다. 출혈이 심한 탓에 바닥은 혈흔으로 얼룩져 있었다.
범인은 백 경사가 허리에 소지하고 있던 권총을 훔쳐 달아났다. 총에는 실탄 4발, 공포탄 1발이 들어 있었다. 당시 파출소에 CCTV가 있었지만 작동하지 않았다.
부검 결과 상복부 오른쪽 좌철창 크기는 5.5㎝, 왼쪽 가슴에 남은 치명상은 가로 8.5㎝, 세로 7㎝에 이를 정도로 크고 두 상처 모두 칼끝의 방향과 깊이가 정확히 심장을 겨냥했다.
과학수사팀은 파출소 내부에서 34개의 지문을 채취해 분석했지만 대부분 경찰관의 지문으로 밝혀지면서 용의자를 특정할 만한 단서가 나오지 않았다.
◇유력 용의자 3명 검거, 진술 번복·증거불충분으로 2개월 만에 석방
사건이 발생 넉 달째인 2003년 1월 20일 유력 용의자가 검거됐다. 검거된 이들은 20대 동갑내기 3인조 가출팸으로, 이들은 백 경사가 숨지기 4개월 전인 2002년 5월 22일 무면허 상태로 오토바이를 몰다 단속에 걸려 오토바이를 빼앗겼다. 이들을 적발한 사람이 백 경사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용의자들은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일어난 거냐"는 추궁하자 "오토바이 찾으러 가려고 했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다"라고 답했다. "어떻게 그렇게 끔찍한 일까지 일어났냐"는 물음에는 "말다툼하다 보니까 화가 좀 나서"라고 답했다.
경찰은 이들이 압류된 오토바이를 빼내려고 파출소에 침입했다가 백 경사와 시비 끝에 살해한 것으로 판단했다.
닷새 동안 총기 수색 작업을 벌이던 수사팀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후로도 건지산 등 주변을 샅샅이 수색했지만 권총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후 범인들은 경찰의 구타와 가혹 행위 때문에 허위 자백을 한 거라며 진술을 뒤집어 2개월 만에 증거불충분으로 전원 석방됐고, '백 경사 피살 사건'은 장기 미제 사건으로 분류됐다.
◇21년 만에 뜻밖의 소식…백 경사 소지 권총, 울산 숙박업소서 발견
피살 사건이 발생한 지 21년이 흐른 2021년 3월,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전북경찰청에 백 경사가 탈취당한 권총의 행방을 제보한 사람이 나타난 것.
제보자는 다름 아닌 2021년 대전 은행강도 사건의 주범으로 검거돼 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고 있던 이승만이었다. 이승만은 백 경사 피살 사건 진범을 안다며 편지 한 통을 보냈다. 편지에는 백 경사 피살 사건에 사용된 권총이 울산에 있으니 확인해 보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승만이 가리킨 곳은 철거를 앞둔 울산의 한 숙박업소였고, 실제 그곳에는 백 경사가 탈취당한 권총인 38구경이 있었다.
이승만은 이정학과 함께 '백 경사 사건' 9개월 전인 2001년 12월 21일 대전 둔산동 은행 주차장에서 현금 수송 업무를 하던 40대 직원을 총으로 쏴 살해하고 현금 3억 원이 든 가방을 챙겨 달아난 혐의를 받는다.
강도 사건 7553일 만인 2022년 8월 25일에 검거된 이승만, 이정학은 범행을 같이 한 사실은 인정했으나 이정학은 이승만이, 이승만은 이정학이 총을 쐈다며 서로 엇갈린 주장을 펼쳤다.
경찰은 이승만이 공범이었던 이정학과의 관계가 틀어져 백 경사 사건의 비밀을 털어놓은 것으로 보고 전담수사팀을 꾸려 '대전 국민은행 사건' 2인조 이승만, 이정학을 상대로 본격적인 조사에 돌입했다.
◇경찰 "이정학 진술, 사실과 맞지 않은 부분 많아"…단독 범행 결론
백 경사의 권총이 발견된 숙박업소는 이승만이 머물렀던 장소로, 이승만은 총기 보관은 자신이 했지만 범행한 건 이정학이라고 주장했다.
오래된 사건이라 직접 증거는 없었지만, 경찰은 두 사람의 진술과 그에 따른 사실 관계, 범죄 현장 동선 등을 토대로 이정학을 사건의 유일한 진범으로 지목했다.
사건 당시 이승만은 알리바이가 있고 범행을 부인하는 이정학의 진술은 사실과 맞지 않은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경찰은 이승만이 추석 연휴를 맞아 대구 본가에 머물렀다는 공통된 진술을 이승만 친인척 다수에게 확보했다. 이승만은 대구에 가기 위해 통과한 고속도로 요금소 순서까지 이야기하는 등 조사에 적극적이었다.
반면 이정학은 범행을 부인하며 진술을 계속 바꿨다. 사건이 발생한 전주는 가본 적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조사 결과 이정학은 전주에서 불법 음반을 유통한 사실이 드러났다.
경찰은 이정학이 일하면서 익힌 지리를 토대로 범행을 저질렀고 이후 논산을 거쳐 대전으로 도주했다고 판단했다.
백 경사의 권총과 함께 분실됐던 실탄과 공포탄은 결국 찾지 못했다. 이승만은 이정학이 추가 범행을 제안하면 거절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에 실탄을 2004년 우유 팩에 싸 고속도로 휴게소에 버렸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범행 전모를 밝히기 위해 두 차례의 대질 조사를 비롯해 각각 10회가 넘는 조사 끝에 혐의를 입증할 만한 증거를 확보, 이정학을 강도살인 혐의로 검찰에 송치했다. 하지만 이정학은 송치 이후에도 범행을 부인했다.
경찰은 그동안의 미제 사건을 전부 조사해 백 경사의 총이 범행에 사용된 적은 없는 것으로 파악했다.
한편 대전 국민은행 강도 살인 사건에 대해 1심 재판부는 피해자에게 권총을 쏜 것은 이승만이라고 판단, 무기징역과 함께 20년 전자장치부착을 명령했다. 이정학에게는 징역 20년과 10년의 전자장치부착명령을 내렸다. 이후 2심 재판부는 이승만의 형량을 그대로 유지하고, 이정학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두 사람은 항소했으나 대법원이 이를 기각하고 원심 판결을 그대로 확정했다.
rong@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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