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180] 노벨상과 녹나무 학문
일본인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는 1949년 물리학상을 받은 유카와 히데키 교토대학 교수다. 유카와 이전에도 노벨상 후보에 오른 일본 과학자가 여럿 있었다. 그중에서도 수상에 가장 근접했던 인물이 야마기와 가쓰사부로(山極勝三郎) 도쿄제국대학 의학부 교수다. 당시 의학계는 아직 암의 발병 원인을 밝히지 못하고 있었다. 야마기와는 1915년 토끼의 귀에 타르를 장기간 접촉시키는 실험을 통해 인공적으로 암을 발생시키는 데에 성공한다. 3년 이상이 걸린 집념 어린 실험을 통해 특정 물질에 의한 세포 자극이 암의 원인임을 입증한 것이다.
1926년 노벨 생리의학상 위원회는 야마기와를 유력한 후보로 검토했지만, 그해 노벨상은 기생충이 암의 원인이라는 실험 결과를 발표한 덴마크의 요하네스 피비게르에게 돌아갔다. 아이러니한 것은 정작 상을 받은 피비게르의 기생충 가설과 실험은 훗날 명백한 오류로 밝혀져 과학계에서 퇴출된 반면, 탈락의 고배를 마신 야마기와의 실험은 이후 암 연구의 이정표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현대인이 귀가 따갑도록 접하는 ‘발암물질’ 경고는 야마기와의 연구가 물꼬를 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에는 ‘매화나무 학문(梅の木学問)’, ‘녹나무 학문(楠学問)’이라는 말이 있다. 매화나무는 빠르게 자라지만 일정 높이 이상 크지 못한다. 녹나무는 생장은 느리지만 천 년을 넘게 살며 수십 미터 높이의 거목으로 성장한다. 학문에 임함에 있어 빠르게 성과를 내지만 일정 한계를 넘지 못하는 경우와, 진전이 더디더라도 착실히 성장해 큰 성취를 이루는 경우를 두 나무의 속성에 빗댄 것이다.
매년 10월 초 노벨상 발표 시즌이 되면 기대와 실망이 교차하는 것이 한국의 신(新)풍속도다. 눈앞의 성과가 급한 매화나무 학문이 필요한 때도 있다. 다만 과학 분야의 노벨상이란 시간이 걸리더라도 기초를 다지며 축적에 힘쓰는 녹나무 학문의 토대가 견실할 때 기대할 수 있는 보너스와 같은 존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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