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즈볼라 노린 '현대판 트로이 목마'… "이스라엘 유령회사가 직접 만들었다"

위용성 2024. 9. 20. 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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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에 페이퍼컴퍼니 차려 '삐삐 폭탄' 제조"
눈속임 위해 일반 고객에게 진짜 호출기 판매도
보안 탓 몸 사린 헤즈볼라... 이스라엘은 역이용
18일 레바논 동부 발벡의 한 주택에서 폭발한 무전기 잔해가 소파에 놓여 있다. 지난 17일 레바논 전역에서 무선호출기 수천 대가 동시다발적으로 터지면서 3,000명에 가까운 사상자가 발생했다. AP 뉴시스

레바논 전역에서 수천 대가 동시다발적으로 폭발하며 나라 전역을 공포에 빠트린 '무선호출기(삐삐) 폭탄'을 직접 만들고 공급한 당사자는 이스라엘이었을 가능성이 짙다는 분석이 나왔다. 레바논 친(親)이란 무장 정파 헤즈볼라 공격을 위해 제3국에 '유령 회사'를 차리는 수법으로 오랜 시간 공을 들인 '현대판 트로이 목마' 작전이었다는 얘기다. 치밀한 눈속임 탓에 헤즈볼라 대원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수십 년간 싸운 적의 폭탄을 몸에 지니고 있었던 셈이다.


헝가리에 페이퍼컴퍼니, 대만 상표 따다 생산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18일(현지시간) 익명의 전현직 국방·정보 당국자 12명을 인용해 이같이 보도했다. 전날 레바논에서 최소 12명의 사망자와 2,750~2,800명의 부상자를 낳은 '삐삐 동시다발 폭발 사건'은 이스라엘 정보 당국이 수년 전부터 기획·준비해 온 작전이었다는 것이다.

NYT에 따르면 시작은 2022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세운 페이퍼컴퍼니 'BAC 컨설팅'이었다.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UCL) 등 영국 명문대 출신 여성 학자를 대표이사로 내세우는 등 겉보기에는 그럴듯한 전자기기 제조·유통 회사였다. 대만 전자기기 업체 '골드아폴로'와 라이선스 계약도 체결, 삐삐 제품의 생산·판매를 위한 상표권 허가도 받았다.

그러나 정상적인 페이퍼컴퍼니라기보다는 '위장 회사'였다. 삐삐를 만든 주체는 실체 없는 BAC 컨설팅이 아니라 이스라엘 정보 당국이었다는 게 NYT의 분석이다. 물론 일반 고객을 대상으로 진짜 호출기도 만들긴 했다. 하지만 눈속임 목적이었다. 헤즈볼라 측에서 주문이 들어오면, 삐삐 배터리에 강력한 폭발 물질인 펜타에리트리톨 테트라니트레이트(PETN)를 소량 삽입했고, 원격 기폭 장치도 심었다. 이스라엘은 최소 2곳의 페이퍼컴퍼니를 더 차렸고, 같은 방식으로 헤즈볼라에 '삐삐 폭탄'을 팔아치웠다.

이스라엘이 차린 페이퍼컴퍼니로 지목된 헝가리 부다페스트 소재 'BAC 컨설팅' 건물. 로이터 연합뉴스

휴대폰 해킹 피하려다 '이스라엘산 폭탄' 수천 대 구매

2022년 여름부터 조금씩 판매됐던 호출기 주문량이 급증한 것은 지난해 10월 가자지구 전쟁 발발 이후부터다.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 편에서 싸우는 헤즈볼라가 이스라엘의 해킹·도청·위치 추적 등을 경계하느라 스마트폰 대신 '구식 삐삐' 사용을 대폭 늘렸기 때문이다.

특히 지난 2월 헤즈볼라 수장 하산 나스랄라가 내린 '스마트폰 사용 금지·호출기 소지' 명령이 이스라엘에는 결정적 기회였다. 올여름 '이스라엘산 삐삐 폭탄' 수천 대가 헤즈볼라 대원들에게 지급된 것이다. 나스랄라는 과학·기술 분야에서 몇 수 위인 이스라엘의 특수전 역량을 신경 써 왔는데, 오히려 역이용을 당한 셈이다.


유례없는 작전, 밑바탕엔 이스라엘 하이테크 역량

유례없는 규모의 '삐삐 폭탄' 작전 밑바탕에는 고도로 결집된 이스라엘의 사이버·보안 기술 역량이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이스라엘이 첨단 기술을 군사작전에 동원한 전례는 많다. 2010년 이란 핵시설을 겨냥한 악성코드 '스턱스넷' 공격이 대표적이다. 지난 7월 하마스 최고 정치지도자 이스마일 하니예를 이란에서 암살한 작전에도 인공지능(AI) 기능을 탑재한 첨단 원격조종 폭탄이 쓰였다.

이스라엘군 소식 비밀 첩보 기관인 '8200부대'가 이번 작전에 일부 관여한 정황도 있다. 영국 로이터통신은 서방 안보 소식통을 인용해 "호출기 제조 단계에서 원격 폭발이 가능한 폭약 장착 실험을 8200부대가 맡았다"고 이날 전했다.

신호 정보 감청, 암호화, 사이버전 등 임무를 수행하는 8200부대는 '이스라엘 하이테크 산업의 인큐베이터'로 불린다. 초등학생 영재들을 선발해 교육시킨 뒤, 성인이 돼 복무하면 실용적·창의적인 임무 수행을 맡겨 최고의 엔지니어로 키워낸다고 한다. 전역한 인재들이 만든 기술 스타트업은 1,000여 곳을 넘는다. 이 중 최소 5곳은 미국 증시에도 상장돼 기업 가치가 1,600억 달러(약 212조 원)에 달한다. 지난달 미 월스트리트저널은 "8200부대가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잘나가는 인재풀이 됐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위용성 기자 up@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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